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훈련관님! 오늘 북서쪽 거리에 새로 개장한 레스토랑에 다 같이 식사하러 가려는데 함께 가시겠습 니까?"
오전 훈련이 끝나고, 벗어 두었 던 제복 재킷을 다시 꿰어 입는 내게 갈색 머리의 기사, 오스틴이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문득 기 사단 사이의 공백을 확인했다.
'카시아, 끝까지 안 오는구나.'
괴상한 소유욕인지 서투른 상냥 함일지 모를 강렬한 말을 들은 다 음 날, 카시아는 기사단에 출근하 지 않았다.
'오늘은 카시아 경이 몸이 좋지 않아 오지 못한다는군.'
노아는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일이 부 끄러워 오지 않는 것인가 잠시 생 각하기도 했지만, 대단한 기사 정 신을 가진 카시아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결근을 하진 않을 것 같았 다.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고 말이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걸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사이 정이 단단히 들었는지 그녀가 걱 정되었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오스 틴에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말입니
다. 경께서 맛있게 드시고 어땠는 지 말씀해 주시죠. 맛이 괜찮다면 제가 그곳에서 식사 한번 사겠습 니다."
"아, 그렇군요. 아쉽지만...... 기 대하고 있겠습니다!"
얼굴의 주근깨가 쫙 펴질 정도 로 순박하게 웃은 오스틴이 기사 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떠나는 그들에게 손을 혼들어 주 곤 한 번 더 옷매무새를 정리했 다.
선약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주머니에 잘 넣어 둔 편지 를 만지작거리며 그 내용을 떠올 렸다.
[친애하는 슈슈. 아니, 이제 훈 련관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뒤늦 게 축하를 건네네. 요 근래 그대 의 명성이 황궁 내에서 자자하더 군. 아주 잘하고 있다며. 역시 그 대다워. 그대는 내 자랑이네.
우리 마지막 대귀족 회의 이후 로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 그대도 나도 바빴으니 이해하네.
그간 그대를 보고 싶어 기사단 에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대를 곤 욕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참 았네.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남는 날엔 괜히 기사단 주위를 어슬렁 거리기도 했는데, 우연은 나를 도 와주지 않더군. 그래서 결국 바쁜 일이 정리된 지금에서야 편지를 보내게 되었네.
길게 변명하지 않겠네. 그대가 보고 싶어. 나를 보러 와 줘.]
발신인은 디에고 솔라티네였다.
어제 오후 퇴근해 이 편지를 받
은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알겠다고 답신했다. 나 또한 디에 고가 그리웠으니까.
오늘은 디에고와의 티타임 약속 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이젠 익숙해진 황궁의 복 도를 가로지르며 가볍게 콧노래를 불렀다. 화창한 날씨가 내 기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디에고에게 해 줄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고르던 찰나.
'어.'
나는 앞쪽 코너에서 익숙한 기 운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 졌다. 마찬가지로 내 기운을 느꼈 을 게 분명한 상대는 속도를 높여 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상대를 기다렸다.
"슈슈."
상대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 으니까.
심연을 한 줌 퍼 올려 실로 자 아낸 듯 검은 머리칼. 고혹적인 장미보다 더 매혹적인 붉은 눈. 뒤를 따르는 호위 기사 한 명 없 이 단신으로 다니는 모습은 그의 고고한 자존심을 드러냈다. 나는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어디 가는 길이십니 까?"
내 아버지, 카이사르 크리시스였 다.
서늘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 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단번 에 겨울에서 봄으로 변하는 카이 사르의 표정에서 나는 그의 사랑 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이 제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같이 갈 테냐."
카이사르가 손을 내밀었다. 붉은 두 눈이 묘하게 기대로 반짝이고 있어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약속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황태자 저하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황태자?"
카이사르의 표정이 굳었다.
"황태자와 무슨?"
"함께 티타임을 갖기로 했습니 다."
