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화
나는 부쩍 자란 티가 나는 아리 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하늘빛 두 눈은 폭풍전야의 하늘처럼 고요해 기색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래. 그러자."
난 순순히 수긍했다.
아리아의 요청은 내게 절대적인
것이었다. 피곤하다고 해서 거절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절한 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옷 갈아입고 공작 집무실로 와."
그 말을 남긴 아리아는 뒤돌아 사라졌다. 표정을 보면 화난 건 아닌데도 어쩐지 불길함이 느껴졌
미련 없이 사라지는 아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남아 있 는 칼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칼이 눈을 깜빡였다.
그는 태연해 보였으나, 나는 눈 이 마주치던 순간 그가 아주 희미 하게 흠칫했음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내 물음에 칼과 카이사르가 빠 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셋만 아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 었다.
'내가 무언가 숨길 때 이런 기분 이었던 걸까.'
그 사실이 조금 서운해졌으나, 내가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큰 일을 쳤던 건 한두 번이 아니었기 에 불평할 자격은 없었다.
뜻밖의 역지사지로 인한 자아 성찰을 거치고 있을 때, 칼이 어 쩐지 안절부절못하며-겉으로는 태 평하기 짝이 없었으나, 나는 그의 동공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아 리아에게 직접 들어라. 다만......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것이 좋겠 군."
만사에 보통 사람들보다 배는 무감한 칼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 고 할 정도면 듣고 기절할 정도라 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불안감이 급속도로 증폭되었다.
"......알겠습니다. 옷만 갈아입고 내려오죠."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방 으로 향했다. 끈적거리는 생각들 이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았다.
직감이 위기를 감지하며, 내 신 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가벼운 와이셔츠에 바지 차림으 로 갈아입은 나는 복도를 가로질 러 집무실 앞에서 멈춰 섰다.
"들어와라."
내가 채 노크를 하기도 전에 안 에서 카이사르의 허락이 들려왔 다. 나는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
로 들어갔다.
"저기 앉아."
집무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 은 아리아가 자신의 맞은편을 가 리켰다.
하필 커튼을 쳐서 집무실이 어 둑한 데다 분위기가 엄숙해 어두 운 세계의 보스 같았다. 지금 당 장 시가를 물고 조직 하나를 묻으 라고 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 았다.
나는 기선을 제압당한 채로 조 용히 아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리아가 짦게 심호흡했다.
"전쟁을 출전하는 것으로 인해 일어날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했 지."
아리아의 시선이 바늘처럼 나를 찔러 왔다. 나는 번뜩이는 두 눈 에 조금 움찔했지만 고개를 끄덕 였다. 내가 한 말을 무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언니의 출전을 막지 않으
려 해. 언니가 선택한 길이니까."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 는 이질적일 정도였다. 나는 순간 내가 아리아에 대해서 제대로 알 고 있었던 건지 고뇌에 빠졌다.
"그러니 언니도 막지 마."
아리아가 나와 눈을 똑바로 맞 추었다. 나는 아리아가 폭탄을 터 트리려 함을 본능적으로 예감했
"나도 전쟁에 출전할 거야."
쿵.
그 한마디가 바위보다 더 무겁 게 내 심장 위로 내려앉았다.
순간 모든 신체 기능이 멈춘 것 같았다. 뇌의 사고가 정지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눈 깜빡 이는 방법도, 숨 쉬는 방법도 잊 었다. 나를 쇼크로 죽은 최초의 소드 마스터로 만들고자 시도한 것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으리 라.
죽은 듯 멈춰 있던 나는 시계의 초침이 한 바퀴를 돌 때쯤이 되어 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농담이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재밌는 농담 을 들은 사람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으나, 떨리는 것은 저지할 수 없었다. 아마 엉망이 되었을 내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리아 가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거 알잖아.
그래. 저 무게와 온도, 농도, 모 두 진심이었다. 그렇기에 농담이 라고 믿고 싶었다.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무 릎을 으스러져라 쥔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핏방울이 배어나 바짝 마른 입술을 적셨다.
"안 돼."
"아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 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
쾅!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과 함께 내 몸 속의 마나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격해지는 감정으로 인해 마나 조절을 실패하는 건 정 말 초보적인 실수건만, 나는 그 초보적인 실수를 할 만큼 감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언니가 나가는데 내가 왜 못 나가?"
아리아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 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3 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위협적으로 폭주하는 마나를 앞에 두고서도 조금의 두려움도 내비치 지 않았다.
