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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3화 (193/254)

193 화

한동안 회의장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제발, 누가 농담이라도 던져 주 면 안 될까요.'

아무리 대담하게 굴려 해도 조 금 소심한 성격은 여전했다. 누군 가 '실망시키지 않으면 바늘망은

시키는 건가' 같은 하찮은 농담이 라도 던져 주길 바랐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말을 얹을 생각이 없으니 아인하르트 후작과 폐하께서 결정하십시오."

기다란 침묵을 끊은 건 내 옆에 앉은 카이사르였다. 그의 목소리 는 여느 때처럼 담담하고 냉랭했

이미 합의된 부분임에도 너무 칼같이 잘라 버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섭섭함을 느낄 때, 붉은

눈동자가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다만 혈연과 사적인 감정 을 배제하고서도 터무니없는 의견 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기껍게 들 렸는지 모른다.

위축되었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카이사르는 정말 모든 사견을 제 한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기에, 내 말의 신빙성을 인정받은 느낌이었

"흐음."

헬리오스가 비음을 흘렸다. 그는 워낙 능구렁이 같아서 기색을 읽 을 수가 없었다. 푸른 눈이 날 얼 마 동안 응시했을까,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후작의 생각은 어떤가? 최고 책임자가 발언권을 포기했으니 그 대에게 가장 큰 권한이 있지 않 나."

헬리오스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 지 않고 노아의 의견을 물었다.

확실히, 헬리오스가 허락한다 해 도 노아가 반대한다면 말짱 도루 묵이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애 써 숨기며 노아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두 눈은 폭풍의 눈에서 도 고요했다. 노아가 바위처럼 단 단히 굳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 다.

"죄송하지만 기사단 생활 경력 조차 없는 이에게 병사들의 교육 을 전임할 순 없습니다. 그건 병 사들의 반발이 클 겁니다."

단호한 거부였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나는 묵묵하게 고개 를 끄덕였다.

아무리 고위층의 합의가 있다고 해도 병사들의 충성은 다른 얘기 였다. 병사들이 어리고 낯선 훈련 관의 가르침을 받으려 할 리가 없 었다.

내가 빠르게 머리를 굴려 플랜 日를 구상하고 있을 때, 노아가 말 을 이었다.

"하지만 마수를 대처하는 방법

은 분명 익혀야 합니다. 이에 대 한 대비가 없다면 제국은 아무리 큰 병력을 가지고 있어도 오합지 졸로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그가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처음부터 훈련관이란 직위를 주는 것은 반발이 클 테니, 우선 제 부관으로 활동하시는 게 어떻 습니까? 제 대리인이란 명목으로 훈련을 주관하면서 병사들의 신임 을 받고, 능력을 증명한 뒤에 훈 련관이 되는 게 좋을 것 같습니 다."

노아 또한 나를 믿고 있다는 게 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그는 내 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좋습니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녀가 후작의 부관으로 들어간 다는 건 사상 초유의 상황인 데다 신분 차가 있는 만큼 불명예스럽 게까지도 느껴질 수 있었으나, 내 게 중요한 건 명예가 아니었다. 명예 따위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뭐, 그렇게 된다면 내게 소원을 빈 게 아니군. 스스로의 힘으로 따내는 것이니 말이야."

조용히 듣고 있던 헬리오스가 가벼운 투로 말했다. 그가 두 눈 을 샐쭉 접었다.

"겨우 그것으로 퉁치기엔 황제 의 면목이 서지 않아서 말이야. 내 생명을 구한 공덕을 그리 쉽게 넘겨 버릴 순 없지. 또 다른 소원 을 빌어 보게."

그의 물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멍청해 보일 게 분명한 표정을 지 었다. 내겐 반드시 훈련에 관여하 고야 말겠다는 집념밖에 없었기 에, 다른 소원 같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어...... 없습니다."

헬리오스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정말 하나도 없나? 돈과 명예, 내 아들까지도 줄 수 있는데."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

다."

마지막에 이상한 게 껴 있는 것 같았으나, 가볍게 넘기고 대답했 다.

헬리오스가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황제로서 보상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신경에 거슬릴 법도 했다.

'하지만 진짜 빌 게 없는데

돈이야 공작가도 많았고, 명예는

그다지 필요치 않았다.

대충 황궁 지붕에 붙어 있는 청 동 조각상이나 벽에 붙은 금박 벽 지라도 떼어서 달라고 해야 하나 고뇌하고 있을 때, 헬리오스가 눈 을 번뜩였다.

"그럼 보류해 두게. 이대로 넘어 가기엔 자존심 상하니까."

헬리오스도 신세 지곤 못 사는 성격 같았다. 나는 거절할까 하다 고개를 끄덕여 순응했다. 이것까 지 거절했다간 헬리오스의 자존심

을 제대로 자극할 것 같았다.

"그럼 이 부분은 얘기가 끝난 것 같군. 다들 특별히 할 얘기 없 나? 이왕 모인 김에 수다라도 떨 어 보자고."

왕좌에 늘어진 헬리오스가 위엄 이 싹 빠진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술집에서 재밌는 얘기 를 찾는 아저씨와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곧 공식적으로 발표할 사안이 긴 하지만, 이렇게 모인 김에 말

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오, 한번 말해 보게. 혹시 재혼 소식인가?"

의외로 말문을 뗀 것은 체슬러 데카르트 후작이었다. 맹렬한 화 염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는 상반 되게 숨 막히도록 과묵한 그가 처 음으로 입을 뗀 순간이었다.

체슬러는 헬리오스의 주책바가 지 같은 말을 가볍게 씹고서-나 는 순간 헬리오스를 보는 그의 두 눈이 짜게 식는 것을 보았다- 말 을 이었다.

