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쨍쨍하던 해는 어느새 한풀 죽 고 은은한 오렌지색 햇살이 화려 한 황궁을 비추었다.
정원사가 얼마 전에 물을 준 건 지, 물기를 머금은 길가의 식물들 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제인 경? 기사단이랑 식사하러 간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디에고로 인해 붉어진 얼 굴을 겨우 진정시키고 복도를 걷 다가 제인을 발견하고 의아해져 물었다.
훈련이 끝난 지 시간이 좀 지나 긴 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다시 기사단에 돌아올 만큼 지난 건 또 아니었다.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 훈련관님. 가려고 했는
데...... 자꾸 신경 쓰이는 놈이 있 어서요."
제인은 봉투를 들고 있는 손을 움찔거렸다. 반투명한 봉투 안의 내용물이 미음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기사단 주변에 미음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있을 리 없으니, 저건 환자식인 게 분명했다.
"카시아 경에게 가 보려는 겁니 까?"
제인이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의 목덜미가 엷은 붉은색이었다. 그 는 갈팡질팡하는 기색이었다.
"그 녀석은 아플 때 밥도 안 챙 겨 먹을 성격이라...... 동료로서 신경 쓰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 상냥하니까요. 하하."
제인이 장난스레 웃어 넘겼다. 하지만 걱정으로 가라앉은 잿빛 눈동자는 단순히 동료를 생각하는 눈이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고 개를 갸웃했다.
'카시아한테 빚진 거라도 있나?'
눈치는 꽤 빠르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복잡한 감정들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가 보지 그러십니까. 카시 아 경도 고마워할 겁니다."
"글쎄요. 그 녀석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해서...... 괜히 갔 다가 미움만 받는 거 아닐까 싶습 니다."
하긴, 카시아라면 그러고도 남았 다.
'병문안을 왔다고? ......쓸데없는 짓을. 내 약한 모습을 보고 조롱 하려는 건 아니겠지. 됐으니 빨리 가라.'
그녀의 묘하게 꼬인 성격과 자 존심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이 런 대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 는 조금 수긍하면서도 한숨을 쉬 었다.
"하지만 아플 때 아무도 병문안 오지 않는 건 너무 속상하지 않겠 습니까."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는데, 돌 봐 줄 사람은 있는 건가.'
언제 이렇게 정이 들어 버린 건 지. 그녀를 향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고 내가 가기엔 주소도 모르고...... 가 봤자 혈압을 오르 게 해서 상태만 더 나쁘게 만들 것 같은데.'
내가 턱을 매만지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을까.
제인이 내게 미음이 담긴 봉투 를 내밀었다.
"훈련관님이 카시아에게 이걸 전해 주시겠습니까?"
" 제가요?"
"네. 제가 가면 듣지도 않고 내 보낼 것 같은데, 훈련관님이 가시 면 그래도 거들떠보기는 할 것 같 거든요."
제인이 활짝 웃었다.
"그 녀석은 훈련관님을 많이 좋 아하니까요."
대체 나를 얼마나 좋아했기에 여기저기에서 그녀가 나를 좋아했 다는 제보가 속출하는 걸까.
민망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해 주었던 사람을 속상하게 했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카시아 경의 집 주소. 알려 주 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만나야 했다. 관심이 지
나치다고 하더라도 카시아의 의중 을 알아내고 싶었다.
결심한 목소리로 묻자, 제인이 기꺼이 주소를 알려 주었다.
"제인 경도 같이 가지 않으시겠 습니까."
"......아뇨. 전 괜찮습니다."
제인을 두고 혼자 가기가 걸려 은근히 묻자, 그는 조금 망설이는 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많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그
녀석의 거부를 마주하는 건...... 조금, 힘들더군요. 그러니 됐습니 다. 그 녀석도 훈련관님만 가는 걸 좋아할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찝찝함을 느끼면 서도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 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냥 그 녀석한테 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고만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인은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였
다.
결국 수긍한 나는, 미음이 든 봉 투를 들고 제인이 알려준 주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시아가 사는 곳은 수도 북쪽, 중산층들이 많이 사는 주택가였 다. 내가 알기론 거주하기 나쁘지 않은 곳이었기에 조금 안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여기네.'