나는 불규칙해지기 시작한 호흡 을 주체하지 못한 채 이를 악물었 다.
"네가 안전할 세상을 만들기 위 해서 가는 거야. 그런데 네가 위 험에 노출되면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나를 위한 희생 따위 원하지 않았어!"
쾅
아리아가 제 앞의 탁자를 거칠 게 걷어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몸이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 할 만큼 거센 호흡으로 거칠게 들 썩였다. 푸른 두 눈에 맹렬한 불 꽃이 일었다.
"이전부터 나를 위한다고 하면 서 내 의견을 물어본 적은 있어? 사실 다 언니의 만족 아니야?"
아리아의 말은 내 심장에 비수 처럼 꽂혔다. 완전히 굳은 나는
상처받은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아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평생은 아리아를 위한 헌신 이었다. 그 믿음 하나로 죽음보다 괴로운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 냈 건만. 꼭 내 삶을 부정당한 느낌 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 사이, 그동안 잊 고 살았던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 었다.
아리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해 왔던 모든 것들은 정말 아리아를
위한 것이었을까.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알면서!"
하지만 나는 그 의문을 뒤로한 채 고함을 쳤다.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내 평생을 바친 사랑 이 부정당했다는 생각에 제정신일 수 없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파도처럼 눈으 로 밀려왔다.
"너는 나랑 다르잖아! 너는 약하 니까......!"
"아니!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 다고!"
아리아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 으며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내 말허리를 잘랐다.
그 발악 같은 반응에 놀란 내가 멈칫했을 때, 아리아가 두 눈을 부릅떴다.
푸른 눈은 분한 듯 불타오르며 물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도 언니를 지킬 수 있다는 말, 사실 믿지 않지? 언니는 내가 아직도 보호받아야 하는 나약한 유리 인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잖 아!"
쿵.
거대한 망치가 내 머리를 내리 치는 듯했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생각을 강제로 자각한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랬다. 아리아가 더는 약한 어
린애가 아님을 머리론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었 다. 아직도 내 보호 아래에 있어 야 한다고 생각했다. 툭 건드리면 녹아내릴 설탕 장식쯤으로 인식하 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리아를 나와 동등한 인 간이 아니라, 지켜 줘야 하는 피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언니와 같은 인간이야. 나 를 똑바로 봐, 카슈미르 크리시 스!"
아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나 도 몰랐던 내 인식을 정통으로 꿰 뚫었다. 나는 칼에 찔린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멍하니 아 리아를 응시했다.
이제 더는 어린애라고 할 수 없 는 분명한 얼굴선. 병색 한 점 없 이 건강한 안색과 혈기가 도는 피 부. 미소를 머금고 사랑스럽게 올 라가는 대신, 직선으로 뻗어 강직 한 기운이 도는 입매.
조금도 유약하지 않은 강렬한 푸른 눈.
아리아는 더 이상 병자도, 어린 애도 아니었다.
"나는 안전한 새장 속에서 얌전 히 지켜져야 하는 아기 새가 아니 야! 화원에서 꼼짝 못 하는 예쁜 장미가 아니라고! 나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어!"
아리아가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 목소리에서는 오랫동안 묵혀 온 설움이 느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약했던 아
리아는 15년이란 세월을 병상에 서 보내야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 약한 몸을 얼마나 원망 했을지, 두 다리가 있음에도 뛰놀 수 없음에 얼마나 절망했을지, 나 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이제야 자유를 얻 었는데, 언니라는 사람이 아직도 자신을 싸고돌려 하니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지금 언니가 전쟁에 나간 다고 하니까 철없이 맞불 놓듯 충 동적으로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
아니야! 나도 흐름을 읽을 수 있 에 전쟁을 예견한 건 언니뿐만이 아니야! 예전부터 생각했어. 이제 나도 내 몸 하나 지킬 힘이 있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치유 력이 있으니 전쟁에 나가서 도움 이 되고 싶다고!"
왜 나는 세상을 지킬 수 있는데 도 아리아는 지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왜 내 동생은 내가 만들 세상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서러움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푸른 눈을 보고 있으니 죄악감이 숨통을 조였다.
