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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06화 (206/254)

206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페퍼가 나가고 단둘이 남았을 때,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터벅터벅.

창틀을 짚고 있던 손을 뗀 디에고 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흔들리는 황 금빛 머리칼은 가을 녘 추수를 앞둔 잘 익은 벼 같았다.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맞춰 보게."

내 앞에서 우뚝 멈춰 선 디에고가 상체를 훅 숙였다. 후각을 잠식하는 바닐라 향에 느리게 숨을 들이쉰 나 는 피식 웃었다.

"그대가 없어 평안치 못했다, 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오 랜만에 만날 때면 디에고는 자주 찾 아 달라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그리 대답했으니까.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자연스럽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른 디에고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나는 조금 놀랐으나 그는 대단히 태 연했다. 디에고는 나를 소파에 내려 주었다.

"그대가 없어 평안치 못했네. 그리 웠어, 슈슈."

소파 팔■걸이를 짚은 디에고가 그림 자 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웃었 다.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일하느라 바 빴던 것이니 부디 용서하시지요"

"그래. 그대의 수고야 잘 알지. 황 태자인 나로서는 자랑스럽고 기꺼워 하고 있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디에고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의 책상으로 향한 그는 새 잔 에 홍차를 한 잔 따르더니 내게 건넸 다. 나는 살짝 묵례하곤 잔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인간인 나로서는 그립고 섭섭한데 어쩌겠나. 조금의 투정 정 도는 용서해 주게."

느긋하게 제 잔을 든 디에고가 능 청스럽게 말하며 다른 한 손으로 등 뒤의 책상을 잡고 기대었다. 늘 철저 하고 완벽하던 디에고는 내 앞에선 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셨잖습니까."

"아아. 그랬지. 전쟁을 앞두고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같이 불어나서 바 쁘게 지냈네. 서신에 보냈던 대로 이

제야 좀 안정된 참이고."

피곤이 물든 낯으로 미간을 꾹 누 른 디에고가• 체력 회복 물약 마시듯 홍차를 들이켰다. 이내 나를 슬쩍 돌 아보는 그의 푸른 두 눈이 흥미로 반 짝였다.

"그대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네, 훈련관."

"이미 많이 놀림받았으니 그만두시 죠."

"하해 축하해 주려 한 거야. 제대 로 인정받고 있는 듯하니까."

이미 여기저기서 훈련관님, 훈련관 님 하며 놀림을 받은지라 질린 표정 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디에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 며 부드럽게 덧붙였다.

"다만 카시아 경과 불화가 있다는 소문은 들리더군. 괜찮은 건가?"

"그게...... 디디 귀까지 들어갔군 요."

나는 민망함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디에고가 귀 기울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카시아와 있었던 일을 풀어놓

았다.

"그럴 만하군. 카시아 경다워."

이야기를 다 들은 디에고는 알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아 와 친분이 있어 보이는 어투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시아 경을 아십니까."

"그래. 아, 이건 다른 이들에겐 비 밀이네만•••...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운 디에고가 유려하게 미소 지었다.

"몇 년 전부터 형편이 어려운 기사 들을 익명으로 후원하고 있는데, 카 시아 경이 그중 한 명일세."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그럼, 기사단의 평민 기사들이 도 움을 받았다는 수많은 호칭의 익명 후원자가••...

"그래. 나네."

디에고의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반 짝였다.

평민 기사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것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제 국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배울 시절에 익명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검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원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말이다.

'제 후원자님은 패트릭 님이시죠.' '제겐 론도 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앨리스 님입니다.'

수많은 이름이 기사들의 입에서 나 왔다.

기사들은 그 기묘한 현상을 일으킨 장본인이 단 한 명이라는 것은 서로 대화를 통해 공통점을 찾아내며 유추 해 냈지만, 아직까지도 후원자의 정 체는 밝히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후원자라는 사람 을 꼭 맨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디에고였을 줄이야.'

