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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8화 (198/254)

198화. 외전 4

공작가 저택은 빌어먹도록 컸다. 아리아는 테일러의 안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다.

'몸이 완전히 나았어. 어떻게 한 거지? 크리시스가...... 날 살린 건 가? 하지만 왜? 설마 언니가 노 예 계약이라도 한 거라면......

끔찍한 상상이 뇌리를 스치고,

아리아는 죽고 싶어졌다.

역시 그녀는 어젯밤 죽었어야 했다.

"이곳이 공작님의 집무실......

벌컥.

아리아는 총괄 집사 테일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줄곧 침착하던 노련한 집사도 이번엔 당황으로 헛숨을 들이쉬었다.

"하룻강아지가 용감하군."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소드 마스터의 존재 감이 아리아의 몸을 산산조각 낼 듯 짓눌렀다.

"주제 모르는 용기는 만용이라 는 걸 모르는가."

아리아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헛숨을 삼켰다.

약간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부터, 조각 같은 얼굴선, 인간 같지 않

은 붉은 눈까지.

카이사르는 카슈미르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이게 소드 마스터의 기운인 걸 까.'

특별히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존재감만으로 압도되는 느낌 이었다. 아리아는 새삼스레 제 언 니가 그간 자신의 앞에서 얼마나 기운을 통제했던 건지 가늠했다.

"카슈미르를 어떻게 한 거지?"

본능적인 공포가 숨통을 죄는 가운데에서도 아리아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움츠러 든 모습을 보여서야 아무것도 안 될뿐더러, 카슈미르를 향한 걱정 이 초인적인 정신력을 자아냈다.

카슈미르라는 이름을 들은 카이 사르의 적안이 일렁였다. 아주 잠 시였지만 아리아는 그 모습을 놓 치지 않았다. 아리아는 기분이 더 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건 사랑이다. 분명했다. 자신

이 카슈미르를 볼 때의 눈과 유사 했으니.

"너는 요정 혼혈이다. 그간 요정 숲의 정기가 부족해 몸이 약했지. 이번에 충분히 먹었으니 한동안은 문제없을 거다."

"카슈미르와 노예 계약을 맺었 어?"

"네 언니가 너를 많이 걱정하더 군. 그간 줄곧 둘이서만 지내 온 건가."

"값은 내가 치러. 카슈미르를 붙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동문서답이 계속되다, 잠시 침묵 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했다.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나. 원한 다면 지금이라도 널 죽일 수 있는 데."

카이사르는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였다.

협박성 발언은 아니었다. 순전히 호기심이었다. '대체 어떻게 자신 앞에서 저렇게 굴 수 있을까?' 하 는-

분명 제 혈육이 아님에도, 카이 사르는 흥미를 느꼈다.

"......지랄. 당신은 날 못 해쳐."

아리아는 짓씹듯 내뱉었다. 공포 로 온몸이 떨리는 가운데서도.

아리아가 이렇게 거칠게 나가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런데 말이야. 여태껏 언니가 힘들 (댄 한 번도 도와준 적 없는 사람이 왜 이제야 나타나 우릴 도

와준 거지?"

혹여 카슈미르가 죽을 뻔한 자 신을 살리기 위해 손해 보는 일을 했을까 봐.

"왜. 이제야 관심이 생겼다고 할 거야? 슈슈 언니가 용병왕 미르 라서 그 힘을 이용하고 싶어? 설 마 고귀하신 공작님께서 뒷골목에 사는 자매의 등골을 빼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또다시 민폐를 끼쳤을까 봐.

"당신 때문에 언니가 상처받는 다면...... 난 악마에게 영혼을 팔 아서라도 당신을 죽여 버릴 거 야."

아리아는 부드럽게 말하는 법 따위 몰랐다. 있는 건 악과 독기 밖에 없었다. 그녀가 언니를 지키 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되도 않는 가시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늘 비참했고, 자 신의 나약함을 되새기게 했다.

"••••••아리아."

그럼에도, 아리아는 자신을 부르 는 카슈미르의 목소리를 사랑했 다.

"슈슈 언니."

언니가 나 때문에 더는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믿을 수 없는 순간들이 휙휙 지 나갔다. 성 없는 평민 아리아에서

공녀 아리아 포스텔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가 되고, 좁고 열악한 집 에서 성 같은 공작가 저택으로 이 사를 갔다.

