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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03화 (203/254)

203화

"그래. 첫 출근은 어땠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노아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을 맡아 보니 히비스커스 같았다.

그 앞에 정자세로 선 나는 영혼 이 반쯤 나간 채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 평탄하진 않더군요."

"아. 얘기는 들었네."

노아의 금빛 눈동자에 흥미가 돌았다. 지루한 와중에 재밌는 안 건이 생겼다는 표정이었다.

"카시아 경과 대련을 벌였다면 서?"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나는 상황에 대해 논하기 전에 내 잘못부터 인정하며 고개를 숙 였다. 나는 노아의 부관이자 그의 대리인이므로 내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그의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

었다. 앞뒤 상황을 막론하고 이 부분은 사과해야 했다.

노아가 호탕하게 웃었다. 나를 꾸짖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젊을 땐 다 다투면서 사는 게 지. 그 소식 덕분에 오늘의 지루 함을 좀 달랬다네.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 보게."

노아는 가십을 좋아하는 사교계 의 젊은 청년처럼 눈을 빛냈다. 내버려 두면 쿠키를 와그작거리며

연극 관람하듯 흥미진진하게 들을 것 같았다.

'라이너랑 완전히 판박인 줄 알 았는데. 이런 부분은 조금 다른 가.'

라이너는 인간성이 없다 싶을 만큼 딱딱한 사람인 것에 비해 노 아는 어느 정도 장난기가 있는 것 같았다. 엄격한 노장이라고만 생 각해 왔건만, 색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노아에게 카시아와 있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차를

들이켜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 이던 노아는 이내 옅은 미소를 띠 었다.

"카시아라면 꽤 유명한 기사지."

"아, 그녀를 아십니까?"

"잠재력이 상당해 눈여겨보고 있었네. 실력은 빠르게 느는데 돌 풍 같은 성정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더군. 귀족 자제들과 만 날 때마다 트러블이 생겨서 카시 아를 파문시키라는 편지가 심심치 않게 오는 편일세."

"그런데 아직도 파문시키지 않 으셨군요."

귀족들 중엔 자존심을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 많았으니, 그 건으 로 노아를 상당히 귀찮게 했을 터 였다. 노아는 가뿐하게 어깨를 으 쓱였다.

"모든 사건은 쌍방 과실이었네. 파문을 시킬 만한 것까진 아니었 고. 그 편지들은 불쏘시개로 유용 하게 사용하고 있네."

귀찮게 하는 귀족들을 견뎌 내 는 것보다 평민 기사 하나를 파문 시키는 게 훨씬 간단한 일임에도

노아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단연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다.

'귀족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닌 데.'

노아처럼 좋은 사람도 귀족이니 말이다. 카시아는 모르겠지만, 그 녀는 이미 귀족의 호의를 받고 있 었다.

'가장 존경했던 당신이 역겨운 귀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카시아는 어째서 귀족을 향해 그렇게 선명한 증오를 보이 는 걸까.

"카시아 경은 귀족을 굉장히 싫 어하는 것 같던데요. 이유를 아십 니까?"

내 물음에 노아의 표정이 미묘 하게 변했다. 그는 뭔가 알고 있 는 것 같았는데, 어쩐지 조금 슬 프고 씁쓸해 보였다.

"......우리 세대가 실수를 많이 저질렀지. 현재의 평민들 중 나이

가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거의 하나같이 귀족에게 짓눌려 본 경 험이 있으니. 카시아 경의 개인 사정이니 내가 자세하게 말해 줄 순 없네. 하지만 사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해 두지. 이유 없는 증오는 아닐세."

노아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이유를 물어 보는 게 어떤가. 그 기사, 자네를 굉장히 좋아하던데. 거의 신도 수 준이더군. 뭐, 그 기사뿐만이 아

니지만. 알고 보니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 자네의 인기가 대단하더 군?"

상냥한 조언으로 시작한 말은 웃음기 섞인 장난으로 끝났다. 나 는 얼굴이 화악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마른세수를 했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하하. 자네가 조금 이해해 주 게. 나이가 드니 젊은이들 놀리는 게 삶의 낙일세."

편한 자리에서의 노아는 헬리오

스가 잠시 떠오를 정도로 짓궂었 다. 물론 노아의 짓궂음이 생일 폭죽이라면 헬리오스의 짓궂음은 흑마법 폭탄 수준이었지만.

노아가 자애롭게 웃었다.

"그대는 워낙 인기가 많으니, 이 런 식으로 편법을 사용해 기회를 주는 것도 이해해 주게나."

"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던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말을 멈췄다.

