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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2화 (192/254)

192 화

"......뭐라고?"

헬리오스가 믿기지 않는 듯 되 물었다. 주위의 귀족들의 수군거 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의 말이 잘 안 들릴 지경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서 혼들림 없이 그와 눈을 맞추었다.

"다가올 전쟁의 훈련관 자리를

제게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내 최종적인 목표였다.

헬리오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엘이 편하게 앉아 있던 몸을 일으 키며 팔걸이를 꽉 잡았고, 티나의 두 눈은 혼들리고 있었다.

"조용!"

헬리오스가 거칠게 팔걸이를 내 려쳤다. 그 서릿발 같은 위엄에 떠들썩하던 홀 전체가 얼어붙은 듯 조용해졌다. 헬리오스가 높은

왕좌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가오는 전쟁이라. 크리시스 공녀는 전쟁의 발발을 확신하는 가?"

헬리오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 르게 엄격했다. 시리게 번뜩이는 푸른 눈은 죄를 재판하는 심판장 같았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심호 흡했다.

폭풍전야 같은 지금, 공식적인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전쟁을 언급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아직

다들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때 전쟁을 언급했다간 불길한 얘기라는 이유로 몰매를 맞을지도 몰랐다.

"네. 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겁니

하지만 누군가는 시작을 끊어야 하는 법.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 했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한시 가 급했다. 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쉬쉬하는 건 이쯤이면 충분 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곳은 어린애들 놀이터도, 가십 을 논하는 살롱도 아니야. 그대가 뱉는 말의 무게를 알아야 할 걸 세."

완벽하게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 은 헬리오스가 턱을 괴었다. 그 오만한 권위가 나를 서서히 짓눌 렀다. 나는 굴하지 않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도 이미 아시잖습니까."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뒷말은 시선으로 마저 전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리오 스는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 장내를 둘러보더니 손을 휘저었

"시상식은 이것으로 파해야겠군. 그리고......

헬리오스의 푸른 눈이 장내의 고위 귀족들을 훑었다. 시상식은 큰 이벤트였기에 키프로스와 데카 르트, 아인하르트와 크리시스 모 두 이곳에 모인 상태였다. 헬리오 스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다 모여 있으니 대귀족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내 권한 으로."

장내가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시 작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

았다.

사실 군 훈련관에 대한 것은 헬 리오스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 이었다. 군 통솔권은 카이사르에 게, 황궁 기사단의 전체 총괄권은 노아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헬리오스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기서 딱 잘라 도 사실상 할 말은 없는 건데...... 대귀족 회의를 열어 주겠다는 건, 나를 지지해 주겠다는 건가.'

대귀족 회의는 모든 대귀족의

동의하에 개최된다. 저번 사냥 대 회 건으로 인한 대귀족 회의 또한 그렇게 진행되었다.

황제와 교황은 자신들의 권한을 이용해 동의 없이 회의를 열 수 있긴 했지만, 그건 1년에 딱 2번 으로 한정되었다.

그 얼마 안 되는 기회를 나를 위해 썼다는 건 나를 지지하겠다 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걸 바라고 살려 준 건 아니지 만 정말 살리길 잘했네.'

이건 도박처럼 던진 패였다. 아 무리 미르의 이름이 있다 해도 아 직 아무것도 증명해 내지 못한 한 낱 평민 출신 공녀를 훈련관으로 삼아 줄 가능성은 낮았으니.

안 되면 카이사르의 이름을 빌 려 그의 보좌관이 되어서라도 어 떻게든 개입하려 했건만, 상황은 내 생각보다 좋게 돌아가고 있었 다.

"급작스러운 것이니 다른 절차 는 모두 빼고 회의장에 차만 준비

하게."

갑작스러운 상황에 급하게 움직 이기 시작한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린 헬리오스가 나를 힐끗 바라 보았다.

그러더니 오렌지 과육마냥 상큼 하게 윙크했다.

'성격 참 독보적이야.'

맛이 가도 단단히 간 그의 성격 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그저 감정 없이 미소 지었다. 데뷔탕트

무도회 때의 데자뷔가 느껴지기도 했다.

