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카시아 친구인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놓 은 여인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관찰했다.
엄격해 보이는 입매, 서늘한 눈 매까지 카시아와 판박이인 여자는 왼팔에 검은 의수를 차고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아 마법으 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검 은 반팔 티셔츠 아래로 보이는 그 녀의 몸이었다.
대장장이였다는 것이 거짓이 아 님을 증명하듯, 그녀의 몸은 옷에 도 채 가려지지 않는 단단한 근육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멀쩡한 오른팔은 쇠붙이를 다루 며 만들어진 수많은 흉터들로 얼 룩덜룩했다.
그녀의 삶이 가득 묻어난 몸은
내게 존경스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카시아의 어머니...... 이름이 에 녹이라고 했나.'
나 또한 그녀를 관찰하고 있을 때, 다급히 일어난 카시아가 나와 여자 사이를 막았다.
"친구가 아니라 기사단의 훈련 관님입니다. 병문안 오셨습니다."
"아, 그럼...... 아! 맞아. 검술 대회에서 봤던 얼굴이랑 똑같네. 설마 미르 님이십니까?"
가늘게 뜬 눈으로 날 빤히 바라 보던 에녹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 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입니다."
"에녹입니다. 귀한 분을 모셨는 데 대접을 못 해 드리네요. 죄송 합니다."
"괜찮습니다. 언질도 없이 온 건 저인걸요. 오늘은 카시아 경의 동 료로서 온 것이니 마음 쓰지 말아 주십시오."
인사하는 와중에도 에녹은 나를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연둣빛 눈동자는 호 기심과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카 시아의 푸른 눈과 생김새는 똑같 았음에도 안에 든 것은 지나치게 달라 낯설었다.
"카시아에게 친구가 있을 줄 몰 랐습니다. 녀석이 누굴 닮아서인 지 하도 까칠해서 따돌림을 당하 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
카시아가 자신을 시원스럽게 까 내리는 에녹을 황급히 제지했다.
늘 인간보단 쌈닭에 가까운 모 습을 봐 왔는데, 인간성 넘치는 그 모습이 흥미로웠다.
"카시아 경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 많습니다. 모두에게 인정받는 기사이니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카시아와 에녹이 동시에 날 돌 아보았다. 카시아는 '내가?' 하는
표정이었고, 에녹은 '쟤가'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양심이 쿡 찔렸 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 다.
'완전 거짓말은 아니니까.'
내가 만난 이들 중엔 카시아를 좋게 보는 이들이 많은 데다, 카 시아를 성격 때문에 멀리하는 이 들도 그녀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안심하라고 괜히 해 주시는 말 같지만...... 정말 그러면 좋겠군
요.
에녹의 주름진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렇게 쉽게 말해도 내심 카시아의 사회생활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이만 훈 련관님을 배웅해 드리고 오겠습니 다."
얼굴이 새빨개진 카시아가 자리 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크게 휘청거렸다.
"카시아 경!"
나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너지는 카시아의 몸을 받쳤다.
'너무 뜨거워.'
열이 팔팔 끓는 살갗에 손을 얹 게 된 나는 얼굴을 굳혔다.
워낙 태연한 낯으로 가장하고 있어서 몰랐다. 카시아는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누워서 쉬어 야 하는 상태였다.
"경부터 들어가시죠."
"그래도 배웅은......
"카시아 경이 들어가는 걸 보고 갈 겁니다. 부축해 드리겠습니 다."
내게 기대어 있다 겨우 일어난 카시아는 내 단호한 목소리에 짧 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상태가 악화되며 반박할 기운도 없는 것 같았다.
"카시아의 방은 저쪽입니다. 부 탁드리겠습니다."
덩달아 표정이 굳은 에녹이 방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까 닥이곤 카시아를 부축해 방으로 이끌고 갔다.
덜컥.
방 안엔 정말 있어야 할 것만 있었다. 흔한 장식품 하나 없었 고, 책장엔 오직 검술과 관련된 서적뿐이었다. 무심해 보일 만큼 깔끔한 방은 카시아다웠다.
카시아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혀 주자, 새액거리며 숨을 쉬던 그녀는 조금 멍한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눈을 꾹 감았다 뜬 카시아는 천 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상념이 뒤엉킨 푸른 눈은 복잡해 보였다.
"......제가 기억나지 않으십니
까?"
조금 쉬어 버린 가느다란 목소 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자리 를 나서려던 나는 멈칫하며 그녀 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잊은 적 없습니다."
푸른 눈이 아득하도록 깊어졌다.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던, 카시아 와 과거에 인연이 있다는 가정이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몸을 뒤척인 카시아는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 보시죠."
단호한 목소리는 명백한 축객령 이었다.
애초에 아픈 사람 옆에 눌러앉 아 신경 쓰이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나는 반문 없이 자리에 서 일어섰다.
"오늘."
복잡한 마음으로 방을 나서려는 찰나, 카시아의 목소리가 내 발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카시아는 여전히 뒤돌아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서 오랜 고민과 수줍음, 진심 어린 고마움을 모두 느낀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겁니다. 좋은 꿈 꾸십시오."
탁. 문을 닫았다.
부드러운 러그가 깔린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가니 에녹이 식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 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자애롭 게 웃었다.
"미르님.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얘기 좀할수 있겠습니 까?"
식탁엔 김이 나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쌉싸름한 향이 풍기 는 걸 보아 녹차인 것 같았다.
"그러죠."
저녁 시간 전에는 돌아가야 했 지만 아직 해가 지기 전이었으니, 나는 고민 없이 수긍하고 에녹 앞 에 앉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녹차 를 홀짝였다. 적당히 우려진 녹차 는 향도 맛도 좋았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 만, 만나게 된다면 감사하다는 말 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에녹을 마주 했다. 그녀의 연둣빛 눈동자가 은 은히 반짝이고 있었다.