발걸음 소리까지도 일정하고 단 단한 남자. 눈앞의 노아와 닮았으 면서도 다른.

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제1기사 단장님."

황궁 제2기사단장이자 노아의 아들인 소후작, 라이너 아인하르 트였다.

"그래. 들어오게.

노아가 즐겁다는 목소리로 입장 을 허용했다. 집무실의 문이 부드 럽게 열렸다.

"......반갑습니다, 크리시스 경."

들어오자마자 나를 본 라이너가 가볍게 목례했다.

그 또한 밖에서 내 기운을 느낀 건지 자기 아버지 집무실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날 보고 당 황하진 않았지만, 내가 이곳에 있 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

다.

"안녕하십니까, 아인하르트 경."

코끝을 스치는 로즈우드 향에 습관처럼 미소 지은 나는 황금빛 유리알과 눈을 맞추었다. 그의 입 에서 '크리시스 경'이라는 호칭이 흘러나오는 것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라이너에게선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했으니 말이다.

"전달해 주시겠다던 자료 부탁 드립니다."

애써 내게서 시선을 돌린 라이 너는 집무실을 가로질러 노아의 책상 앞, 내 옆에 섰다. 공과 사 가 철저한 그의 성격답게 사적인 대화와 태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 전달해 줘야지. 잠시만 기다려 보게. 내 여기서 찾을 테 니."

즐거운 낯을 숨기지도 않은 노 아가 자신의 책상을 무성의하게 뒤적거렸다. 뭘 찾는 게 아니라 더 어지럽히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 짓을 10초쯤 이어 나간 노아 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이런. 아무래도 정원에 놓고 온 것 같군. 부디 이곳에서 잠시 기 다려 주겠나? 내 금방 다녀오겠 네."

노아의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가 내게로 향했다.

"괜찮다면 크리시스 경이 기사 단장의 말동무가 되어 주게. 손님 을 접대하는 것도 부관이 할 일이

지."

맞는 말이었다. 나는 기꺼이 고 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침 훈련 이 끝난 시점이라 특별히 일이 있 는 것도 아니었고, 라이너라면 언 제든 좋았다.

" 아버지......

그때 내 옆에서 라이너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 호칭에 놀라 서 그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눈동 자로 노아를 노려보는 그의 뺨은 미세하게 꽃물이 들어 있었고, 이

는 악물고 있었다. 대단히 약 오 른 얼굴이었다.

'노아한테 계속 형식을 차리더 니.'

처음 보는 라이너의 젊은 아들 다운 모습에 신기해하고 있었을 까, 노아가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 인사는 되었다."

노아는 손으로 라이너의 어깨를 툭 치곤 그를 지나 문으로 나갔

다.

달칵.

노아가 사라진 자리엔 나와 라 이너뿐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 이쉬더니 마른세수를 하곤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돌아오실 때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하실 테 니."

라이너가 소파를 가리켰다. 노아 의 집무실이 익숙한지 꽤 능숙한

태도였다. 나는 혼쾌히 고개를 끄 덕였다.

"검술 대회 이후론 처음으로 뵙 는군요."

소파에 편하게 앉은 내가 말문 을 열어 침묵을 끊었다.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라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조금 바빠졌군요. 전쟁을 대비해 야 하니."

라이너가 담담히 말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비치는 햇빛을 받은 은회색 머리칼이 꼭 달처럼 반짝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잠 시 감상하고 있었을까, 은빛 속눈 썹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라이너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미르라는 것, 밝히셨군요."

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됐죠. 전엔 제가 미르라

는 걸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했었 는데...... 이젠 신경 쓰실 필요 없 습니다. 더는 비밀이 아니니까 요."

"그렇군요. ......아쉽습니다."

자신의 거친 손끝을 매만진 라 이너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지켜 드릴 비밀이 있어서 특별 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게 기분 좋았는데."

낮은 울림은 이른 오후에 걸맞 게 나른하면서도 그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런 게 없어도 라이너는 이미 제게 특별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특별합니까?"

" 네?"

내가 되묻자 샛노란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그 색채는 햇살처 럼 온화한 색이었으나 형태만큼은 사냥에 도입한 맹수의 눈 같았다.

"제가 어째서 특별합니까. 저는 그대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그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턱 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했다. 어 려운 질문이었기에, 조금 긴 시간 이 지난 끝에야 입을 열 수 있었 다.

"라이너는 제게 있어 가장 믿음 직스러운 사람입니다."

라이너의 올곧음과 강직함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향해 환히 웃었다.

"전장에서 뒤를 맡길 사람을 고 르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라이

너를 선택할 겁니다. 라이너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금안이 미묘하게 일렁였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한번 보죠."

