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노아의 부관으로 지낸 지 2주가 되어 갔다.
그간 나는 황궁 기사단의 훈련 관으로서의 생활에 거의 익숙해졌 다.
아직까지도 나를 적법한 훈련관 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사들이 몇 몇 있긴 했지만, 대놓고 불만을 표하며 훈련을 거부하는 이들은
없으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으 리라.
'오늘은 어떤 마수를 데려오셨습 니까?'
'으...... 제발 키피라만 아니면 좋겠습니다. 환각은 정말 끔찍합 니다.'
나흘째부터는 마수를 직접 포획 해 와 곧바로 실전에 돌입하기 시 작했다.
진도가 너무 빠르긴 했지만, 시 간이 없는 데다 여차하면 내가 마
수를 통제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 었다. 만에 하나 나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가까이 에서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있었다.
'혹시 수업 끝나고 시간 되시면 제 자세 좀 봐주시겠습니까?'
'훈련관님! 기사들끼리 식사하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시죠!'
'검을 새로 사야 하는데...... 훈 련관님은 마수 토벌하실 때 주로 어떤 검을 사용하십니까?'
아직도 나를 껄끄럽게 보는 몇
몇을 제외하곤 다들 내게 잘 대해 주었다. 덩치 산만한 기사들이 10 대 청소년처럼 수줍게 다가오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사교계는 지겹기만 했는데, 기사 들과 어울리는 것은 굉장히 재밌 었다. 나는 그들과 기꺼이 어울리 며 오랜만에 단체 생활의 즐거움 을 만끽하고 있었다.
스승님과 지그문트, 나까지 셋이 서 함께 다닐 때 이후로 처음 느 껴보는 것이었다.
"훈련관님. 대련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내 일상엔 한 가지 독특한 일과가 추가되었다.
날 향한 푸른 눈이 세차게 번뜩 였다.
나는 야차 같은 기세로 성큼성 큼 다가오는 인영을 익숙하게 바 라보다 그녀의 뺨을 보곤 죄책감 에 침음을 삼켰다.
'어제 적당히 해야 했나.'
카시아의 뺨은 어제 나와의 대 련에서 땅바닥을 신나게 구른 탓 에 팅팅 부어 있었다.
첫날 내게 완패한 카시아는 그 날 이후로도 계속해서 내게 대련 을 신청했다. 연거푸 패배하면서 도 지치지 않고 말이다.
'키피라 세 마리를 한꺼번에 처 리하긴 무리일 것 같은데. 도와드 릴까요.'
'......됐습니다. 제가 합니다.'
짧은 시간 동안 본 카시아는 첫
인상 그대로 자존심 강한 사람이 었다. 기사단의 규율을 아슬아슬 하게 넘지 않는 선에서 독선적이 고 개인주의적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카시아를 어려 워했다.
'야, 카시아! 너 상처 치료!'
'됐어.'
그나마 기사단 내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제인이 유일했으 나 카시아는 그에게조차 차갑게 굴었다. 제인이 안쓰러워 보일 정 도였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나 한테 져도 계속 달려드네.'
대련을 신청하는 것도 자존심 상할 테니 몇 번 하다 말 거라고 생각했건만, 끈질기게 덤벼드는 카시아는 내게 패배하고서도 무척 담담해 보였다.
패배할 걸 알면서도 달려드는 그녀는 무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해 보였다.
'원래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건
지, 나한텐 져도 괜찮은 건지.'
여전히 카시아는 속을 알 수 없 는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귀족을 싫어하는 건 지 직접 물어볼까도 싶었지만, 아 직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 물 어봐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 다.
"다친 곳은 아프지 않으십니 까?"
내 물음에 나를 시리게 노려보
던 카시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 는 무심하게 제 뺨을 쓸었다.
"그냥 좀 부은 것뿐입니다."
"약은 바르셨습니까?"
"아뇨. 아직...... 지금 그게 중요 한 건 아니잖습니까?"
홀린 듯 내 물음에 답하던 카시 아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또다시 날을 세웠다. 그 모습이 도도하고 앙칼진 고양이 같았다.
"중요합니다. 큰 상처가 아니라 고 얕보았다가 덧나면 어쩌려고.
돌아가서 꼭 치료해야 합니다."
나는 무심코 카시아의 부은 뺨 을 손끝으로 쓸었다.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친 카 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실수했다 는 걸 알았다.
"함부로 만져서 죄송......
"제가 다친 것과 훈련관님이 무 슨 상관입니까?"
빙하처럼 차가운 색의 눈동자를
둘러싼 날카로운 눈매가 더욱 치 솟았다.
착각일까, 그렇잖아도 부어서 발 갛던 뺨이 더 달아오른 것 같았 다.
