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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9화 (199/254)

199화. 외전 5

"......공녀. 아리아 공녀? 듣고 계신가요?"

아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에 빠져 아득해졌던 정신을 건져 내며 굳은 입매를 애써 끌어 올렸다.

"미안해요. 조금 생각을 했지 뭐 예요.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아, 하긴. 요즘 사업 때문에 한

창 바쁘시죠? 이번에 새로 나온 바디체인이......

아리아는 제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귀족 자제들의 말에 대충 맞장구치며 미간을 매만졌다.

카슈미르가 제국 건국기념일 테 러를 막고 만신창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반쯤 나갔던 정신은 아직도 회복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공작가에 들어오면 다시는 그런 꼴을 보지 않을 줄 알았다. 영원

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아리아의 부푼 마 음을 놀리기라도 하듯, 아리아는 또다시 카슈미르가 희생하는 꼴을 봐야 했다.

'나는 또 무력하구나.'

아리아는 뒤틀리는 속을 티 내 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미간 을 꾹 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사 교 파티고 뭐고 다 뒤로하고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곳에서 카슈미르의

평판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카슈미르 공녀 께서 한동안 몸이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이젠 좀 괜찮으신가 요?"

아리아 앞에서 조잘거리던 귀족 영애 중 하나가 문득 물었다. 그 공교로운 타이밍에 그녀는 제대로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제 언니 말이죠."

아리아는 목이 졸린 듯한 목소 리로 중얼거리며 떨리는 입꼬리를 겨우 비틀었다. 여기서 사실 카슈 미르는 몸 아플 일 하나 없는 소 드 마스터인데 스스로 사지에 뛰 어들어 만신창이가 된 거라고 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변명을 해 야 했다.

'말해, 멍청아. 뭐라도.'

하지만 아리아는 아무 말도 하 지 못한 채 멍청하게 굳어 있었 다. 그나마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라곤 사교술밖에 없었음에도 말이

다.

길어지는 침묵에 귀족 자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리아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대체, 이것도 못 하면 네 쓸모 가 뭐야.'

그녀가 뭐라도 말하려 억지로 입을 열 때.

"아, 아리아 공녀. 여기 있었 나."

아리아를 도운 건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황급히 허 리를 숙여 예를 차렸다. 정신이 번쩍 든 아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혼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2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희뿌연 연보랏빛 머리칼, 녹아내 릴 듯 달콤한 인상의 미인. 안개 낀 듯 몽환적인 푸른 눈이 곱게

휘었다. 잿빛 제복이 그와 한 몸 이라도 되는 양 잘 어울렸다.

2황자, 세레논 솔라티네였다.

'언니 제자?'

아리아의 생각이 가장 먼저 이 른 곳은 거기였다. 사교계에서 굉 장한 인기를 누리며 황태자의 자 리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 을 가진 황자였으나, 아리아는 늘 카슈미르를 기준으로 하여 생각했 다.

'2황자가 왜 나를?'

아리아는 대강 인사를 하면서도 기묘하단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리아와 세레논 둘 다 사교계에 서 활발히 활동하는 만큼 얼굴을 본 적은 많았으나, 인사만 할 뿐 특별히 친분 있는 사이는 아니었 다.

아리아가 의아해하며 미간을 좁 히는 가운데, 세레논이 유려하게 웃었다.

"공녀에게 할 말이 있어서 말일

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들 잠시 물러나 주겠나?"

"아, 네, 네!"

세레논이 부드럽게 말하자 아리 아를 둘러싸고 있던 귀족 자제들 이 빠르게 갈라졌다. 그 가운데 아리아가 답지 않게 조금 넋을 놓 고 있었을까, 세레논이 가볍게 손 짓했다.

"이리 와 주겠나?"

사뭇 분위기가 다른 푸른 눈이 맞부딪쳤다.

"......그러죠."

아리아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면 서도 드레스 자락을 잡아 들고 사 뿐히 걸어갔다.