체면과 명예를 위해 소문을 내 가 며 기부하는 귀족들은 많았으나, 익 명으로 기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나는 디에고가 존경스러워졌다.

"......예전에 내 호위 기사에 대해 얘기한 적 있는데, 기억하나? 페퍼 엘러바인 이전의 호위 기사 말이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디에고는 미묘 하게 웃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과 거를 되짚어 보았다.

'어려서 친구가 하나 있었지. 평민 출신인 호위 기사였지만 분명 친구라 고 생각했어. 몇 년간 그 아이와 함 께 형제처럼 지냈는데, 어느 날 누군 가 내 잔에 독을 탔지. 범인은 그 아

이라더군.'

'......아.'

'돈이든 뭐든 암살을 의뢰한 인간보 다 내가 더 많이 줄 수 있는데 왜 그 런 짓을 벌였냐고 물었는데...... 그냥 처음부터 내가 싫었다더군. 내 모든 것이...... 질투 나고 싫었다고 내게 보여 준 모습은 다 거짓이었다고 했 네. 그 이후론 호위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꺼려지더군. 나를 지켜 주는 이 들은 하나같이 내 뒤를 노리고 있을 것 같아서.'

디에고가 온갖 암살 위협을 받으면 서도 호위를 꺼려 하는 이유가 그곳

에 있었다. 그는 다시 배신 당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니 먹먹해져 울 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디에 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꼬리를 휘었다.

"그 아이는 가난했지. 내가 싫어서 그랬다곤 했지만, 나는 그 아이의 할 머니가 직장에서 잘리며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게 더 컸을 거라고 생각하 네. 그때 사건 이후부터 평민 기사들 을 돕기 시작했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니까."

증오를 증오로 풀지 않고, 더 나은 것으로 승화시키는 건 멋진 일이었 다

"카시아 경은 내가 후원하는 기사 들 중에서도 가장 힘든 상황이네. 아 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어려서부터 혼자 버티 며 살아온 모양이야. 귀족을 싫어하 는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더 군."

씁쓸한 눈빛을 하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미워하진 말게. 보내지 않 아도 괜찮다고 해도 매월 후원금 사 용처를 꼬박꼬박 보내오는데, 매 지 출 내역마다 미르 전투 촬영 영상구 가 있는 게 제법 웃겼거든."

묘하게 짓궂은 투였다.

내가 놀리지 말라는 뜻으로 미간을 좁히자, 능글맞게 눈을 굴린 디에고 가 내 옆에 앉아 어깨동무했다.

"그대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 질 투 나지만 동시에 기쁘네. 그대를 독

점하고 싶으면서도 널리 자랑하고 싶 어. 가끔은 전자가 더 커지지만...... 그래도 그대의 행복이 최우선 순위인 건 여전해."

푸른 눈이 곱게 휘었다.

"내가 늘 그대를 응원하고 있음을 알겠지? 그대는 앞만 보고 나아가게. 내가 그대 곁에서 지키고 있으니."

수백 수천의 군대보다 더 든든한 한마디였다.

난 가슴이 벅차올라 맹렬한 눈빛으

로 디에고를 뚫어져라 바라보다-이때 부담스러운지 그의 귀가 살짝 붉어졌 다- 씨익 웃었다.

"디디가 저를 훈련관으로 삼는 것 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워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디에고가 탄식했다. 그가' 미간을 슬 쩍 찌푸렸다.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 았나. 엘러바인 경이 말했나?"

"아••...뇨 제가 알아냈습니다."

"사교계엔 관심이 하나도 없는 그 대가?"

페퍼를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 겨우 거짓을 내뱉었으나, 디에고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졌다.

"그대는 거짓말 정말 못하는 거 알 지? 엘러바인 경은 괜한 소리를 해 서......•"

"그게 왜 괜한 소립니까. 감사드려 야 마땅한 부분인데, 제가 모르고 있 던 걸 알려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 죠."