"언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마법과 치유력을 갈고 닦았는지! 내 능력엔 별 관심 없었잖아! 대 단하다고 말할 뿐이지 내 힘에 집 중하지 않았잖아! 내가 한 사람의 마법사로, 치유사로 설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리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변해 내 심장을 난도질
했다. 그 모든 것이 반박할 수 없 는 사실이라서, 나는 입술을 달싹 일 수도 없었다. 입을 열면 심장 에 가득 고인 피를 토해 낼 것 같 았다.
나는 여태껏 아리아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사랑한다고만 하고 일신의 건강에만 신경 썼지 온전한 성인으로 설 수 있도록 정 신적 지지를 보낸 적이 있나.
"알아! 언니는 평생 약한 나를 봐 왔으니 멀쩡해진 내게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 그
래서 기다렸어! 하지만 아직도 나 를 동등한 사람으로 봐 줄 생각이 없잖아!"
자신의 눈에 맺힌 눈물을 손등 으로 벅벅 닦아 낸 아리아가 토해 내듯 말했다. 아리아의 푸른 눈은 먹구름 낀 것처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켰던 게 언니의 사랑 방식이었던 거 알아. 그래서 여태까지 폭력적으로 쏟아 지던 보호와 희생을 받아들였던 거야!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반문
하지 않았어! 차라리 죽고 싶었던 비참한 나날들을 버텨 냈어! 멍청 한 순응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였고......!"
숨을 크게 들이쉰 아리아가 오 랫동안 막아 두었던 댐을 터트리 듯 말을 토해냈다.
"그게 내가 언니를 사랑하는 방 식이었으니까!"
사지에 뛰어드는 것이 내 사랑 방식이었다면, 아리아의 사랑 방 식은 그 모습을 반문 없이 지켜보
는 것이었나 보다. 몸은 내가 더 힘들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론 아리아가 더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되돌아본다.
아리아는 매일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 을까. 혼자 집에 남아 있는 긴 시 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그 비참함 을, 대체 어떻게 견뎠을까.
나는 얼마나 잘못된 사랑을 하 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언니를 사랑했어, 언니의 잘못된 사랑을 그대로 받 아 내는 게 내 사랑이었어. 언니 를 기다리며 느꼈던 불안, 비참 함, 절망, 그 모든 것을 혼자 삼 켜 내고, 돌아온 언니에게 웃는 것이 내가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 이었어......
진이 빠진 듯 몸에 힘을 푼 아 리아가 흐느꼈다. 죽기 전 유언을 남기듯, 일생일대의 죄악을 고해 성사하듯 처참한 목소리는 나를 무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렸
헐떡이며 우느라 말을 잇지 못 하던 아리아가 한참 뒤에야 나를 바라보았다. 붉게 무른 눈가도, 슬픔에 침몰한 두 눈도 보기 고통 스러웠으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 다. 나는 아리아의 눈을 피할 자 격이 없었다.
"이제는 다르잖아. 언니는 더 이 상 사지에 뛰어들어 돈을 벌 필요 가 없고,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 잖아...... 그러니까, 이제 정상적
으로 사랑해 보면 안 될까?"
아리아가 애원했다. 나는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울며 두 눈을 따갑도록 벅벅 닦았다.
"나를 한 명의 동등한 사람으로 서 존중한다면 내 선택을 지지해 줘."
파르르 떨리는 새하얀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 한 점 박이지 않은 곱고 부드러운 손. 이는 귀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할 기회 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은 내 손보다 단단하게 느껴졌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 어 줘."
혼들림 없는 푸른 눈을 보고 있 으면 심장이 터질 듯 뜨거워졌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랑이구나,
어렴풋이 느꼈다. 사랑이라고 하
기도 부끄러운, 집착과 이기로 뭉 친 끈적한 무언가를 삶의 목적으 로 삼았던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순간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몰라서...... 사랑을 배운 적이 없 어서......
나는 고개를 떨군 채 덜덜 떨리 는 손으로 낭떠러지의 동아줄 붙 잡듯 아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3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받아 본 적도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했
다. 처음으로 얻은 삶의 이유가 너무 소중해서, 손에 꽉 쥘 줄만 알았지 풀어주는 방법을 몰랐다.
첫사랑은 늘 실패하는 법이다.
열기를 적당히 즐기며 너와 내 가 남도록 해야 하건만, 처음 맞 이하는 열기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스스로를 다 불태워 너만 남게 하 니.
"나도 네가 첫사랑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나는 그 작은 손 위로 창백하게 질렸을 입술을 맞추었다.
이것은 실패한 첫사랑을 향한 내 고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