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저 미친놈이......!"
나와 카시아를 조마조마한 표정으 로 바라보던 남기사가 탄식했다. 내 게 오려는 카시아를 붙잡으려 했던 자였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 만 내 귀엔 들렸다. 그의 짧은 주황 색 머리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 다
"대련이라."
나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 다. 나도 모르게 눈꼬리가 올라갰다.
"다른 훈련관에게도 이리 대중없이 대련을 신청합니까?"
대련 자체야 문제가 없었다. 다만 걸리는 점은 내가 현재 훈련관으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권위에 신경 쓰진 않았으나, 적어도 무시당해서는 안 되었다. 내가 우습 게 보이면 내 가르침도 우스워질 테 니.
'내가 어린 공녀라 우습게 보였나.'
나는 카시아가 보통 훈련관에게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대련을 신청하는 지, 그게 의문이었다.
"다른 훈련관에겐 이러지 않죠 당 신이라 이러는 거니까."
카시아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일관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잘 만 든 석고상 같았다. 아름다우나 차갑 고 딱딱했다.
'흠.'
나는 짧게 숨을 뱉으며 그녀를 빤 히 바라보았다. 만사에 무심할 것 같 은 시니컬한 인상과 달리 푸른 눈은 나를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릴 기 세로 선득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카시아의 태도는 대단히 무례했다.
성을 말하지 않는 걸 보면 평민 출 신일 터인데,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않는 데다 '당신'은 내가 공녀라는 건 둘째치더라도 훈련관을 호명할 때 쓸 만한 단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무시하는 것 같진 않 은데.'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만만해 보 여서 덤벼드는 거라면 잘근잘근 짓밟 아 주면 될 일이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넘치는 호승심과 미묘한 반발심, 그리고...... 원망.'
카시아는 나를 이전부터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낯이 익기도 했고 말이다.
누군가의 원망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나 되짚어 보다가 생각을 지 워 냈다.
우선 나를 어떻게 잡아먹을지 고민 하고 있는 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는 카시아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나이와 직분이 어떻게 됩니까?"
"22살. 정식 기사입니다."
20대 초반엔 수습 기사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니, 저 나이에 정식 기사 라는 건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뜻했
다.
나는 꽤 감탄스러웠지만 겉으론 차 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 련을 신청하는 겁니까?"
공기를 짓누르던 기운을 한층 더 무겁게 했다.
이쪽을 힐끗힐끗 곁눈질하던 다른 기사들이 성급하게 숨을 들이쉬었己 내 바로 앞에 있는 카시아의 목덜미 에는 식은땀이 흘러 떨어졌다.
그녀의 몸은 근육들이 잘 잡혀 있 어서 검을 익힌 티가 났지만, 소드 익스퍼트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 다. 나와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훈련관님을 무시해서 이러는 건 아닙니다•"
카시아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대단 한 존경이 보이진 않았으나, 나를 무 시하는 태도는 확실히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카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분명 몸은 압박감으로 덜
덜 떨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두 눈은 두려움 없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미르와 싸워 보고 싶은 겁니 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흥미가 치 솟는 것과 동시에 의문이 가증되었 다
스르릉.
카시아가 거침없이 제 검을 발도했 다. 집안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닌지
그녀의 가죽 검집은 오래되어 낡고 닳아 있었으나, 검날만큼은 시리도록 날카로웠다.
"저는, 당신이 미르라는 걸 인정하 지 못하겠습니다."
이를 악문 카시아가 검을 세웠다. 검 너머로 푸른 눈이 이글거렸다.
'뭔......
상상치도 못한 대사에 내 머릿속에 선 수많은 전개가 펼쳐졌다 사라졌 다.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전개는 카시 아가 미르의 추종자였다는 것일까.
기사들 중 미르를 따르는 이들이 상당하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기대 했던 미르의 모습과 내가 너무 달라 서 실망한 걸지도 몰랐다.
카시아가 인정하든 말든 내가 용병 미르인 건 변함이 없었으나, 카시아 의 표정은 진지하고도 분해 보였기에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인정을 강요할 수야 없는 노릇이
지만......
스르릉.
나는 허리춤의 검을 발도했다. 은빛 검날이 이른 오후의 강한 햇빛을 받 고 번뜩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게 퍽 기분 좋진 않군요.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그럴 의무는 없었으나, 직접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미르는 내 정체성이 라는걸.
나는 카시아를 겨눈 채 씨익 웃었 다.
"......제가 생각하던 미르는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대가 상상하던 미르는 어땠기에 남자였습니까? 나이가 많았습니까? 좀 더 훤칠하게 생겼던가요?"
카시아의 거친 말투에 태연하게 응 수했다. 그녀는 울컥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이상향으로 삼은 미르는 적 어도 귀족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분한 목소리엔 들끓는 배신감이 담 겨 있었다. 물기가 일렁이는 푸른 눈 을 본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 혼자 상상하고 저 혼자 실망한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 다. 내가 책임질 부분도 아니었고.
하지만 나까지도 원통해지는 것 같 은 저 얼굴을 보자니 미묘한 죄책감 이 피어올랐다.
"당신이 미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같은 두 눈이 나 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귀족을......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 네.'
어려서도, 여자라서도 아니고 '귀족 이라서'라니.
조금 곤란해졌지만, 그래도 난 느리 게 미소 지었다.
"그것 참 유감스럽지만, 사실은 사 실입니다."
쉬이익!
공기를 표류하던 마나가 블랙홀을 만난 듯 빨려 들어가 한곳에 압축되 었다. 검신이 진동하며 칠흑 같은 오 러가 내 검을 뒤덮었다.
