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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5화 (195/254)

195화. 외전 1

아리아의 인생은 좁고 어두운 단칸방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그녀가 머리가 좋다 해 도 갓 태어난 순간 같은 걸 기억 할 리는 없다. 그러니 그녀가 기 억하고 있다 여기는 그것은 착각 일 게 분명함에도, 아리아는 이것 이 진짜라고 여태까지도 굳게 믿 고 있었다.

"이게 제 동생이에요? 정말요? ......엄청 쭈글쭈글한데."

조금은 퉁명스럽던 앳된 목소리 나, 자신의 얼굴 위로 쏟아지던 반짝거리는 눈빛이 진짜였길 바라 기 때문이었다.

아리아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3살 무렵부터였다. 그때부터 고등적 사고를 하기 시작한 어린 천재는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파 악했다.

가난한 집안. 아버지는 없고, 그

나마 있는 어머니는 무척 바빠 보 였다.

건강하기라도 했다면 직접 생계 를 꾸려 나갔겠으나 그녀는 몸이 약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껄끄 러움이 느껴졌고, 늘 몸이 무거웠 다. 마치 자신은 물고기인데 뭍에 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4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 시고, 겨우겨우 버티며 5살이 된 어느 날. 아리아는 뼈저리게 느꼈 다.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콜록, 콜록! 켁, 커흑!"

"......젠장, 괜찮아? 이리 와서 약 먹어."

그 사실을 자각하는 건 굉장히 비참했다. 아리아는 무능한 자신 을 향한 자멸감에 몸부림치며 일 찍이 절망과 체념을 배웠다.

아리아는 죽어가는 몸뚱이를 가 지고서도 살고 싶었다. 그녀의 하 루하루는 미치도록 무료했고, 숨 만 쉬고 있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싶었다.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생 존욕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본 능인 것을.

"너는 따라 나오지 마. 방해돼."

아리아는 살기 위해선 자신보다 3살 많은, 저 언니라는 사람에게 달라붙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먹어. 빨리. 너 먹는 것만 보고 다시 나가야 해."

어린 아리아의 하루 식사를 책 임지는 것은 언니인 카슈미르였 다. 애답지 않게 염세적인 눈빛을 가진 카슈미르는 굉장히 무뚝뚝하 고 시니컬했으나, 아리아의 식사 는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멍청한 내 언니.'

혈연이 대체 뭐라고.

작고 영악한 그녀는 자신의 인 생이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언제 고 가족을 놓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카슈미르는 아리아를 짐을

보는 듯한 눈으로 보면서도 절대 놓진 않았다. 어린애치곤 일도 꽤 잘해서 돈도 곧잘 벌어 왔다.

저 사람에게 놓을 수 없는 존재 가 되면 나는 살 수 있지 않을 까?

어린 아리아는 계산했다.

"언니, 어디 가? 나도 같이 가 자!"

그리고 실행했다.

"꽃 따 왔어! 예쁘지? 물컵에 꽂아 두면 오래도록 볼 수 있을 거야."

"언니가 제일 좋아. 언니도 그렇 지?"

"나는 약해서 언니 없이는 못 살아. 알지?"

아리아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서부터 악하다고 정의했다. 자신 부터가 그랬으니까. 살기 위해 거 짓 웃음을 보이고, 적당히 꾸민 말들을 뱉어 냈다.

아리아가 카슈미르를 사랑했는

가?

그녀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 었다. 사랑은커녕, 다음 날 아침 에 눈만 떠도 다행이라고 안도해 야 할 처지였다.

'커서 몸이 건강해지면 이 지긋 지긋한 집에서 나갈 거야.'

아리아에게 카슈미르는 도구였 다. 아픈 자신의 생을 이어가게 해 줄 신성력 정도.

부상을 입은 많은 인간들이 신

성력으로 인해 살아남지만, 그 누 구도 신성력을 사랑하진 않았다. 그건 미친 짓이었다.

아리아는 사랑만큼 인간을 미련 하게 하는 것이 없다는 걸 제 언 니를 보며 깨달았다. 감정이란 이 용하기 좋은 약점일 뿐이었다.

"바보. 오래간다고 해도 어차피 시들 텐데. 이리 가져와. 탁자에 두게."

"별로. 그냥 버릴 순 없으니까 키우는 거지. ......너 울어? 왜, 왜 울어. 농담이야. 나도 좋아해.