라이너가 내 앞으로 손을 내밀 었다.

"손, 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요청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거부감 은 조금도 없었다.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감싸고, 간지러 운 온기가 퍼져 나갔다.

"카슈미르가 말하는 특별함은 이렇게 손을 잡아도 괜찮은 특별 함입니까?"

나는 겹쳐진 손을 잠시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라이너와 손을 잡은 적은 이번 이 처음이 아닌 데다, 라이너의 손은 추운 날엔 내가 먼저 잡고 싶어질 만큼 따뜻했다. 이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럼 이건."

굵은 손가락이 손 틈새를 천천 히 헤집고 들어와 깍지를 끼자, 손이 빈틈없이 꽉 맞물렸다. 나는 조금 눈을 굴리다 고개를 끄덕였 다.

"괜찮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지만.

라이너가 낮게 웃음을 뱉었다. 늘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속눈썹이 사르륵거리고, 눈을 감 았다 뜬 라이너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좁혔다. 그는 손등에서 멈 추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뺨을 내 팔에 스치며 점점 더 올라왔다. 그 감각이 꼭 뱀이 몸을 타고 올

라오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이상 했다.

라이너의 얼굴이 어깨선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 근방에 닿았다. 뜨 거운 숨결이 예민한 살갗을 간지 럽혔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의 뜨거 운 열기가 내 숨을 모조리 증발시 켜 없애 버리는 것 같았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가운데,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직시했다. 내가 아끼는 올곧 은 눈빛이 지금만큼은 어쩐지 형 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는데도 목덜 미 근처에 얼굴을 둔 그가 눈치챌 까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있을 때.

축축한 살덩이가 기사단 정복이 채 가리지 못한 목덜미의 예민한 살갗을 살짝 핥아 올렸다.

"그럼 이런 것도 해도 됩니까."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깍지 낀 손을 희미하게 바르작 거리자 손을 잡은 악력이 더욱 강 해졌다. 내 목덜미를 물끄러미 바 라보던 라이너가 나직하게 웃으며 다른 쪽 손끝으로 목을 훑었다.

"붉군요. 깨물면 달 것 같습니 다."

그 속삭임에 나는 어쩔 줄 몰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라이너에겐 혀가 아릴 듯한 달 콤함이나 화려한 미사여구 같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에겐 담담한 솔직함과 앞뒤 가리지 않는 대담함이 있었 다. 순수하고 악의가 없어 더 자 극적 이었다.

"깨물어 봐도 됩니까?"

정직한 물음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기이하게 들썩이 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 괴로

웠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얽힌 손 의 악력은 내가 내치려 하면 얼마 든지 내칠 수 있는 힘이었고, 거 절 한마디만 해도 라이너라면 곧 바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괴로우 니, 분명 내치거나 거절하면 될 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 았다.

내가 가장 믿는 사람. 내가 위험 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를

얼굴이, 그의 숨결로 자꾸만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라이너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곁눈질로 보게 된 그의 송곳니는 꽤나 날카로웠다. 짙은 로즈우드 향에 정신을 빼앗겼던 걸까, 그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을 때.

"......역시 아직은 아닌 것 같군 요."

한숨을 뱉은 라이너가 얼굴을 물렸다.

"조금 더 뒤가 좋겠습니다. 카슈 미르가 직접 해 달라고 할 수 있 을 때."

라이너는 몸을 가뿐히 일으키곤 깍지를 풀었다. 떠나가는 온기가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내가 멍 하니 올려다보자, 라이너는 부드 럽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껜 직접 가서 서류를 받 아 오겠습니다. 카슈미르는 쉬시 죠."

짧게 목례 하고 멀어지는 뒷모 습이 지나치게 단정했다. 아니, 무언가 꾹꾹 눌려 넘치기 직전인 데도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라이너는 방문 앞에서 잠시 멈 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 보았다.

"붉은 얼굴이 너무 예뻐서...... 더 했다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 습니다."

금안이 선득하게 번뜩이다 말끔

하게 휘어지며 가려졌다. 라이너 의 혼치 않은 눈웃음은 분명 두 눈이 멀 정도로 아름다운데, 어쩐 지 눈빛을 감추기 위한 가면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라이너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텅 빈 방엔 나 홀로 남았다. 뻣뻣 하게 곧추세우고 있던 허리에서 반자동적으로 힘이 풀리며, 나는 소파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팔로

두 눈을 가렸다.

'아인하르트는...... 다 짓궂나 봐......

화끈한 얼굴은 아직도 가라앉을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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