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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6화 (196/254)

196화. 외전 2

카슈미르는 쓰러진 날로부터 사 흘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떴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곁을 지 키던 아리아는 카슈미르가 부르튼 눈을 비비적거리다 자신을 발견하 고 흠칫 놀라는 모습까지 모두 두 눈에 담았다.

"아, 아리아, 그게......

"카슈미르."

카슈미르의 동공이 어쩔 줄 모 르고 방황했다. 변명을 하려는 듯 더듬더듬 이어 나가는 목소리를 아리아는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잘 라 냈다.

늘 언니라고 불렀기 때문일까'. 카슈미르는 아리아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온 것에 놀란 기색이 역 력했다.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인 아리아는 잔잔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카슈미르가 일어나지 못하는 사 흘 동안 아리아는 끊임없이 생각 했다. 자신을 위해 사지로 몸을 던지는 이 멍청한 여자에 대해서.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는 사실은 더 이상 아리아를 아프게 하지 않 았다. 하지만 독에 중독되어 밤새 도록 앓는 카슈미르의 모습은 아 리아를 고통스럽게 했다. 카슈미 르의 뒤척임에도 아리아의 작은 세상이 들썩거렸다.

어떻게 하면 네가 그 짓을 그만 둘까. 말한다고 들어 먹을 리는

없었다.

그럼 그 짓을 하는 원인인 내가 사라진다면, 그땐 그만두지 않을 까.

이기심을 천성으로 타고난 영악 한 아이는 여태껏 스스로가 계획 해 온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포기 하다니, 이 얼마나 멍청한가. 카 슈미르 같은 멍청이나 할 짓이었 다.

그러니 사랑하면 닮는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주위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형광 물질을 바른 듯 빛나는 진분홍색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아리아의 예상과 달리 카슈미르 는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 다. 정색하며 왜 그런 말을 하냐 고 되묻거나, 안쓰러워하며 슬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 아.'

아리아는 순간 섬찟 소름이 돋 았다.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탓에.

"어떨 것 같냐니. 그런 걸 알 리 가 없잖아. 나도 죽을 건데."

카슈미르는 당연한 것을 왜 묻 느냐는 투로 답하며 아무렇지 않 게 웃었다.

그건 어린아이의 것이라곤 믿기 지 않을 만큼 선연한 집착이 뒤섞 인 광기였다.

아리아는 그때 깨달았다. 카슈미 르에게 매달리는 것이 그녀의 생 에 의미였듯, 자신을 살리는 것이 카슈미르의 생에 의미라는 것을.

뒤틀린 카슈미르와 아리아의 매 듭은 이미 강하게 얽혀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풀 수 없었고, 자르면 둘 다 잘려 나갔다.

"그러니까 그런 얘기는 하지 마. 집에 가자."

부드럽게 웃은 카슈미르가 아리 아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좁은 품

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 으 "

흐 •

알면서도, 아리아는 눈을 감았 다.

그 잘못된 사랑을 받아 내는 것 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뒤로 아리아는 카슈미르 앞 에서 더욱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자신을 마음 놓고 지켜야

할 존재로 생각하도록. 아리아가 약하면 약할수록 카슈미르는 살아 남아서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부 담감을 느낄 테니까.

그래야 아리아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아리아, 음료는 뭘로 시킬까?"

"응? 나는 딸기 파르페! 그게 제일 좋아."

카슈미르는 알까? 아리아가 사 실 딸기 파르페를 좋아하지 않는 다는 걸.

딸기 파르페를 좋아하는 것 자 체가 문제되진 않았으나, 아리아 는 약하고 고귀한 아가씨들은 그 런 것을 좋아한다는 선입견을 이 용했다. 음료의 호불호 따위는 그 무엇도 좌우할 수 없음에도 사회 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했다.

매번 드레스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으나 아리아가 진실로 원하는 건 책이었음을 알까. 그녀의 기본 표정이 웃음이 아니라 무표정이라 는 건? 카슈미르에게 보여주던 다양한 표정들이 대부분 지어낸

것이었음을 알까?

알 리가 없다. 자신이 철저히 숨 겼으니까.

아리아는 이곳이 안온한 나락이 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탈을 쓴, 서로를 향한 뒤틀린 집착.