황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데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 기 때문이다.

세레논은 여유롭고 능숙하게 아 리아를 에스코트했다. 2황자와 공 녀라는 혼치 않는 조합에 많은 이 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몰렸지만

아리아도 세레논도 시선엔 익숙한 이들이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발걸 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시죠. 할 말이라도 있 으신가요."

아리아는 사람이 드문 곳으로 나왔을 때에야 팔짱 끼고 있던 손 을 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따로 부른 것을 보 면 카슈미르와 관련한 심각한 안 건인가 싶었지만, 사실 사람들 사 이에서 피곤했던 참이라 데리고

나와 준 것만으로도 대단히 고마 웠다.

"아, 사실 특별히 없네."

"......네?"

세레논이 아리아를 휙 돌아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아리아는 대단 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곳에서 꽤 피곤해 보이기에 부른 건데, 너무 큰 참견이었나? 스승님이 생각나서 그랬네. 그대 이야기를 자주 하시거든."

세레논의 희뿌연 푸른 눈이 아 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아리아는 순간 울적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 었다.

잠깐 카슈미르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려 해도 아리아의 세상은 온통 카슈미르였다. 자꾸만 시체 꼴이 되어 하늘에서 추락하던 카 슈미르가 생각나 평소처럼 굴 수 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그 순간 아리아의 분위기에 뭔

가 일이 있음을 직감한 세레논이 중얼거렸다. 세레논은 가볍게 창 가에 걸터앉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자리를 피해 줄 수 있네 만. 혹시 고민을 털어놓을 대나무 숲이 필요하다면...... 되어 줄 수 있지. 내 입은 무거운 편이라서."

세레논이 유하게 미소 지었다.

"잘 모르는 사람 앞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 있을 거 아닌가."

아리아는 이성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이었다. 평소라면 세레논의 의중을 짐작하려 들며 속내를 조 금도 비추지 않았으리라.

"......정말 좋아하고 빛나는 사 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해 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심으로 좋 아하는데...... 자꾸만 다쳐 와서 가끔은 원망돼요. 그 사람을 위해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그때 순순히 대답했다 는 것은 그만큼 아리아의 상태가 불안정했음을 의미했다.

굉장히 충동적이었지만, 어쩌면 친분이 없는 세레논이었기에 툭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었다.

세레논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워낙 대중없는 말이었기에 알아듣 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차 한 아리아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수습하려 할 때.

"내게도 있지. 좋아하고 빛나는 사람이."

세레논이 나지막한 투로 말했다.

"내 형님은 늘 나보다 빛나시지. 그분은 늘 앞서 가시고, 나는 그 길을 뒤따를 뿐이야. 나는 그분의 빛을 받아야 겨우 빛날 수 있지."

'세레논의 형이라면 디에고 황태 자겠지.'

느리게, 또 진솔하게 이어지는 말에 아리아는 조용히 귀를 기울 였다. 세레논과 아리아는 친분은 없었지만, 서로의 성정은 익히 들 어 잘 알았다. 세레논도 아리아도 사교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입이 굉장히 무거웠다.

그랬기에 두 사람 다 남에게 쉬 이 할 수 없는 말을 서로에게 텅 빈 곳에서 외치듯 가볍게 털어놓 을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처음엔 그 사실이 질투 났네. 왜 형님은 태어날 때부터 태양이 고 나는 달인 걸까. 형님만큼 빛 나지 않는 스스로를 원망하기도 했지."

아리아가 세레논의 이야기를 들 으며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동질

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손위 형 제가 있었고, 그들은 두 사람보다 반짝거렸다. 세레논의 처지가 너 무 자신과 닮아 있었기에 아리아 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 라는 생각이 들더군. 그러면서부 터 검을 배우기 시작했다네. 그것 만큼은 내가 형님보다 잘하지."