홀 내의 귀족들이 물밀듯이 빠 져나가고 시종 하나가 대귀족들을 회의장으로 안내했다. 장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지는 것 같은 가운데, 카이사르와 아리 아, 칼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잘하고 오라고 하진 못하겠군. 적당히 하고 와라."

"이 자식 말은 무시하고. 잘 다 녀와."

칼과 아리아는 대귀족 회의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내게 짧은 인 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나는 카이 사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미리 말했지만 나는 이번 일에 아무 말도 얹지 않을 거다."

카이사르가 감정 없이 말했다. 카이사르는 내가 출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정도도 혼자 하지 못한다면 당 당하게 전쟁에 나가겠다고 한 것 이 무색하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반대를 하지 않은 것만으 로도 다행이었다. 군 최고 통솔권 을 가진 그가 반대를 했다면 소원 이고 뭐고 곧바로 무산됐을 테니 까.

회의장은 넓을 뿐 아니라 황궁 답게 고급스럽고 사치스러웠다. 어디에 앉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 는, 익숙하게 맨 상석에 앉는 카 이사르를 따라 그 옆에 앉았다.

"그래.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볼 까."

왕좌에 나른하게 걸터앉은 헬리 오스가 내게로 시선을 굴렸다. 날 카로운 눈꼬리가 샐쭉 휘어 들어 갔다.

"이 젊은이의 용감한 제안에 대 해서 말이야. 크리시스 공녀...... 아니. 미르라고 해야 할까."

검술 대회 이후 내가 미르라는 사실은 온 대륙에 퍼졌지만, 당사 자인 내 앞에서 거론된 적은 없었 기에 단번에 분위기가 애매해졌 다. 헬리오스는 아무렇지 않게 분

위기를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었 다.

"그대는 무슨 배짱으로 그런 요 청을 한 건지 어디 한번 들어 보 자고."

다리까지 꼰 채 가볍게 말했지 만 말의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 다. 내가 천천히 침을 삼킬 때, 내 맞은편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또한 확실하게 설득해야 할 겁니다, 크리시스 공녀님."

섬광과도 같은 황금빛 눈동자. 타협을 모를 것 같은 올곧은 눈 빛. 이젠 흰색에 더 가까운 은회 색 머리칼까지도 누군가를 연상시 켰으나, 역시 그와는 달랐다. 훨 씬 더 강직하고 단단했다.

황궁 제1기사단장이자 군 부사 령관 노아 아인하르트였다.

"이 늙은이가 아직도 미숙하여 북부에게 몇 번 등을 내주었지만 그럼에도 평생 동안 제국을 지켜 오모"

X- O •

장내 마나의 흐름이 뒤틀렸다. 팔걸이에 얹고 있던 카이사르의 손이 움찔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쯤 되어야 느 낄 수 있을 만큼 미세하게 마나를 조정해 한순간의 위협적인 공기를 만들어 냈다. 대단한 위압감이었

"용병 미르가 얼마나 대단한 인 물인지는 압니다. 용병계에 등장 한 지 대여섯 해 만에 용병왕이라

는 칭호를 얻었다지요. 미르 같은 소드 마스터가 도움을 준다면 전 쟁은 한층 수월해질 겁니다. 이 위험을 외면할 수 있을 텐데 마주 해 준 공녀님에게 감사하기도 합 니다. 다만......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지구를 어깨로 받치는 형벌을 받은 어느 거인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 다. 세월로 인한 쇠약함이 느껴지 긴 무슨, 세월이 지난 만큼 무르 익은 섬세한 마나 운용이 느껴져 감탄하고 있을 때. 노아가 주름진 입매를 끌어 올렸다.

"공녀님께서는 저보다 좋은 훈 련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 시는 겁니까?"

황금빛 두 눈이 맹수처럼 번뜩 였다.

노아 아인하르트는 부사령관으 로써 몇십 년 동안 군사들을 훈련 시켜 왔다. 그 일에 대해 분명한 자부심이 있을 터.