"매일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귀 찮게 달려드는 놈이 다치면 좋은 거 아닙니까?"
분명 예민하기 짝이 없는 투임 에도 어쩐지 울적하게 들리는 목 소리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러게. 카시아가...... 이상하게 싫진 않네.'
그녀의 부어오른 뺨을 보면 고 소하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나한테 잔뜩 날을 세운 채 덤벼드는 카시아인데도.
카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 는,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저는 경이 싫지 않습니다."
"••••••왜!"
"경도 마찬가지잖습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확신했다.
"절 싫어하지 않으신다는 거 압 니다."
카시아가 미르를 좋아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인 내게 단단히 실 망을 해 버린 것 같지만, 그럼에 도 카시아가 날 진심으로 증오하 진 않는다는 것 역시 짐작하고 있 었다.
'내가 정말 싫었다면 얼굴을 보
지도 않으려 했겠지. 이렇게 매일 매일 대련을 신청할 것이 아니 라.'
사람이 누군가를 정말 증오하면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 흐]지, 매일 찾아오지는 않았다.
"매일 저와 검을 맞대려고 하시 는 걸 보아...... 저를 제법 좋아하 시는 거 아닙니까?"
내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카시아 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 아올랐다.
"누가! 누굴 좋아합니까! 그, 그 런 불합리하고 야비한 심리적 공 격에 제가 무너질 것 같습니까!"
카시아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쳤 다.
내가 말을 꺼낸 순간 카시아는 표정부터 자세까지 싹 다 무너졌 으나,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안 그래도 붉은 얼 굴이 정말 터져 버릴지도 모르니 까.
"오,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습니 다. 하지만 내일도 그런 조잡한 심리전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다 면 큰 오산입니다!"
카시아는 쥐고 있던 검을 거칠 게 검집에 쑤셔 넣더니 내게 손가 락질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내 휙 돌아 달려가 버리는데, 바람에 마구 흐트러지는 검은 단 발 새로 보이는 목덜미가 금방이 라도 터질 것처럼 붉었다.
"저거 봐요. 나쁜 놈은 아니라니
까요."
카시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 었을까, 어느새 성큼 다가온 제인 이 내게 시원한 물이 든 잔을 내 밀었다.
어느덧 가까워진 그는 내게 굉 장히 친근하게 굴었고, 나 역시도 그게 싫지 않았다. 나는 잔을 기 꺼이 받아들고선 물을 들이켰다.
"저놈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게 될 줄 몰랐는데 훈련관님 덕 분에 보게 되네요."
제인은 살갑게 말을 걸며 낄낄 거렸다. 그 얼굴은 꽤 짓궂어 보 였지만, 잿빛의 두 눈에서는 분명 히 카시아를 향한 친애가 보였다.
"제인 경은 카시아 경을 많이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본 제인은 사람 대 사람의 예의라기엔 과할 만큼 카시아를 생각하고 챙겨 주었다.
들고 있던 자신의 물병을 매만 진 제인이 나직하게 읏었다.
"기사단에 같이 입단한 동기니 까요. 아시다시피 기운이 심상치 않은 녀석 아닙니까. 거기에 끌려 제가 먼저 다가갔죠. 저는 그 녀 석을 소중한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녀석은 절 신경 쓰 기나 할지."
웃는 얼굴과 다르게 말투엔 씁 쓰름한 기운이 감돌았다. 잿빛 눈 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카시아 경도 제인 경의 정 성을 알아줄 날이 올 겁니다."
"하하. 그건 너무 큰 바람이 아 닌가 싶군요. 저는 그 녀석이 탈 선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 각합니다."
내 혼신을 다한 위로에 제인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가볍게 대답 했다.
제인은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사단에 갓 입단해 모르는 것이 많은 나를 여러 방면으로 도와주 었다.
유들유들하고 얼굴도 훤칠한 데
다 유머 감각도 뛰어난 제인을 많 은 이들이 좋아했으나, 그는 기묘 하게도 모두가 꺼려 하는 카시아 와 붙어 있곤 했다.
"카시아 경이 그런 정성을 몰라 준다 해도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제인이 나를 돌아보 았다. 따사로운 오렌지색을 담은 머리칼을 긁적인 그가 환히 웃었 다.
"네.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요."
보답을 원치 않는 호의는 쓸쓸 하지만 반짝거렸다. 카시아는 참 좋은 사람을 얻은 것 같았다.
"......제가 카시아 경을 한 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아, 그러시겠습니까?"
내가 나서자 제인이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 다.
요 근래 들어 카시아라는 사람 이 궁금하긴 했다. 워낙 거칠게
내 삶에 파고든 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가장 걸리는 건 따로 있 었다.
'대체 어디서 본 거지?'