울지 마. 응?"

"알아. 아니까 아직도 데리고 있 는 거잖아. 나 말고 누가 너를 키 워줘."

그러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작고 투박한 손이나, 무심한 듯 따뜻하던 진분홍색 눈동자나, 늦 은 밤 돌아와 자신이 잠든 줄 알 고 이마에 맞추던 부드러운 입술 같은 것은 아리아에게 아무런 감 흥도 주지 못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아리아의 몸은 날이 갈수록 나 아지기는커녕 쇠약해졌다. 텅 빈 집에서 책을 읽거나, 집안일을 하 거나, 장터에 나가 가볍게 장을 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 였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하게 태어났 지?'

혼자 있는 시간이 기니 생각할 시간도 많았다. 아리아는 아주 어 려서부터 인생에 회의감을 느꼈 다.

탄생할 때부터 시작된 비극엔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가. 이 렇게 낳아 준 부모를 탓해야 하는 가? 아니면 신을?

그들을 원망하던 때도 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조차도 질려 버렸다. 아리아는 자신이 어째서 살고 싶어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아리아! 나 왔어."

그나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건 카슈미르와 함께 있을 때였다. 아 리아의 아양에 가까운 태도에 넘

어간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 음을 연 카슈미르는 멍청하도록 해맑고 순진했다.

"언니! 잘 다녀왔어? 수고했어."

아리아는 그 미련함에 속으론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웃었다. 살 아야 하는데 어떡하겠는가. 별거 없는 하루 일과를 늘어놓으며 쾌 활한 여동생의 모습을 꾸며 냈다. 그것이 그녀의 생존 방식이었다.

아리아의 일과는 아침 일찍이 일을 나가는 카슈미르를 배웅하는

걸로 시작해 밤늦게 돌아오는 카 슈미르를 마중 나가는 걸로 끝났 다. 그녀의 세상은 비좁았다. 그 녀 자신과 카슈미르 단둘뿐이었 다.

그러니 아리아가 카슈미르에게 집중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슈미르는 모든 빛을 흡수할 듯 새까만 머리칼에, 보는 것만으 로도 속에서 무언가를 일으키는 강렬한 진분홍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 작고 말랐는데도 전 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 두 눈

이 독기를 품을 때면 그 누구보다 강해 보였다.

유약한 몸에, 온통 연한 색채를 가진 그녀와는 달랐다.

'언니 같은 사람이 되면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러니 아리아가 카슈미르를 이 상향으로 삼은 건 당연한 일이었 으리라.

사랑 같은 건 아니었다. 그저 별 을 보듯 아득하고 희미한 동경뿐

이었다. 이 더러운 집 안에서도 햇살처럼 웃는 얼굴이 신기했고, 죽은 듯 잠잠하면서도 기이하게 반짝이는 두 눈이 부러웠다.

딱 그 정도라고, 아리아는 생각 했다.

이변을 느낀 건 어느 날 밤이었 다.

끼이익.

여느 때와 같이 일을 마치고 돌 아올 카슈미르를 기다리던 밤. 문

이 열리는 소리에 피곤에 젖은 눈 을 깜빡였을 때.

"아. 아리아. 깨어 있었네. 먼저 자라니까......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집에 들 어오는 카슈미르를 보며 아리아는 처음으로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 다.

산발이 된 머리. 긴 옷 아래로 언뜻언뜻 보이는 상처• 어디 돌밭 에서 구르고 온 것처럼 만신창이 꼴을 하고선 멍청하게도 웃었다.

카슈미르가 부상을 입고 오는 일은 빈번했다. 잡일부터 막노동 까지 가리지 않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도 이날만큼 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리아는 숨통이 턱턱 막혀 오 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호흡하려 노력했다. 어린 천재는 제 이성으 로 통제되지 않는 격한 감정을 그

때 처음으로 겪었다.

카슈미르는 웃었다. 찢어진 입매 를 그리도 찬란하게 끌어 올렸다. 그러곤 손에 들고 있던 디저트 케 이스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네가 좋아하 는 타르트 사 왔는데, 지금 먹을 까?"

그 순간 내려앉는 심장에, 미어 지는 가슴에, 아리아는 자신의 인 생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 음을 느꼈다.

카슈미르는 더 이상 아리아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패가 아니었 다.