끈적끈적한 늪은 카슈미르와 아 리아 모두를 집어삼키겠지만, 함 께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이대로가 좋았다. 비좁고 더럽고 아늑한 세계에 단둘이 있

는 지금이 말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녀가 9살이 되었을 무렵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니, 일은 힘들지 않아?"

"요즘은 괜찮아. 일을 같이하 는...... 동료가 두 명 더 생겼거 든."

9살 겨울, 이 말을 시발점으로 카슈미르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 했다.

"아리아. 너는 커서 하고 싶은

거 없어?"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한 번쯤 생각해 봐. 내가 도와 줄게."

"몸도 약한 내가 뭘 흐fl. 나는 언 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 잖아."

"......그렇지 않아. 너도 할 수 있어. 이 세상에 가능성이 없는 아이는 없대."

어둡고 우울한 현실에 그녀와 함께 머물러 있던 카슈미르가 혼 자 이상을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헛바람이라도 불어 준 듯 희망으

로 둥둥 떴다.

"아리아. 내가 힘내 볼 테니 까...... 아카데미, 한번 가 볼래?"

"응? 갑자기? 아냐, 됐어."

"그러지 말고 조금 고민해 봐. 너는 똑똑하니까 잘하면 후원자를 구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이대로도 괜찮잖아."

"생각해보니까 괜찮지 않은 것 같아서. 누가 그러는데, 아이들은 외롭지 않게 자랄 권리가 있대. 아카데미가 부담스러우면 보모라 도 한 번 고용해볼까? 혼자 있는

시간이 긴 게 정서에 좋지 않을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현실을 자각하고 제 풀에 바람이 빠질 거라고 생각 했건만. 카슈미르는 점점 더 높은 곳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래 를 생각하고, 가능성을 믿어 주 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카슈미르는 단둘뿐이던 그들의 세계를 자꾸만 확장해 갔다.

아리아는 그것이 치가 떨리도록 싫었다.

동경하던 별을 품에 안고 잠기 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별은 이곳 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듯 점 점 더 높이 올라갔다. 그녀의 세 계엔 이제 자신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러다가 손에 잡히지 않을 만 큼 멀어져 버리면 어쩌지. 그냥 나와 함께 계속 추락하면 안 되는 걸까.

추악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언니. 그 새로운 동료라는 사람 들 누구야?"

불안함을 참다못한 아리아는 어 느 날 묻고 말았다. 카슈미르가 달라진 건 동료가 생겼다는 시점 부터였으니, 그들이 원인일 게 뻔 했다.

"아, 좋은 사람들이야. 한 놈은 쓰레기지만...... 구제 못할 쓰레기 는 아니고."

"이상한 사람들 아니야? 언니를 변질시키는 것 같아."

카슈미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순간을 포착한 아리아는 입술 을 깨물었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기에 카슈미 르가 자신 앞에서까지 표정을 굳 히게 만드는 것인가.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도움 을 많이 받고 있어."

"나 언니가 그 사람들이랑 어울 리는 거 싫어."

아리아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하등 애 같은 심술인 데다 이기적 이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나는 언니뿐인데, 언니도 나뿐 이어야 공평하잖아. 나를 두고 올 라가지 마. 나랑 이곳에 있어.'

아리아는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 서부터 악하다고 정의했다. 그리 고 그중에서도 자신은 가장 추악 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이라고 생 각했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 이 정도는 욕심 부려도 되는

거 아니야?'

부모님도, 좋은 환경도, 건강한 몸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단 두 가지, 징그럽 도록 빠르게 돌아가는 머리와 사 랑스러운 카슈미르뿐이 었다.

'유일한 동아줄을 붙잡는 것이 뭐가 나빠. 조금 이기적으로 굴어 도 되잖아.'

아리아는 그렇게 합리화했다. 그 녀는 머리가 좋았을 뿐, 정신은 여전히 철없는 어린애에 머물러

있었다.

'언니는 들어줄 거지?'

아리아가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카슈미르는 단 한 번도 아리아의 부탁을 거절한 적 없었다. 애초에 아리아가 버거운 부탁을 한 적이 없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 도 카슈미르는 아리아에게 헌신적 이었다.

아리아는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미안, 아리아."