이전에 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가물가물한 기시감만 이어지고, 이렇다 하게 잡히는 것이 없었다. 계속 답답했던 나는 오늘 아예 그 녀를 붙잡고 우리가 전에 어디서 만났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나는 제인의 인사를 뒤로 하고
카시아가 뛰쳐나간 쪽으로 가며 그녀의 기척을 따라 그녀를 좇았 다. 조금 집중하면 추적쯤이야 어 렵지 않았다.
황궁 복도를 가로질러 얼마나 발걸음을 옮겼을까.
나는 앞쪽에서 카시아를 발견했 다.
'......왜 심각한 얼굴이지?'
그녀를 부르려던 나는 멈칫했다. 카시아는 야차 같은 낯을 한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말을 걸면 사람을 찢어 죽일 기세 였다.
카시아가 왜 저러나 싶어 주위 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녀가 등 을 기댄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 소리에서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 었다.
"......주제에 훈련관이라고 설치 는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결국 기사단장님이 편의를 봐주셔서 들 어올 수 있었던 거면서 말이야."
'호오.'
한마디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내 욕이라는 걸. 나는 헤죽 미소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 다.
'내일 죽도록 굴려 주지.'
뒷담을 늘어놓을 힘도 없을 정 도로 훈련을 시켜 두면 조용할 터 였다.
"꼬맹이 설명이나 듣고 있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던지."
"훈련 중에 진짜 마수 푸는 게 말이 돼? 마수 피가 묻은 옷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데!"
욕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 였다. 내일은 하라바나를 데려오 고 싶은 욕망이 불쑥 얼굴을 내밀 었지만 꾹 참았다.
"뭐, 사실 용병 미르의 업적이 좀 과장되긴 했잖아? 결국 마수 좀 잡은 것뿐인데 영웅은 과하지. 그런 사람이 무슨......
콰앙!
"히 익!"
"꺄악!"
거친 소리와 함께, 옹기종기 모 여 있던 기사들의 앞에 검이 꽂혔 다.
터벅터벅.
모두가 기겁하는 가운데, 벽 뒤 에서 모든 걸 듣고 있던 카시아가 그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지 그래."
카시아의 푸른 눈은 어딘가 맛 이 가 있었다. 그 공포스러운 기 운에 기사들이 빠르게 서로의 눈 치를 봤다.
"야, 우리가 네 욕을 한 건 아니 고......
"감히 내 앞에서 그분을 욕해!"
촤악.
바닥에 꽂힌 검을 거칠게 뽑아 낸 카시아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지켜보던 나까지도 식은땀이 나는 무서운 얼굴이었고, 뒷담을 늘어 놓던 기사들은 덜덜 떨고 있었다.
사람 여럿 찢어 죽일 기세이던 카시아는 분노로 거세진 숨을 고 르다 이내 심호흡을 했다. 뭔가를 억누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오늘은 넘어가 주지. 하지만 한 번만 더 그분에 대해 함부로 논하 다 내게 걸리면......
카시아가 검을 세웠다. 좁은 창 틈새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
오는 햇빛을 받아 그녀의 검날이 요요하게 빛났다.
"그땐 나랑 같이 죽는다고 생각 해.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를 위해 화내 주는 건가?'
나는 나를 욕하던 이들에게 단 단히 경고하는 카시아를 보고 있 자니 기분이 묘했다. 나를 짓밟으 려 하면서도 지켜 주는 것이 참 모순적이 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
"O 으I"
' 9 O *
카시아의 손짓에 위축되어 있던 기사들이 황급히 도망쳤다. 헐레 벌떡 도망가는 모습이 참 추하고 우스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이내 부러 인기척을 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훈련관님?"
발걸음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 여 날 돌아본 카시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입이 경악으로 떡 벌어졌다.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음. 저들이 나를 욕하다 카시아 경에게 저지당하는 것까지."
내 대답에 카시아의 얼굴이 순 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이전보다 더 진하게. 오늘 그녀의 익은 얼 굴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잠시 어버버하던 카시아는 이내 이를 악물고 검지로 나를 똑바로 가리켰다.
"다, 당신은! 욕해도 내가 욕하 고 때려도 내가 때립니다!"
괴상한 소유욕인지 서투른 상냥 함일지 모를 것을 가감 없이 드러 낸 카시아가 내게서 휙 몸을 돌렸 다. 그 모습이 대단히 귀여워 보 였던 건 내 눈이 맛이 가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용병 미르를 무너뜨리는 건 납 니다! 그러니 목 닦고 기다리고 계세요!"
이 말을 끝으로 카시아는 도망 치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끝내 웃음 을 터트린 나는 생각했다.
아마 저 날 선 가시만 견뎌 내 고 나면, 좋은 친구를 갖게 될지 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