"카시아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 니다."
" 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 게 떴다. 에녹은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기억하지 못하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그럴 법도 합니다. 구원받
은 이들이나 똑똑히 기억하지, 구 원자는 그들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요."
탁.
잔이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에 녹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카시아를 데리고 북부 와 맞닿은 지역에 간 적이 있습니 다. 제가 대장장이로 일할 때였 죠. 그쪽 근방에서만 나는 강철을 얻으려면 직접 가야 했는데, 너무 어린 카시아를 두고 갈 수가 없어
서 그랬습니다. 그러면 안 됐는 데."
에녹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신기루 같던 기시감이 점점 형태 를 갖춰 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며칠은 문제가 없었는데 일이 길어지며 애가 심심했던 모 양입니다. 제멋대로 숲으로 나가 버렸으니 말입니다."
"아, 설마......
순간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나 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때 미르 님께서 카시아를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시아와 닮은 어린 얼굴을 떠 올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사실 이런 식으로 구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그때 기억이 확 실히 나진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 하게나마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 다.
"기억이 쉽게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구해 오셨나 보군 요."
기억을 되짚으며 충격에 빠져 있는 나를 바라보던 에녹이 부드 럽게 미소 지었다.
"멋진 삶을 사셨습니다."
그 따듯한 한마디에 나는 잠시 뭉클했으나, 이내 의문을 품었다.
"확실한 겁니까••••••?"
나는 아연해졌다. 그때 일을 기 억하고 있는데도 그 아이와 카시 아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한 이 유가 있었다.
'저는 미르 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응원해 주실 건가요?'
"지금과 성격이 너무 다르지 않 습니까?"
소심한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도 귀여운 말을 하던 그 아이와, 지금의 날 선 카시아는 성격이 달 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하하! 그럴 법도 하죠. 그때의 카시아와 지금의 카시아는 거의 천지 차이니까."
나는 호탕하게 웃는 에녹에게 눈빛으로 동의를 보냈다. 에녹은 길게 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검은 의수가 그녀의 각진 턱 아래 에서 빛났다.
"그 뒤에 성격이 크게 바뀌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깊어진 연둣빛 눈동자는 씁쓸한
녹차와 비슷한 빛깔을 띠고 있었 다.
"제가 귀족의 의뢰를 받아 검을 만들다...... 불량품을 만들어 내는 바람에 화난 귀족 나으리에게 한 쪽 팔을 잃었거든요."
덤덤하게 검은 손을 움직이는 에녹을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 다.
"그래서 카시아 경이......
"네. 그때부터 귀족을 경멸하더 군요."
에녹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 잘못입니다. 특별히 맡긴 희 귀한 고드릭 강철로 불량품을 만 들어 버렸으니까요."
"고드릭 강철은 애초에 가공이 불가능에 가까운 강철 아닙니까!"
치미는 분노로 저절로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욕설을 내뱉지 않 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고드릭 강철은 대단한 내구력을 자랑하지만 희귀해서 아주 비싼
값으로 거래되었다.
다만 담금질 증 조금이라도 실 수를 한다면 바로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기이하고도 치명적인 문제 가있어 가공이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고드릭 강철을 다룰 정도의 실력자는 세기에 한 명 있을까 말 까 했으니, 대부분은 가공하지 않 고 연금술의 재료로 사용하곤 했 다.
'그걸 맡겼다는 것 자체가 고약 할뿐더러...... 실패했다 해도 팔을 자른다는 건 불합리함의 극치잖
아.'
대장장이에게 팔은 생명이었다. 나는 팔을 잃은 에녹의 심정을 감 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땐 많이 괴로웠지만 이젠 괜 찮습니다. 의수에 적응한 덕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다만 그 사건이 카시아에게 너무 큰 상 처로 남은 탓에 성격이 엇나가 버 려서 걱정이었죠. 그런데 미르 님 말씀을 들으니 한결 안심입니다."
나는 착잡함에 입을 열 수가 없
었다. 오래된 이야기는 씁쓸하고 도 무거워서, 긴 생각을 하게 만 들었다.
"......저번에 카시아와 함께 검 술 대회 결승전을 보러 갔습니다. 그곳에 당신이 있었죠. 그때도 누 군가를 구하던 중이더군요."
에녹이 오른손으로 제 의수를 매만졌다.
"처음으로 정체를 밝히셨던 그 때...... 카시아가 울더군요. 아주 어렸을 때 빼곤 그 녀석이 우는
걸 처음 봤습니다. 그 사건 이후 로 귀족들을 쳐부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세웠는데, 평생 존경해 왔던 당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에 대단히 충격을 받더군요."
카시아에 대한 모든 퍼즐이 풀 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가 어렵사 리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미 르 님은 평생 감사해도 모자를 은
인이신데요."
내가 귀족이라는 것에 대한 묘 한 죄책감에 빠져 있을 때, 에녹 이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녀의 눈빛은 봄날의 햇빛처럼 따스했 다.
"미르 님은 카시아의 은인이고, 카시아의 은인은 제 은인입니다."
세월이 지나 생기나 활발함은 마모되었으나 그 자리에 지혜로움 과 연륜이 깃든 미소가 피어올랐 다. 에녹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전 대장장이로서의 수명은 다 한 사람이지만, 그때의 감각과 지 식은 여전히 제게 남아 있습니다. 혹시라도 대장장이의 식견이 필요 하시거나 그 외에 다른 도움이 필 요하시다면 전력을 다해 도울 테 니 언제든 찾아와 주시죠."
잠시 눈을 깜빡인 나는 이내 밝 게 웃었다.
"네. 그러도록 하죠."
앞으로 검에 대한 궁금증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걱정할 일은 없 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