그 모든 것이 싫었다면 거짓말 이다. 그녀도 사람이었으니, 동화 처럼 한순간에 나아진 상황이 기 뻤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건 카 슈미르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희 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 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데뷔탕트 날이 가까워졌다. 그간 아리아는 결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이용 해서 사교계를 휘어잡는다. 언니 를 사교계에서 욕먹게 하진 않 아.'

아리아는 몸으로 카슈미르를 지 켜 줄 수는 없었다. 오랜 고민 끝 에 그녀는 사교계의 소문에서부터 카슈미르를 지키기로 했다. 그것 이 카슈미르를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리 환경이 변해도, 아리아의 세계의 주인공은 카슈미르였다.

처음으로 나온 공식 석상이었으 나 긴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는 천성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감 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무리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사 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해 본 경험 이 적다 해도, 천재성은 무뎌지지 않았다.

아리아는 잘 꾸민 말들로 사람 들을 사로잡고 다녔다. 그건 우습

도록 쉬웠고, 지루했다. 빨리 데 뷔탕트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에 왈츠가 울려 퍼졌다. 춤을 출 시간이었 다.

'언니랑 추고 싶어.'

"언니! 나랑......!"

"안녕하십니까, 카슈미르 영애!"

아리아가 설레는 마음으로 카슈 미르를 돌아볼 때, 어디서 나왔는 지 모를 영식들이 그녀를 둘러쌌

다.

"저, 저와 함께 한 곡 춰 주시겠 습니까?"

"저와도 함께 춰 주십시오!"

아리아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 물었다. 마음 같아선 딱 잘라 거 절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지라는 것이 있었다. 아리아는 평 생 이미지를 관리하며 살아온 사 람답게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아, 여기 계셨군요.

그리고 그 가운데 등장한 건, 정 말 상상치도 못한 사람이었다.

짧은 은발에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라일락을 닮은 연보라색 눈동자, 새하얀 신관복을 입은 신 비로운 인상의 사내.

"아리아 영애, 괜찮으시다면 저 와 한 곡조 추지 않으시겠습니 까?"

율리안 대신관이었다.

'영애께서 그 카슈미르입니까?

정말 반갑습니다. 그 지랄병 걸린 폭군을 설탕 묻힌 마카롱으로 만 드는 분이시라기에 꼭 만나 뵙고 싶었죠. 어떤 분이신지 정말 궁금 했는데 직접 뵈니 그 자식이 발광 하던 이유를 알겠네요.'

율리안은 카슈미르와 아리아에 게 데뷔탕트의 축복을 해 준 신관 이었다. 그때 카슈미르에게 이상 한 말들을 많이 지껄이기에 조사 해 볼 필요를 느꼈건만, 이렇게 직접 나타나 춤까지 청할 줄은 몰 랐다.

"......대신관님께서 제게 춤을 청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아리아는 부드러이 웃으면서도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길고 풍성한 하얀색 속 눈썹이 펄럭거렸다.

방긋 웃은 율리안은 아리아에게 로 몸을 기울였다.

"카슈미르 공녀님에 대한 얘기 를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리아는 표정 관리도 잊고 잠 시 표정을 굳혔다. 율리안은 아리 아가 거절할 수 없는 안건으로 단 번에 그녀를 꿰뚫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요, 그게."

"신전에 카슈미르 공녀의 오랜 친구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최대한 담담한 척하려 했건만, 율리안은 아리아가 궁금해할 만한 안건만 툭툭 던졌다.

아리아는 멈칫했다.

'언니의 친구......

카슈미르는 아리아에게 외부에 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려주지 않 았다. 대놓고 묻진 않았으나, 아 리아는 늘 카슈미르가 어떻게 지 내 왔는지, 인간관계는 어떤지 궁 금했다. 순전한 궁금증보단 집착 에 가까웠지만.

아리아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말해 보시죠.

"물론 말해 드려야죠. 하지 만......"

새초롬하던 눈매가 능글맞게 휘 었다.

율리안이 손을 내밀었다. 새하얗 지만 의외로 거칠고 투박한 손이 었다.

"저랑 춤 한 곡부터 추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용히 대화할 수 있게 발코니로 모시죠."

연보랏빛 눈동자가 장난기로 반

짝였다.