그랬기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 서도 단호하게 거절을 표하는 카 슈미르의 모습에 모든 사고가 멈 췄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야. 불편 했던 부분을 말해 주면 고칠 테니 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아리아는 그때 발견했다. 회의에 찌들어 죽어 있던 진분홍색 눈이 점점 더 생기를 되찾고 있음을.

빛나는 별들은 다 한 번씩 길을 잃는다지. 카슈미르는 잠시 길을 잃었을 뿐, 여전히 별이라는 듯 찬란하게 빛났다.

"욱 "

"아리아! 젠장, 괜찮아? 또 어지 러 워?"

추악한 감정이 그녀를 잠식했다. 아리아는 자신을 향한 끔찍한 자 멸감을 참을 새도 없이 구역질했 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뒤틀 렸다. 쓰린 신물이 역류해 올라왔 다.

'미친 새끼. 더러운 새끼.'

아리아는 속으로 몇 번이고 스 스로를 매도했다. 자신을 땅 깊은 곳에 파묻고, 그 위에 하늘에 닿 을 듯 높은 무덤을 쌓았다. 그냥 죽어 버리길 바랐다.

그녀는 언니의 성장에 기뻐할 수가 없었다.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두렵고, 불안했고, 싫었다.

하지만 한 번 더 거절을 당하는 게 더 싫어서. 징징거리면 버림을

받을 것 같아서.

"......아니야.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

아리아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대화로 푸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늘 가슴 에 묻었다.

아리아는 그 뒤로 계속 불안에 빠져 있었다.

카슈미르가 어느 날 나를 두고

그 사람들이랑 살 거라고 하면 어 쩌지? 좋은 사람이란 말대로 나 보다 훨씬 멋진 사람들이라서, 나 보다 그 사람들을 더 사랑하게 되 면 어떡하지?

아리아의 좁은 세계가 뒤흔들렸 다. 그녀는 그 가운데 괴로워하면 서도 의문을 느꼈다.

한 사람으로 완성되는 세계가 정말로 옳을까? 아니, 옳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이곳에서 벗 어날 수 있나? 그런데 꼭 벗어나

야 하나?

나는, 나는 정말 언니 하나면 충 분한데. 언니도 그냥 이곳에 있으 면 안 되는 걸까?

쩌적,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아리아의 세계가 파 괴되는 소리였다. 아리아는 자신 이 세계의 파괴를 견뎌 내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무너지는 하늘 의 잔재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파괴를 잠시 멈춘 것 은 파괴를 일으킨 장본인인이었

다.

10살, 유독 눈이 많이 오던 어 느 겨울날이었다. 카슈미르의 생 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여느 때와 같이 카슈미르를 기다리며 은은한 불이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아 있을 때.

끼이익.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온몸이 흰 눈으로 뒤범벅된 카슈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언니••••••?"

카슈미르는 이례적으로 아리아 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언데드 처럼 힘없는 걸음으로 집 안에 들 어왔을 뿐이었다.

평소 창백한 얼굴이 그날따라 붉었다.

저건 추워서 붉어진 얼굴이 아 니라,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이었 다.

"......아리아."

그녀에게 다가온 카슈미르가 의 자에 앉아 있는 아리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두 손이 따뜻한 아리아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아리아는 냉 기에 흠칫하며 혼들리는 눈으로 카슈미르를 바라보았다.

요 근래 반짝이기 시작했던 진 분홍빛 두 눈이 또다시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나는 너밖에 없어."

생명력을 잃은 목소리가 중얼거 렸다. 힘없이 떨어지는 고개를 따 라 검은 머리칼에 쌓여 있던 눈송 이가 사르르 흘러내렸다. 눈송이 는 난로의 열기로 인해 땅에 닿지 도 못 하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제 정말 너밖에 없어."

카슈미르가 흐느꼈다. 그녀는 어 깨를 거세게 들썩이며 아리아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아리아는 카슈미르가 소중한 무 언가를 잃어버렸음을 알아챘다.

"너무 아파......

작은 몸이 끈 풀린 마리오네트 처럼 늘어졌다. 아리아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 모 습을 한참 응시하고 있었다.

세계는 파괴를 멈추었다.

카슈미르에게 자신만 남는 것. 아리아가 바라고 또 바라던 순간 이었다.

분명 그런데.

아리아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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