카슈미르가 만신창이가 되어 돌 아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녀에 게 들키지 않으려 한 건지 용케도 얼굴은 멀쩡할 때가 많았지만, 눈 치가 빠른 아리아가 카슈미르의 상태를 몰라볼 리 없었다.

'용병 일을 하는 거겠지.'

갑작스럽게 불어난 수익, 만신창

이가 된 몸, 가끔 주머니에서 힐 끗 보이는, 용병 패로 추정되는 나무 패.

카슈미르 딴엔 대단히 잘 숨기 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리아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용병 일이 얼마나 험한지는 집 에만 눌어붙어 있는 아리아도 잘 알았다. 사지로 내몰리는 의뢰들 이 태반인 그곳에서 10대 어린애 가 얼마나 버티겠는가.

아리아는 스스로도 놀라울 만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언니, 그 일 그만하면 안 될 까?"

어느 날은 아주 충동적으로 물 었다.

돈을 많이 벌어 오면 분명 좋은 것일 텐데. 아무리 많이 벌어도 덜컥 죽어 버리면 장기적으로 봤 을 때 손해라 그런가?

아주 어린 날부터 계산에 익숙

했던 그녀는 감정적인 스스로가 어색했다.

" 아리아."

아, 그래. 저 부드러운 눈길.

카슈미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이 그녀를 괴롭혔다. 저 눈을 보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꼭 행복하게 해 줄게. 조금만 기다려 줘."

눈꼬리가 크게 휘어지고, 투박한 손이 아리아의 머리를 짧게 쓸었 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어쩐지 울 것 같아진 아리아는 카슈미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계산적으로 굴든, 감성적 으로 굴든 그 작은 품은 늘 아리 아를 향해 열려 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카슈미르를 기다리는 순간순간 이 고역이었으나, 그럼에도 아리

아는 강하게 나가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하는 카슈미르가 행 복해 보여서. 대체 자신 같은 것 이 뭐가 좋다고, 그녀의 행복을 말하는 두 눈이 벅차 보여서.

그래서 아리아는 속에서 움트는 말을 짓밟았다.

카슈미르가 이틀 뒤 돌아온다고 하고는 사흘째 모습을 보이지 않 은 어느 날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로 예정된 날을 지키지 못하는 건 빈번했기에 조금 안일하게 생

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도서관에서 빌린 경제학 책이 재밌었고, 잠시 산책하는 동안 본 꽃이 아름다웠으며, 저녁으로 먹 은 스튜가 허접하긴 해도 그리 나 쁘지만은 않았다.

"아리아! 아리아! 집에 있느냐!"

사흘째 되는 날 저녁, 누군가 작 은 오두막이 흔들릴 만큼 강하게 문을 두드렸다. 카슈미르를 기다 리고 있었던 아리아는 의외의 존 재가 갑작스럽게 등장했음에 의아

해했다.

"필립 씨......?"

집 가까이에서 작은 의료실을 운영 중인 필립이었다. 갑작스러 운 등장에 어리둥절해하는 아리아 앞에서, 필립은 얼굴을 일그러뜨 렸다.

"카슈미르가 위독하다. 독에 당 해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응급처치를 하긴 했는데 오늘 밤이 고비일 것 같구나. 네 가 와서...... 봐야 할 것 같다."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 이 차는 몸이지만 숨이 막힐 정도 로 빠르게 달렸던 것 같았다.

" 언니......!"

벌컥.

그곳에는 카슈미르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생기 없이 창백한 피부. 꾹 감긴 두 눈에, 벌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새파란 입술. 독에 중독됐다 고 했던가. 불규칙적으로 이어지 는 호흡만이 카슈미르가 살아 있 음을 알려 주었다.

아리아는 그때 깨달았다.

그녀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카슈미르에게 매달려 왔지만, 어 느새 매달리는 이유가 달라져 있 었다.

카슈미르에게 버림받으면 죽을 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카슈미르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

웠다. 그녀의 좁은 세상에서 유일 하게 사랑을 퍼부어 주는 미련한 언니가 싫지 않았다.

카슈미르만이 아리아의 척박한 삶의 유일한 의미였다.

"나를 낫게 해 주지 않아도 되 니까...... 일어나면 안 돼?"

아리아는 시체처럼 차가운 몸 위에 엎드려 밤새도록 헐떡였다.

강렬한 첫사랑의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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