세레논이 호기롭게 웃었다. 달빛 이 비추는 창가에 앉은 그의 연보 랏빛 머리칼이 반짝거렸다.

"태양과 달은 빛나는 방법이 다 르지• 둘 중 틀린 것이 어디 있겠 나. 다를 뿐인데. 달은 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걸세."

'달은 달로서.'

별것도 아닌 그 한마디가 아리 아의 가슴 깊은 곳에 묻혔다. 아 리아가 눈을 들어 세레논을 응시 하자,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는 조금 닮았을지도 모르 겠군."

세레논이 아리아를 향해 장난스 럽게 주먹을 내밀었다.

'달과 어울리는 사람.'

아리아는 달빛 아래의 세레논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그는 햇빛이 없어도 어둠에서 환하게 빛날 것 같았다.

툭.

아리아는 그가 내민 주먹에 자 신의 주먹을 맞부딪쳤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그때부터, 아리아는 자신도 무언 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유수와도 같아서 빠르게 흘렀다. 사교계 최전방에 있는 아 리아는 정치에 직접 뛰어들지 않 아도 그 변화의 중심에서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전쟁은 발발한다.'

아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모를 수 없었다.

'그리고 언니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고.'

천재적인 머리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아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열심히 배웠으니 공격 마법사로 출전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니 카슈

미르에게 가로막힐 것 같았다.

'치유사. 치유사로 나가자.'

너무 전방에 있지도 않으나, 사 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 치. 게다가 요정 혼혈로서 지닌 막강한 치유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아리아는 치유사로서 카슈미르 와 함께 전쟁에 출전하기로 결심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

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

일방적인 통보 후 돌아온 카슈 미르의 거친 반응은 이미 예상한 것이었다.

카슈미르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염려이 고, 자신을 사랑해서 그렇다는 것 도.

"이전부터 나를 위한다고 하면 서 내 의견을 물어본 적은 있어? 사실 다 언니의 만족 아니야?"

하지만 사랑해서 하는 일이 늘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 니라는 걸, 아리아는 정신이 혹사 당했던 15년의 세월 동안 깨달았 다.

아리아의 세계는 여전히 좁다. 하지만 더 이상 단둘은 아니었다.

재수 없지만 유용한 칼도 있었 고, 늘 묵묵하게 지지해 주는 카 이사르도 있었다. 그들은 피로 이 어진 것도 아니었고, 사실은 가족 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분 명 좋은 동료이자 조력자였다.

툭하면 만나자고 해 오는 율리 안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세레논 도 있었다.

크리시스 공작가가, 사교계에서 의 명예가 있었다.

아리아는 더 이상 이 세상을 그 저 놓아둘 수 없었다.

"나는 안전한 새장 속에서 얌전 히 지켜져야 하는 아기 새가 아니 야! 화원에서 꼼짝 못 하는 예쁜 장미가 아니라고! 나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어!"

빛나는 신념이나 타고난 선함 같은 것은 아리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런 것을 이유로 삼기에 그녀는 너무 더러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서는 이유는 명확했다.

더는 이곳에 멈춰서 보호만 받 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리아는 여전히 카슈미르를 가 장 사랑한다. 그녀의 행복을 바랐 고, 그녀는 아리아의 세계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타인이었다.

"나를 한 명의 동등한 사람으로 서 존중한다면 내 선택을 지지해 줘."

하지만 이젠 제 삶의 주인공은 그녀 자신으로 하고 싶었다. 더는 타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지 않 았다.

카슈미르를 사랑하는 마음이 적 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건강 하게, 행복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였다.

너와 내가 남은 상태에서 적당 량의 사랑을 적당한 속도로 부을 수 있도록, 그녀 스스로를 인생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로 했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 어 줘."

그러므로 이것은 그녀가 온전히 그녀로서 내리는 최초의 선택.

안온함과 잘못된 사랑으로 이루 어진 작은 세계가 파괴되고, 새는 비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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