주위에서 탄성에 가까운 탄식이 터 져 나오고, 카시아의 동공이 희미하 게 혼들렸다.
사실 오러까지 꺼낼 생각은 없었건 만, 카시아의 반응이 저러니 제대로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미르입니다. 그건 달라지지 않죠."
내 투쟁의 이름. 그것은 변질되지 않는 본질이었다.
탁, 탁탁.
불꽃 같은 낯을 한 카시아가 나를 향해 돌진했다. 속도는 꽤 빨랐己 검을 잡은 자세도 잘 잡혀 있었다. 거친 두 손에선 오랜 노력의 흔적이 보였다.
챙
청량한 소리와 함께 검날이 부딪쳤 다. 밀어내지도 않고 버티기만 했지 만, 카시아는 오러 앞에 노출된 것만 으로도 힘겨워 보였다. 파르르 떨리 는 그녀의 검날을 빤히 바라보던 나 는 짧게 한숨을 뱉었다.
"내가 싫습니까?"
챙!
다시금 검이 부딪쳤다. 첫 합으로 분명히 패배를 예감했을 텐데도 그녀
는 계속 내게 덤벼들었다.
"싫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카시아가 힘겹게 말을 토해 냈다. 복잡해 보이는 저 얼굴을 대체 언제 보았던 건지 열심히 과거를 되짚던 찰나, 카시아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 다
"당신을 보고 검사의 꿈을 키웠습 니다. 아무리 힘들어呈 노력하고 또 노력하다 보면 당신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개 같은 귀족들 을 실력으로 짓눌러 버리려 여기까지
악착같이 올라왔습니다. 미르는 저같 이 가난한 평민들의 희망 같은 존재 였단 말입니다!"
카시아는 내 무릎을 항해 낮게 검 을 휘둘렀다. 나는 그 검을 재빨리 피하곤 카시아의 옆구리로 검을 찔러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내 검을 막아 낸 카시아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귀족이라니...... 기만입니다."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았다. 붉 은 별을 보고 붉은색이 되고자 정진
하였는데, 사실 그 별은 파란색이었 다고 하면 나라도 배신감이 들 것 같 았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 니다. 아시죠"
하지만 그 별도 여태껏 자신이 붉 은색인 줄 알았는데 어쩌겠는가.
나도 내가 귀족이라는 걸 안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평민이라고 광고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마음인지 이해도 되고• 나를
희망으로 봐 준 것도 고마웠지만, 카 시아의 배신감은 내가 책임져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알아요. 아는데••••••!"
캉
카시아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그 녀의 손목이 비틀리며 검이 허공을 날았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흙 바닥에 떨어지는 검이 처량해 보였 다
"진심으로 존경했단 말입니다.....
물기로 일렁이던 푸른 눈이 결국 물방울 하나를 느리게 흘려보냈다. 딱딱하고 시려 보이던 얼굴은 눈물을 흘릴 땐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가장 존경했던 당신이 역겨운 귀 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인 걸까. 그녀는 딱 한 방울, 그 이상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눈 가를 벅벅 닦은 카시아가 내 검을 노 려보았다.
그럼에도 나는 미르였다. 내 검날을 감싼 칠흑빛 오러는 위조할 수 없는 그 증거였다.
"귀족인 당신을 인정하면 나는 귀 족들을 부수기 위해 버텨 온 인생을 부정해야 합니다."
푸른 눈이 독기를 머금었다.
"나는 차라리 당신을 부정할 겁니 다."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든 카시아 가 내게서 휙 등을 돌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훈련관님! 이 자식이 예의 바르게 말하는 법을 몰 라서 말입니다!"
안절부절못하며 나와 카시아의 대 련을 지켜보던 주황머리 남기사가 후 다닥 달려와 카시아의 어깨를 붙잡으 며 날 향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다급하게 내 눈치를 살피던 회색 눈동자가 카시아를 흘겨보았다.
"야 너 빨리 훈련관님께 사과드려! 진짜 죽고 싶......!"
"꺼져."
카시아는 남자의 어깨를 밀치고 쌩 하니 떠났다. 경악에 차 '흐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남자는 나를 돌아보더 니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불쾌하셨 죠? 저 자식 성깔이 장난 아니라••... 기사단 내에서도 좀 유명합니다. 그 런데 정말 나쁜 놈은 아니에요"
남자는 열심히 카시아를 두둔했다. 카시아의 말들에 생각이 많아졌던 나 는 쩔쩔매는 남자를 보며 수많은 생
각들로 달구어졌던 머리를 식혔다.
"경은 카시아 경의 친구입니까?"
"아, 네! 저 녀석도 절 친구라고 생 각할진 모르겠지만요 정식 기사 제 인이라고 합니다."
제인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에게 마주 고개를 숙여 주고 어색 하게 미소 지었다.
"카시아 경께 대단히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네요"
"아뇨 아닙니다! 저 녀석이 훈련관 님을 싫어할 리가요"
제인은 주황 머리칼이 붕붕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은 미르 님을 세상에서 가 장 존경했습니다. 미르 님의 전투 촬 영 영상구를 사느라 월급 대부분을 탕진할 정도였죠 다시 만나는 걸 일 생일대의 목표로 여기고 있던데
착잡한 표정으로 제 목덜미를 매만 진 제인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 녀석, 사연이 있어서 귀족을 굉 장히 싫어합니다. 미르 님이 사실 귀 족이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아 한 동안 출근도 못 했을 정도였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누군가에게 상 처를 주었다는 사실이 폐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녀석 무례에 대해선 제가 대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인이 쓰게 웃었다.
"그 녀석은 미르님을 좋아합니다. 아주."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더 복잡하 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