눈앞에서 저글링을 하는 바퀴벌 레를 봐도 그렇게까지 얼굴이 일 그러질 순 없을 것 같았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은 카이사르는 상체를 숙여 내 귓가 에 속삭였다.
"황태자가...... 혹시 권력으로 네게 강제하는 건 없느냐."
"네? 그럴 리가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오 늘 이 약속도, 너도 모르는 새에 세뇌를 받아서 승낙한 게 아니더 냐."
"누가...... 저를 세뇌했다고요?"
나는 떫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사 는 집에 침입해 소드 마스터를 세 뇌하는 건 드래곤을 이쑤시개로 잡는 것과 비슷한 난이도였다.
카이사르도 말도 안 되는 소리 라는 건 아는지 제 머리를 마구 헤집더니, 이내 찝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네가 원해서 만나는 것이 맞지?"
붉은 두 눈에 낮게 깔린 것은 걱정이었다. 카이사르는 내가 강
제로 하는 것이 있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 과하고도 간지러운 걱정에, 나는 나직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하기 싫은 것이 있 다면 당신께 말하라고 하신 것 잊 지 않았습니다•"
내 확신 어린 대답에 카이사르 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의 큰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칼 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 손을 익 숙하고도 기껍게 받아들였다.
"네가 즐기는 것이라면 되었다. ......즐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끝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나는 그 말의 의도를 몰라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 으로 그를 향해 환히 웃어 주었 다.
"그럼 오늘 저녁 식사는 함께할 수 있느냐? 아리아가 요즘 네가 많이 바쁘다고 섭섭해하던데."
"물론입니다. 저녁은 함께해야 죠. 최대한 늦지 않게 들어가겠습
니다."
카이사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인을 전장에 보내는 사람처럼 애절한 눈으로 몇 번이고 나를 뒤돌아보 며 떠났다.
'이거 조금 늦을 것 같은데.'
약속 시간을 여유롭게 잡았는데, 카이사르와 복도에서 너무 오래 얘기한 탓에 시간이 촉박해져 버 렸다. 나는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곤 빠른 걸음
으로 황태자 궁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지나 약속 장소에 다다랐다. 디에고의 사무실 앞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짧은 진녹색 머리칼에 베이지색 눈동자. 여전히도 뻣뻣하지만 어 쩐지 평소보다 순해 보이는 표정.
"오랜만이네, 엘러바인 경."
디에고의 가장 충직한 호위 기 사, 페퍼 엘러바인이었다.
"......크리시스 공녀님, 아니. 크 리시스 경."
베이지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 이던 그는 이내 꾹 입을 다물었 다. 페퍼는 무척 난감해 보였다.
그 낯선 태도에 나는 눈을 끔뻑 였다. 내 앞에서 늘 앙칼진 고양 이같이 굴던 페퍼가 오늘은 순한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번엔 조용하군. 하던 대로 안 하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맨날 그러지 않았나. 제가 지켜 보고 있습니다! 쿠키 좀 챙겨 주 신다고 제가 마음을 열 거라고 생 각하신다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저는 끝까지 공녀님을 의심......!"
"그, 그만두십시오!"
목소리를 억지스럽게 내리깔며 평소의 페퍼를 따라하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황급히 나를 제지했다. 나는 어쩔 줄 몰 라 하는 그를 보며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늘 날카롭던 페퍼의 새로 운 모습이었다.
디에고에게 과잉 충성을 바치는 페퍼는 마지막 만남 때까지도 나 를 의심했다.
정이 든 건지 두 눈으로는 나를 향한 신뢰를 보이면서도, 입으로 는 꾸준히 자신만큼은 나를 완전 히 믿지 않을 거라며 행동 조심하 라고 경고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풀이 죽은 건지, 뭔지.'
페퍼는 왠지 모르게 곤란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눈엔 후 회와 수치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 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 켜보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답지 않게 순하게 구나. 심 경의 변화라도 있는 겐가?"
