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한 병 더."
"••••••네?"
잔을 닦던 바텐더가 경악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크게 뜬 그의 두 눈이 내 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술병들에 머물렀다.
"저야 손님이 매출을 올려 주시면 좋지만...... 이건,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신지......
"한 병 더!"
"하이고...... 네 네. 갑니다."
염려 섞인 투로 말하던 바텐더가 내 고함에 혀를 챘가. 구제불능의 술 주정뱅이를 보는 눈이었다. 나는 검 은 로브에 파묻힌 채로 앞머리를 거 칠게 쓸어넘기며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하나도 안 취하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독한 술을 몇 병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들이켰 는데도 정신은 지나치게 깔끔했다. 소드 마스터의 정신력이 원망스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 아리이"' J
아리아가 전쟁에 출전하겠다고 선 포한 날 밤. 내가 팔자에도 없는 술 을 마시며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이유는 분명했다.
머리로는 이해했고 마음으로도 받 아들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괜찮아 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 다
'여태까지 내가 해 온 건 정말 내
이기심으로 인한 것이었을까'••...
나는 우울함에 입술을 오리처럼 내 밀며 상체를 탁자에 엎드렸다. 무거 운 바위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뭔...... 슈슈? 슈슈 맞아?"
그리고 상상도 못 한 인물을 만났 다
별생각 없이 들어온 듯했으나, 날 보더니 눈을 의심하는 표정으로 성큼 다가온 그의 녹빛 눈동자가 반짝였 다. 조금 전 마신 압생트가 떠오르는
색깔이었다. 후드 아래로 새하얀 머 리칼이 힐끗 보였다.
"레오••...
나는 어쩐지 더 울컥해선 그의 이 름을 중얼거렸다.
"지나치게 공교로운 우연이네. 혼자 술 마시는 거야?"
"킁. 그래. 우울해서...... 너는......
"나도 술. 사서 나갈 생각이었는 데...... 네가 있으면 여기서 마셔야 지."
레오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걸 터앉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부 끄러웠으나, 이유 모를 공허함과 외 로움이 더 컸기에 그를 제지하지 않 았다.
"너네 나라로는 안 가••...?"
사절단이 돌아간지도 꽤 지난 시점 이었다. 무려 국왕인 레오가 아직도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가. 업무 봐야 하니까. 그런데 솔 라티네에서도 일이 많아서 순간이동 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뿐이
야."
아주 태연하게 내가 시킨 술을 빼 앗아 든 레오가 술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이켰다. 아타라에서 솔 라티네까지 거리는 상당했기에 순간 이동으로 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 으나, 아타라는 초장거리 순간이동 포털을 최초로 발명할 만큼 마도공학 이 발달된 나라인 만큼 거짓은 아닐 터였다.
"국왕인 네가 왔다 갔다 해?"
나는 좀 의아해서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전쟁을 앞두고 바쁘다 해도 국왕이 이렇게 발로 뛰는 경우는 드 물었다. 내 물음에 잠시 눈을 내리깔 던 레오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반대하는 모든 귀족을 숙청 하고 이곳에 올랐기 때문에 뼈대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처지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적어서 내 발로 뛰어야 흐[지. 국왕인데도 위엄이나 여유가 하나도 없다는 게 우습지."
레오는 모든 것이 박살난 허허벌판 위에 왕좌를 놓은 사람이었다. 아직 즉위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으니 여러
모로 불안정할 게 뻔했다.
'너도 참 고생이구나.'
나는 안쓰러움을 담은 시선으로 레 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레오가 질 색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너한테 그렇 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내 자의로 하는 거니까 상관없어."
"너 다크서클 짙어진 건 알아 ......?"
"......그래서 싫어?"
"싫진 않은데 좀...... 넌 외모가 국
본데......
"젠장. 오이팩 하면 될 거 아니야."