내 요청이 그의 실력을 정면으 로 반박하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에, 그의 자존심이 자극당한 것도 당연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절대로 요."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노아의 능력을 부정할 생각이 추 호도 없었다.

"저는 제국의 승리를 바랍니다. 이를 위한 최선을 찾을 뿐이고요. 훈련관으로서는 아인하르트 경이 훨씬 유능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북부가 너무 예측 불가능한 방 식으로 침투했을 뿐, 노아는 충분 히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가 부사 령관으로 있는 동안 전쟁 한번 없 이 평화로웠던 제국이 그에 대한 입증이었다.

"강력한 소드 마스터를 꼽자면 저보단 크리시스 공작님이나 아인 하르트 후작님을 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보다 훨씬 노련하신 분들이니. 다만 그럼에도 제가 감 히 훈련관을 자처하는 이유는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했다. 키프 로스 백작은 증오를, 디에고는 걱 정을, 엘은 착잡함을, 라이너는 기대를. 날 향해 쏟아지는 시선들 엔 각양각색의 감정들이 담겨 있 었다.

"북부의 주 무기가 마수이기 때 문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흔들림 없 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북부가 마수 테이밍에 성공했 다는 사실은 다들 아실 겁니다.

원래라면 제국의 군사력과 상대도 되지 않는 북부가 이번 전쟁에선 위협적인 이유는 딱 하나, 이 마 수 테이밍 때문입니다. 다들 동의 하시 겠죠."

이 부분은 반박의 여지가 없었 다. 나를 어떻게든 쥐어뜯으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던 키프 로스 백작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제가 집중한 건 이 부분입니다. 저는 마수 토벌엔 가장 자신 있습 니다. 수많은 종류의 마수가 어떻

게 움직이는지. 어떤 습성을 가지 고 있고 어디가 약점인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누구 보다 잘 안다고 확신합니다."

이건 용병들 사이에서도 특히 내가 독보적인 부분이었다. 마수 에 대한 지식과 실전 감각. 거의 평생을 설원에서 굴렀기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용병왕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이번 전쟁 대비 훈련에 중점으

로 둬야 할 건 전투력을 기르는 것보단 마수를 대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러므로 저를 훈련관으로 삼아 주 십사 하는 겁니다."

나는 헬리오스를 똑바로 바라보 았다. 조금이라도 위축되어 보이 지 않도록.

"그 다음으로는, 제 이름을 거는 것이 꽤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녀님의 이름을 말입니

까."

"정확히는 미르의 이름을 말입 니다."

라이너의 되물음에 담담히 정정 하며 말을 이었다.

"전쟁은 무력 싸움이지만, 그곳 엔 심리전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미르는 마수 토 벌에 오랫동안 종사해 왔던 용병 이니, 그가 훈련관을 맡았다는 사 실이 북부의 귀에 닿는다면 북부 인들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흔들 수 있을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이 겨루는 모든 일 에는 심리전이 바탕에 깔린다. 그 리고 대부분 심리전의 승패가 그 일의 승패를 좌우하곤 했다. 내가 노린 것이 그것이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유가 부족하다 고 느끼실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 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평화와 안 녕을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사실 나는 어딘가의 지도자가 되는 것도, 책임감이 필요한 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건 내 적 성에 맞지 않았다. 떠돌이 용병으 로 혼자 일해 온 시간이 길기도 했고, 원체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까지 나서 는 것은, 이렇게 전쟁이 벌어졌다 간 이 자리에 있는 인물 중 3분 의 1 정도가 죽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헬리오스는 이미 죽었어야 했고, 노아는 전쟁 중 죽으며, 카이사르 또한 죽는다.

'특히 카이사르가 죽으면• ... 나 는 내 스스로를 절대 용서하지 못 하겠지.'

내가 전쟁에 출전하려 하는 가 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원작에선 카이사르가 전쟁 중에 죽는다. 그것만은 반드시 막아 내 야 했다.

"그러니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유용할 자신이 있습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진 않을 겁니다."

나는 선포하듯 말했다. 이것이 내 결심이었다.

나는, 전쟁에 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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