아리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런 식으로 추파를 던지는 남자 들은 많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 쾌했건만, 신기하게도 율리안의 분위기는 가볍고 유쾌했다. 아무 런 흑심 없이 깔끔하게 다가오는 호기심이 싫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아리아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율 리안의 손을 잡았다.

"공녀님의 데뷔탕트 첫 춤을 받 아 영광입니다. 제가 모시죠."

씨익 웃은 율리안이 아리아의 손등 위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아리아는 그 감촉이 꽤 간지럽다 고 생각했다.

"춤, 출 줄 아십니까?"

"나를 뭘로 보고."

"하하, 이제 막 데뷔탕트를 맞이 한 병아리 귀족 자제?"

아리아는 자연스럽게 율리안의 리드에 따라 스텝을 밟으며, 그의

입이 대단히 자유분방하다고 생각 했다. 조금 전까지 만났던 귀족들 과는 다르게 신랄하고 담백했다.

'대신관이라고 다 귀족 출신은 아닌 모양이지.'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것들에 겐 지울 수 없는 혼적이 있다. 아 리아는 율리안이 평민 출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무리 유한 분위기를 풍겨도, 그의 태도에선 바닥에서 굴러 본 적 있는 이의 향취가 났다.

율리안은 유려한 춤 솜씨로 춤 을 추며 자연스럽게 발코니로 향 했다. 발코니로 나가 커튼을 치 자, 무도회의 소란과는 완전히 단 절되 었다.

"언니에 대한 것부터 말해 보시 죠."

아리아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 아리아 를 빤히 바라보던 율리안이 싱긋 웃었다. 달빛을 정면으로 받은 그 는 꼭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

다웠다.

"내가 현 교황의 말동무에서 대 신관 자리까지 왔다는 걸 아나 요?"

" 하?"

"밥은 먹여 준다길래 신관이 되 었는데, 나이 어린 교황의 또래 친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가장 나이가 비슷했던 내가 발탁되었 죠. 그래서 어쩌다 보니 그의 고 민을 들어 주며 친해졌고, 그 기 회로 대신관이 됐어요. 그때 내가 들어 주었던 그의 가장 큰 고민거 리가 뭔지 아나요?"

율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바로 카슈미르 공녀님이시더군 요."

아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교황하고 언니가? 어떻게?'

상상치도 못한 조합이었다. 얼마 전까지 평민 용병에 불과했던 카 슈미르가 교황과 엮였다는 게 말 이나 되나 싶긴 했지만, 율리안의 표정엔 거짓이 없었다.

"......나한테 이런 걸 왜 말해 주는 거죠?"

아리아는 두뇌를 스치고 지나가 는 수많은 의문을 빠르게 걸러 낸 채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오늘 처음 본 율리안이 제게 이런 걸 말해 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 다.

"응? 특별히 말하고 싶은 건 아 니었습니다. 그냥 공녀님을 이렇

게 한번 볼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미끼 였는데요."

그리고 율리안의 대답은 아리아 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이 새끼...... 뭐지?'

아리아가 떫은 표정을 지을 때 도 율리안은 싱글벙글 웃는 표정 그대로였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장난에 지나지 않다는 듯. 이렇게 까지 가볍고 대중없는 인간은 처 음이라, 아리아는 잠시 말을 잃었 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늘 뒤죽 박죽에 제멋대로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실 필요는 없죠."

율리안이 아리아에게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을 받은 은 발이 은파처럼 반짝거렸다. 율리 안은 아리아의 턱을 살짝 잡아 올 렸다.

"그저 흥미를 따라 행동하는 사 람도 있는 법입니다. 공녀님께선 제 흥미를 자극하신 것뿐이고요."

아리아는 천사 같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첫눈에 반했다.' 정도로 해 둘 까요? 원래 사랑에 빠진 이들은 상대방의 시선 한번 끌기 위해 별 짓을 다 하는 법이잖아요."

아리아는 그 말에 깨달았다. 이 사람은 정말 제 맘대로 사는 사람 이라고 말이다.

"......대체 제 어느 부분이 흥미 를 끈 거죠?"

아리아는 허탈하게 물었다. 자신 의 무엇이 이 제정신 아닌 것 같 은 대신관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율리안은 웃었다.

"결핍이요."

단순하고도 기묘한 대답.

그것이 아리아와 율리안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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