잠시 한 편의 콩트 같은 대화가 오 가고, 나는 우울하던 가운데 진심으 로 웃음을 흘렸다. 조금 물기 어려 있긴 했지만. 역시 레오는 내게 가장 편한 사람 중 하나였다.
"웃지 마. 나는••...
툴툴거리며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레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얼굴을 굳혔다.
내 뺨을 붙잡은 그가 훅 거리를 좁 혔다. 레몬 향이 단숨에 비강을 채웠 다. 내가 놀라 눈을 크게 뜰 때, 심 각한 표정을 지은 그가 엄지로 내 눈 가를 쓸었다.
"너 울었어?"
걱정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낮은 목 소리가 순간 감정을 북받치게 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안 울... 컥, 커흑......
"뭐, 뭐, 뭐야, 갑자기 왜......!"
"따흐흑! 커헉! 켈록......
"야, 자, 잠깐, 우, 울지 마! 나, 나 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른 다고!"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술 마시고 울기까지 하다니,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다.
"그래...... 그래서 네 동생이 전쟁 에 출전하겠다고 해서 뒤지게 싸웠 고."
"뒤지게는 아닌데...... 싸우긴 했지.
킁...
"하여튼. 그것 때문에 여기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는 거 아니야."
"크흡••... 커허헉••...
"난리 났군."
레오가 푹 한숨을 쉬며 짓무른 내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나 는 코를 훌쩍거리며 그 손길을 받았 다. 어색한 듯 삐걱거리면서도 다정 한 손길이 싫지 않았다.
"널 울린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머리를 은쟁반에 담아다 네게 바쳤을
텐데. 네가 사랑해 마지 않는 동생이 라니 그럴 수도 없고••...
나직한 중얼거림은 귀를 의심할 정 도로 살벌했으나, 레오의 표정은 평 온했다. 나는 조금 오싹함을 느끼며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의 견은 존중하지만 걱정되고...... 건강 한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어. 대체 사 랑은 뭘까."
한탄 같은 토로에 연둣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형광물질
같은 그 두 눈은 시선만으로도 사람 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인간관계 상담에 적합한 상 대가 아니야. 알지."
레오는 정상적인 인간관계라곤 하 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조언 을 기대할 순 없었다. 애초에 그저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토로일 뿐 이었고.
그저 넘기라고 하려 할 때, 레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꽤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지 도 모르지."
턱을 괸 그가 씨익 웃었다. 그 태도 는 어쩐지 자신만만함까지 엿보여서, 나는 그가 사랑학 전공 박사라도 되 는 줄알았다.
"네가••... 사랑을?"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내 가 아는 레오는 사랑과 인연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레오와 사랑은 바 이킹과 유니콘의 조합 같았다.
"그래. 꽤 오래 해 왔거든."
레오는 탁자에 놓인 술병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의아 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미간을 좁혔 다
'레이샤를 말하는 건가.'
그에게 가장 사랑에 가까운 것을 보여 준 그의 유모 레오가 그녀를 가족처럼 사랑한다는 것도 이해가 갔 다. 내가 퍼즐 끼워 맞추듯 그의 말 을 짜집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었
다.
"보지 않으면 보고 싶고. 꽉 쥐고 싶다가도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 고. 내 뜻대로 하고 싶다가도 뜻을 이뤄 주고 싶고 만약 꼭 눈물을 흘 려이만 한다면 나 때문에 흘리길 바 라는 거잖아."
M 으 W
O*
나는 짧게 탄식을 뱉었다. 아리아를 향한 내 마음과 비슷한 듯 다른 듯 애매했다. 사랑이나 감정 같은 것은 내게 너무 어려웠다.
"그럼...... 아리아를 그냥 보내줘야 하는 걸까."
아리아가 전장에 나간다는 생각만 해도 착잡해졌다. 아리아가 다치는 걸 상상하면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러다 아리아가 죽기라도 하면 내 가 버틸 수 있을까, 난 확신할 수 없 었다.