"둘째인 르웰린 데카르도가 데 카르도의 후계자로 결정되었습니 다. 곧 차기 가주 임명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다음 대귀족 회의엔 그 아이와 함께 나올 겁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회의장 내 로 잠시 소란이 퍼졌다.

'르웰린, 드디어 해냈구나.'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꼭 내 일인 것처럼 행복 했다. 이걸 르웰린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었다는 게 아쉽 긴 했지만, 요새 들어 르웰린이 얼마나 바빴는지 알았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이 축배라도 들자고 해야지.'

괜히 내가 들떠서 축배로 어떤 술을 마실까 고민하고 있을 때, 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 녀가 보여 줄 데카르도의 미래를 기대하도록 하죠."

데카르도는 신전파 귀족이었기 에 교황이 지지를 보이는 것도 당 연했다. 체슬러가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데카르도에서도 차기 가주가 정해졌는데 크리시스는 어떤가?"

체슬러에게 적당한 축하 인사를 건넨 헬리오스가 카이사르를 돌아 보았다. 그 물음과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심 지어 카이사르조차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전 대귀족 회의에서 후계자로 몰렸던 기억이 떠오른 나는 표정 을 굳혔다.

"우선 저는 아닙니다."

카이사르에게 물었다는 것을 알 면서도 끼어들었다. 내 단호한 거 절에 어쩐지 아쉬운 표정을 지은 카이사르가 전언을 보내 왔다.

'슬슬 정할 때도 됐으니 집에 가 서 셋이 제비뽑기라도 해라.'

'크리시스 공작가, 이대로 괜찮 을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말에 잠시 허공을 본 나는, 체념 한 채로 미소를 지었다. 그냥 내 가 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

"어련히 알아서 정할 것이니 재 촉하지 마십시오."

"오, 공작의 그 여전한 싸가지는 치료를 좀 재촉하고 싶은데."

카이사르의 무엄한 말에 헬리오

스가 감탄했다. 이쯤 되면 그냥 둘이 친한 게 아닐까 싶었다.

"더 할 말 없으시면 괜히 시간 끌지 말고 파하시죠."

"경을 파해 버리고 싶지만, 알겠 네. 볼일은 다 봤으니까."

카이사르를 보며 혀를 찬 헬리 오스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두 팔 을 벌렸다.

"이로서 대귀족 회의를 파하도 록 하지. 다들 해산하게."

1 시간도 채 채우지 못한 채 끝 난 대귀족 회의는 이번이 처음일 것 같았다. 나는 나 때문에 공연 히 다른 이들의 시간을 잡아먹은 것 같아 눈치를 살폈지만, 신경 쓸 필요도 없는 키프로스 백작가 사람들을 제외하곤 부정적인 기색 이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제일 먼저 자리를 나서는 카이사르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공녀님.

출구로 직행하는 카이사르로 인 해 아는 이들과 인사할 시간도 없 이 가던 나는, 나를 부르는 목소 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잡은 이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데카르도 후작님?"

체슬러 데카르도였다.

그가 날 잡은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무 심한 눈빛으로 카이사르를 힐끗 본 체슬러가 입을 열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네?',

나는 더욱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체슬러와 나는 르웰린을 제외하면 아예 접점이 없는 사이 였다. 체슬러는 무뚝뚝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인 만큼 표정에 감정 이 비치지 않아서 무슨 의미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르웰린이 공녀님을 많이 의지 하더군요. 그 아이가 후계자가 되 고자 한 것은 공녀님을 만난 뒤부 터였습니다."

" 아."

"재능은 있지만 의지는 없어 곤 란했건만. 공녀님 덕이 크다고 봅 니다."

체슬러는 감정이 메말라 버린 듯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이런 상황이 어색해 보였지만, 분 명 진심인 것 같았다.

"친구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 입니다. 저도 르웰린 영애의 도움 을 많이 받았고요."

나는 민망함에 목덜미를 매만졌

다. 이런 찬사는 역시 익숙하지 않았다.

체슬러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 를 끌어 올렸다. 입꼬리를 씰룩한 것에 가까운 옅은 움직임은 금방 사라졌으나, 나는 분명 보았다.

"......데카르도 후작가는 공녀님 께 호의를 품고 있습니다. 가능한 선이라면 언제든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체슬러는 내게 딱딱하지만 분명 하게 진심을 전했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르웰린을 방치한 것 때문에 그 의 이미지는 내 속에서 바닥 언저 리를 찍고 있었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중간쯤은 올라온 것 같았 다. 나는 피식 웃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잊지 않 겠습니다."

체슬러와 나 사이에 시선이 오 갔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르웰

린을 부탁하고 있었다.

"이제 가지."

회의장 입구에서 다른 이들이 슬슬 나오고 있는 것을 본 카이사 르가 나를 이끌었다. 아무래도 다 른 이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엘, 디에고, 라이너와 인 사만 해도 시간을 꽤 잡아먹을 테 니......

친구들과 인사하고 싶긴 했지만,

카이사르를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와 함께 출구로 향했다.

아리아와 칼은 미리 집에 돌아 가 있었기에 카이사르와 나만 마 차를 타고 저택으로 이동했다. 마 차 안엔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흘 렀다. 카이사르는 생각이 많아 보 였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고, 나와 카이사르는 집으로 들어갔다. 오 늘 워낙 일이 많았으니 빨리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저택에 들

어서자마자 카이사르에게 짧게 인 사하고 내 방으로 향하려 할 때였 다.

"언니. 잠깐만."

홀 쪽 복도에서 나온 아리아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칼과 함께였 다. 꽤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나 도 덩달아 긴장했다.

"잠깐만 얘기하자."

푸른 두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무슨 말을 할진 모르지만, 심상 치 않은 주제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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