디에고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겉보기엔 무척 태연해 보였으나, 아 무래도 그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는 디에고는 쉽게 볼 수 없었기에 나는 히죽 웃었다.

"감사해서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 데요 원하시는 건 없으십니까? 호위 기사가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일정 을 빼서라도 돕겠습니다."

황태자로서 부족한 게 없는 디에고

에게 마땅히 줄 만한 것은 없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것이라곤 호위 기사 를 쉬이 신뢰하지 못하는 디에고를 위해 외부 활동에서 내가 그의 호위 가 되어 주는 것 정도였다.

내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려던 디에고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멈칫했 다

톡톡,

그러곤 검지로 제 왼뺨을 건드렸다.

"그럼 뺨에 입맞춤, 해 줄 수 있겠

나?"

그가 장난기 만연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눈을 끔뻑였다. 뺨에 입맞춤이 야 가끔 인사 차원에서도 하는 것인 데, 갑자기 이렇게 시키니 낯부끄러 웠다.

"어렵진 않습니다만, 그걸로 충분하 십니까?"

"충분하다마다."

디에고는 뻔뻔한 표정으로 제 뺨을 내게 가까이 했다. 새하얗고 고운 그

의 살갗은 실크 같았다.

"자, 해 주게."

그가 퍽 즐거운 목소리로 종용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닐라 향에 목울 대를 울렁인 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 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단둘뿐인 고요한 방 안이 괜히 신 경 쓰였다. 입술을 물었다 놓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상체를 기울였 다.

말캉한 느낌이 입술에 감돌았다. 맞 물리는 감촉은 피부와 거리가 멀었 다. 눈을 감았던 나는 의문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푸르른 눈동자가 짙게 일렁이고 금 빛 실낱들이 내 이마께를 간지럽혔 다. 맞닿은 입술이 낮게 웃음을 흘렸 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측면 이 아닌 정면을 보이고 있었다.

"뭐, 뭐......!"

나는 놀라서 꼬리에 불 붙은 다람 쥐처럼 황급히 물러났다. 거울을 보 지 않았지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 라 있음은 확실했다.

팔로 입을 가린 채 디에고를 올려 다보고 있자니, 그가 시원스럽게 웃 음을 터트렸다. 맨 위의 단추가 풀린 흰 와이셔츠 새로 보이는 목덜미가 붉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볼로는 만족 하기 힘들 것 같아서."

큰 손으로 소파를 짚은 디에고가' 상체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했다.

"이건 싫었나?"

꿀을 얇게 저며 바른 듯 달콤한 목 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푸른 눈동자는 깊은 바다의 수면인 양 일렁였•己 금빛 머리칼은 그 위의 금파처럼 흩날렸다. 깊고 짙은 그 분 위기가 한 번 잡은 것을 놓아주지 않 는 마의 삼각지대처럼 나를 옭아매었 다

싫었느냐고? 생각할 것도 없다. 싫 었다면 진작 오러를 꺼냈을 것이다.

"싫진•••••• 않았는데••••••

"뭐야."

낮게 웃은 디에고가 손을 뻗어 길 게 내려온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의 두 눈이 장난기로 반짝 였다.

"그럼 좋았나 보군."

그 말에 화끈 열이 오른 나는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 먼저 가 보겠습니다"

"하하! 어찌 그리 빨리 가는가, 섭 섭하게."

"빠, 빠른 시일 내로 또 찾아뵙겠습 니다"

나는 성큼 걸어 도망치듯 방에서 뛰쳐나왔다. 등 뒤로 울려 퍼지는 디 에고의 웃음소리가 얼굴을 더욱더 홧 홧하게 만들었다.

"무슨••... 광힙성이라도 하다 오셨 습니까? 얼굴이 빨갛게 익었는데

방 밖을 지키고 있던 페퍼가 멀뚱 하니 서서 눈치 없게 묻는 것을 들으 며,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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