내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페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흑역사를 떠올린 듯한 표정이었다.
"공녀님께서 용병 미르인 줄 알 았다면 그렇게 거칠게 말하진 않 았을 겁니다."
나는 짧게 탄식을 뱉곤 눈을 굴 렸다.
정작 미르로 왕성하게 활동할 땐 너무 바빠서 주위를 둘러볼 시 간이 없었는데, 요 근래 들어서야 미르로서의 영향력을 체감하고 있 었다. 기사들이란 기사들은 모두 존경을 표하는데 그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조금은 부끄럽고 부담스럽 기도 했다.
"그대...... 나를 좋아했나?"
나는 어색하게 물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식히던 페퍼가 크게 멈칫하며 나를 바라 보았다.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무슨 황태자 저하 앞에서 할복하며 죄송하다고 복창해야 하 는 소리입니까? 제가 크리시스 경을 좋아했냐고요? 정말, 그 건...... 너무도 무엄해서......
"아니, 그게 아니라, 용병 미르 를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했냐는 물음이네."
" 아."
무어라 주절거리던 페퍼가 탄식 했다. 베이지색 눈동자를 이리저 리 굴리던 페퍼는 머쓱하게 제 목 덜미를 긁적였다. 드러난 목덜미 엔 열꽃이 번져 있었다.
"그...... 많이 좋아한 건 아닙니 다. 그냥 보이는 영상구마다 사고 가끔 업적을 찾아보며 검술을 따 라 해 본 것뿐입니다."
"오••...
그 정도면 많이 좋아하는 거 아 닌가 싶었으나, 그걸 언급했다간 페퍼가 또 버럭 소리칠 것 같았기
에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믿어 주는 겐가?"
"아뇨. 완전히는 아닙니다."
페퍼가 또 눈을 치켜떴다. 새초 롬한 표정을-그 딴엔 정색이었겠 지만- 지은 그는 홱 고개를 돌렸 다.
"크리시스 경이 끝까지 의심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황 태자 저하의 호위 기사로서 2황 자의 스승이자 공녀인 당신을 계
속 경계할 겁니다."
베이지색 눈이 나를 힐끗 돌아 보았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 다.
"......하지만 인간인 당신은 조 금 믿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누군가의 신뢰를 얻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 는 불가항력적으로 환하게 웃었 다.
내 주위엔 수줍은 이들이 많았
다.
"크흠. 저하께서 기다리시겠군 요. 가보시죠."
페퍼가 문을 열어 주려는 듯 손 잡이에 손을 올렸다. 문고리를 돌 리려던 그는 문득, 돌리다 말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건 호위 기사로서 주 제넘은 발언입니다만."
그의 두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 했다.
"저하께서는 몰라봐 주어도 된 다며 경께 알리지 않을 거라고 하 셨지만, 저는 경께서 아셨으면 좋 겠습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디에고가 나 몰래 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크리시스 경을 훈련관으로 삼 는 것에 대해 귀족 사교계에서 부 정적인 여론이 있었습니다. 그중 반은 아리아 크리시스 공녀님께서 잠재우셨다면......
페퍼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 다.
"다른 반은 황태자 저하께서 잠 재우셨습니다."
벌컥.
"황태자 저하. 크리시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창틀을 짚은 채 창밖을 바라보 는 인영은 나른한 오후의 햇빛에 휩싸여 신비로워 보였다.
그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로 가 벼운 차림이었는데, 셔츠 소매를 팔꿈치 부근까지 접어 올려 단단 한 팔이 보였다. 오른쪽 팔뚝에 채운 검은 암가터의 버클이 햇빛 을 받아 반짝였다.
금실처럼 빛나는 황금색 머리칼 이 허공에서 가볍게 나부끼고, 인 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푸른 눈이 날 향해 휘어졌다.
"왔나, 슈슈."
햇빛 아래서 그보다 더 환한 미 소를 짓는 남자는, 디에고 솔라티 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