집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잠시 집을 바라보았다. 집은 빈말로도 크다 고 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았으나, 아늑하고 깔끔해 보였다.
똑똑.
"계십니까?"
문 앞에서 망설이던 나는 조심 스레 문을 두드렸다. 나무 문이 가볍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안쪽 에서 인기척이 훅 가까워졌다.
"어머니. 돌아오셨......
얼핏 들어도 갈라진 목소리가 울려 퍼지다, 이내 사그라졌다. 열에 들뜬 데다 초췌한 낯으로 문 을 열어 준 카시아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쩌적 굳었다.
"아, 카시아 경......
"젠장!"
쾅
코앞에서 문이 거칠게 닫혔다. 나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눈을
끔뻑였다.
'거절......인가?'
이런 세찬 거절은 또 오랜만이 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을까, 집 안에서 뭘 하는 건지 우당탕탕 소 리가 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이 벌컥 열렸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다시 열린 문 너머엔 정돈된 상 태의 카시아가 있었다.
헝클어졌던 검은 머리카락은 제 자리를 찾았고, 수척하던 얼굴도 세수를 한 건지 물기에 젖은 상태 였다. 잠옷에 가깝던 옷도 말끔한 와이셔츠로 변해 있었다.
"어...... 병문안, 왔습니다."
"......병문안 말입니까?"
나는 그 가공할 만한 변화를 신 기하게 바라보다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들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듯 눈을 크게 뜨던 카시아가 이내 얼굴을 구겼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제 약 한 모습을 보러 오신 겁니까?"
답은 예상했던 것과 거의 똑같 이 돌아왔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카시아의 귓가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참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야.'
여태껏 지켜본 결과, 카시아가 뱉는 말과 그녀의 속마음은 아예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나도 처음엔 그런 카시아를 대 하는 게 어려웠지만, 그녀는 입이 솔직하지 못한 대신 신체 반응은 확실했다.
그 덕분에 어느새 카시아의 속 마음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 었다.
'좋아하네, 병문안 와 줘서.'
그리고 나는 이번에 이렇게 읽 어 냈다.
"그래도 정성이 있으니 잠시 들
여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끼니 를 거를까 봐 이렇게 미음도 가져 왔는데요. 저를 그냥 보내려는 겁 니까."
나는 봉투를 더 높이 들어 보이 며 눈매를 축 늘어뜨렸다. 내 반 응에 카시아는 크게 흠칫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들여보내 주는 겁니까?"
"지금 집안이 좀 어질러진 상태 인데......
"뭐 어떻습니까. 저는 상관없는 데요."
내가 몰아붙이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카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문을 열어 주었 다.
" 이번만입니다."
그녀는 늘 뾰족한 가시를 세우 고 있었지만, 가시 안쪽에 손을 넣으면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지는 고슴도치 같은 사람이었다.
"집이 멋지네요."
카시아의 집에 발을 들인 나는 짧게 감탄했다. 카시아의 말대로 조금 어질러져 있긴 했지만, 더러 운 수준이 아니라 인간적인 흐트 러짐일 뿐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방의 벽에 걸린 무기였다.
장검, 단검, 활, 창 등등. 집 안 벽이란 벽엔 각종 무기가 걸려 있 었는데, 가정집이 아니라 무기 상 점 같을 정도였다.
"저희 어머니가 대장장이셨습니
다. 어머니의 작품들을 걸어 둔 거죠."
담담하게 말하는 카시아의 목소 리엔 묘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거기에서 카시아가 자신의 어머니 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실력이 상당하네.'
나는 슬쩍 무기들을 살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벼려진 무기 들은 얼핏 보아도 솜씨 좋은 대장 장이의 작품이었다.
"어머님 성함을 물어도 되겠습 니까?"
'이 근방 대장장이는 웬만하면 아는데. 게다가 이런 실력자라면 모를 리가.'
용병으로 일하다 보면 무기에 대한 정보는 듣지 않으려 해도 들 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수도에 서 일하는 대장장이라면 거의 모 두를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에녹, 이시죠."