"네 동생을 묶어 둘 자신 있어?"
레오가 여상스러운 투로 말했다. 연 둣빛 눈동자가 느리게 번뜩였다. 집
착이 뒤섞여 기이하게 들끓는 두 눈 은 섬뜩했다.
"평생 곁에 잡아 두고 집착적으로 쥐고 있을 자신 있어? 그 아이가 괴 롭다고 몸부림쳐도 견딜 자신 있어? 널 증오하는 눈으로 봐도?"
그가' 자조하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지 못하니 놔주어야 하는 거 지. 가지고 싶어도/'
레오의 목소리는 깊은 경험이 담겨 무거웠기 때문에, 나는 반박할 수 없
었다.
"너도 전쟁에 나가는 거야?"
그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있을까, 레오가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바꾸었 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야지. 힘이 있는데 관망 할 순 없잖아."
"너는 관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잖 아."
"내가 관망할 성격 아니라는 거 알 잖아. 그랬다면 너도 구하지 않았겠 지."
나는 오지랖 넘치는 성격의 소유자 였다. 멍청하다 해도 별수 없는 천성 이다. 내 단호한 대답에 레오가 헛웃 음을 흘렸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었지."
중얼거린 그가 짧게 숨을 뱉었다.
"전쟁은 겨울쯤에 발발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겨울에 익숙한 북부 인들은 추운 겨울을 취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여기니까. 그 전까지 만반 의 준비를 마쳐야겠지."
레오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전에 나는 은빛 늑대 수인족을 찾아가 볼 예정이야."
"......어째서?"
나는 조금 놀라서 물었다. 은빛 늑 대 수인족은 수인 대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 종족이었기에, 군락 으로 가는 길도 험했고 종족 자체도 굉장히 보수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여 차저차 그들의 주거지로 간다고 해도 뭔가 말하기도 전에 목이 잘려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너희 집에서 레이샤의 유품을 눈 뜨고 코 베이듯 빼앗긴 적 있었지. 레이샤를 의심할 일이 없으니 원래는 뒷조사 같은 거 안 했었는데...... 그 때 일로 레이샤의 과거를 조사에 맡 겼어. 누군가 레이샤의 혼적을 찾는 다는 게 이상하니까."
레오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결과, 레이샤가 은빛 늑대 수인 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단서를 찾았 어."
레이샤가 은빛 늑대 수인족과 관련 이 되었다는 짐작은 진작에 했었다. 하지만 은빛 늑대 수인족 그 자체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건만.
나는 놀란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 다. 레오는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 을 짓고 있었다.
"은빛 늑대 수인족들은 자신의 무 리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안정감 을 느낀대. 혹시 나로 인해 그걸 포 기하신 건 아닐까 싶기도 하己 남은 레이샤의 가족이 있나 확인해 보려 고."
그 잠잠한 목소리는 어쩐지 서글프 고 해묵어 보였다. 나 또한 어쩐지 복잡해져 입술을 감쳐물다 그의 어깨 를 토닥였다.
"어쩌면...... 거기서 은빛 늑대족에 게 전쟁을 도와 달라고 요청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그들은 하 나하나가 막강한 병력이니."
"그래도 좋겠지. 그 폐쇄적인 종족 이 허락할지는 모르겠지만."
레오가 느리게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 같이 가 줄래?"
흐}기야.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던 유 모의 과거를 혼자 마주하는 것은 힘 들 터였다. 나는 묵묵하게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같이 가마."
레오가 힘없이 웃었다. 그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나 는,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레이샤는 너를 양육한 걸 후회하 지 않을 거야."
희미한 기억 속 '요정의 밤' 원작 소설에서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레 이샤가 레오를 맡게 된 건 레오 어머 니와의 정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를 맡은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그랬으면 좋겠다."
병을 가볍게 흔들던 레오가 중얼거 렸다.
레오 또한 무언가의 발돋움을 준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