하지만 들려온 이름은 내 귀에 어색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일 을 그만두신 지 꽤 되셨거든요. 훈련관님과는 활동 기간이 겹치지 않을 겁니다."
카시아가 담담하게 답하며 나를 테이블 앞 의자로 인도했다. 얼떨 결에 앉았던 나는 차를 내오려는 듯 꾸물거리는 그녀를 보고 황급 히 제지했다.
"됐습니다. 그냥 앉아 계시죠.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차 한 잔 못 내올 정도는 아닙 니다."
"아, 아프신 곳은 어딥니까?"
내 걱정에 발끈한 듯 카시아가 날카롭게 답했으나 나는 이를 받 아치지 않고 아예 휙 말을 돌려 버렸다.
카시아와 함께 지내며 얻은 팁 이었다. 그녀가 날카롭게 나올 땐 이에 대해 반박하며 감정을 돋우
지 말고 그냥 말을 돌려 버리는 것이 나았다.
내가 거리낌 없이 말을 돌리자, 카시아는 예상대로 조금 어버버하 면서 달라진 화제를 따라왔다.
"그냥 이 시기쯤 되면 감기 몸 살을 앓습니다. 많이 아픈 건 아 닌데 옮을까 봐 가지 않는 것뿐입 니다."
"이런. 고생이군요. 식사는 하셨 습니까?"
" 아직•..."
나는 미음을 꺼내 카시아 앞에 내밀었다. 음식은 다행히 아직 식 지 않아서 기분 좋은 온기를 만끽 하며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부터 드시죠. 아플 땐 끼니 를 거르면 안 됩니다."
내 단호한 말에 카시아는 할 말 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한숨을 쉬며 숟가락을 들었 다.
그녀가 검은 단발머리를 귀 뒤 로 넘기자 드러난 창백한 뺨은 끼
니를 잘 챙기지 않는다는 것을 티 내듯 살짝 패여 있었다.
"제인 경이 사서 전달해 달라고 하더군요. 모두가 널 걱정한다는 말도 함께요."
미음을 두어 숟가락 떠먹은 카 시아가 멈칫했다. 그녀는 얼마 지 나지 않아 평상시의 서늘한 표정 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제인을 언 급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 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오지랖으로 들리겠지만, 제인
경에게만큼은 조금 너그럽게 대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대에 대 해 늘 마음 쓰더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의 관계에 신경을 쓰는 건 무 례하고 멍청한 짓임을 알고 있지 만 한 번쯤은 꼭 말해 주고 싶었 다. 늘 뒤에서 애쓰는 제인이 안 스러웠기에.
"......그 녀석은 원래 인기가 많 고 늘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 다."
미음을 반쯤 남긴 채 숟가락을 내려놓은 카시아가 눈을 내리깔았 다.
카시아는 인간관계에 조금도 신 경을 기울이지 않는 날카로운 사 람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녀의 푸 른 눈은 생각이 많은 듯 착잡해 보였다.
"쓸데없이 착한 녀석이니 혼자 있는 제게 괜히 신경을 쓰는 거겠 죠. 하지만 저와 있어 봐야 다가 오려던 사람도 오지 않을 겁니다.
제가 녀석을 고립시키겠죠."
카시아는 내 예상보다 훨씬 생 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내가 새로운 그녀의 면모를 보 고 놀라 있었을까, 평소의 무심한 낯으로 돌아온 카시아가 쯧 혀를 찼다.
"그러니 귀찮게 하지 말고 저 좋다는 애들이랑 놀라고 하십시 오. 내가 뭐가 좋다고."
카시아에겐 무심한 상냥함이 있
었다.
극과 극인 단어지만, 복잡한 세 상에서는 모순이 늘 거짓을 뜻하 지만은 않았다. 카시아는 그녀의 방식대로 상냥을 베풀고 있었다.
"그래도 제인 경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떼던 나 는 멈칫했다. 집으로 다가오는 인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졌고, 나 는 습관처럼 허리춤의 검 손잡이 에 손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긴 문을 여 는 듯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더 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음, 손님이 있나?"
카시아와 똑 닮았지만 조금 자 글자글한 주름이 지어졌을 뿐인 얼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왼 쪽 팔은 의수를 끼고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 사 람이 카시아의 어머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