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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09화 (209/254)

209화

"돌아오셨습니까."

카시아의 병문안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 던 총괄 집사 테일러가 내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에게 재킷 을 건네면서도 의아해서 눈을 깜 빡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보통 테일러가 마중까지 나오진 않는데.'

공작가에 당도한 첫날부터 진하 게 엮였던 노집사 테일러.

그는 모든 방면에서 대단한 연 륜을 지녔기에 신분 차이를 막론 하고 멘토와 멘티 비슷하게 지낼 만큼 나와 가까웠다.

그러나 저택을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 그가 나를 마중까지 나오는 일은 드물었다.

"홀에서 식사가 진행 중입니다. 공작님께서 다른 일을 모두 뒤로 하고 도착하는 대로 홀로 오라고 전하셨습니다."

"옷도 갈아입지 말고?"

"네. 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 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나는, 굳어 버린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난 그 자리에 서서 마른 세수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가지.

직접 가서 확인해야 했다.

"저 왔습니다."

"잘 왔어."

"수고했다."

" 앉아라."

홀에 들어서 인사하자, 아리아, 칼, 카이사르가 차례대로 대답했 다. 다들 인사에 대답은 해 준다 는 점에서 내가 무언가 잘못을 저 지른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 으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무

거워 보였다.

나는 긴장한 채로 자리에 앉았 다.

"식사부터 하지. 다들 들어라."

카이사르에 말에 모두 식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아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고, 칼과 아리아는 근심이 짙은 표정으로 깨작거리다 시피 했다. 나는 꽤 배고팠지만, 그 사이에 끼어 버린 탓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 서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전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 했다."

먹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 아 카이사르가 말문을 열었다. 그 는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듯 복잡 한 표정이었다. 식기를 내려놓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묘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 다.

"곧 북부와 정식 회담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쪽에서 먼저 제시 를 해 왔다더군. 서신에서 협상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걸 보니 전쟁을 무를 생각이 없는 모 양이다. 그저 선전 포고를 하려는 것이겠지. 그런데 북부 측에서 요 청한 게 딱 하나 있다."

두 손을 깍지 껴 모은 카이사르 가 입술을 짓씹었다 놓았다.

"너를 회담에 출석하게 하라더 군."

"......뭐라고요?"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회담에? 나를? 왜?'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카이사르의 기색이 너무도 심각했 다. 나는 천기누설을 들은 기분이 되어 숨까지 멈춘 채 넋을 놓고 있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머리 를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르라는 건 이미 온 대륙 에 퍼졌을 테니 그들도 알고 있을 거야. 훈련관이 되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 이에 따라 탐색과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 을 가능성이 커. 제국 소속 소드

마스터들을 한눈에 보고자 했을지 도 모르지. 카이사르나 라이너는 직위가 직위인 만큼 필수적으로 참여하겠지만 나는 위치가 애매해 참가하지 않을 테니까.'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북부가 나를 끌어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디에고의 집무실에서, 디에고와

나는 오랜만에 만난 회포만 푼 것 이 아니었다.

'예전에 내가, 북부의 지배자가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려 준 적이 있지. 그곳을 돈 줄로 삼고 있다고도 말했던 듯한 데.'

'네. 기억합니다.'

'그 조직이 어딘지 찾았네. 생각 보다 가까이 있었고...... 예상치도 못한 곳이었지.'

디에고의 푸른 눈이 시리게 번 뜩였다.

'정보 길드 'Hide & Ceek'였네. 그곳의 길드장이 바로 북부의 지 배자야.'

귓가에 들려온 조직의 이름은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임에도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었다.

'지그문트 하이드.'

키프로스와 결탁한 자. 'Hide & Ceek'의 길드장. 나와 버금가는 강자이며, 북부의 지배자.

늘 마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보랏빛 두 눈도, 암흑처럼 어두운 그의 검은 머리칼도 그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왠지 늘 떠날 듯한 기색이었던 것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던 것도, 자신을 살리면 후회 하게 될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던 것도...... 다 이 때문이었겠지.'

지그문트의 의뭉스러운 태도가 대부분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그 자식이 북부의 수장이라면

날 지명한 것도 무리는 없지. 정 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측한 대로 전술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네가 살린 내가 이렇게 악한 놈이었다고 말 이다.

이유가 어느 쪽이었건, 내 마음 을 혼들기엔 충분했다.

"슈슈. 어쩌겠느냐."

다른 생각에 빠진 내 정신을 건

져 올린 건 카이사르의 낮은 목소 리였다.

그는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 다.

"회담, 함께 가겠느냐. 네가 싫 다고 하면 내 어떻게든 방도를 찾 아보마. 억지로 참석할 필요는 없 다."

나를 최우선으로 존중해 주는 그 태도가 내겐 가장 힘이 되었 다.

나는 굳은살이 박인 손끝을 잠 시 매만지다가, 내가 지을 수 있 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 다.

"물러설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 까. 전 좋습니다."

그런 회담이 있다면 몰래 숨어 들어서라도 엿들었을 텐데, 직접 초대해 주겠다니 고마울 따름이었 다.

"맹랑한 녀석."

주저 없는 대답에 카이사르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내 괜찮다는 확답에 안심이 갔는지 표정이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국가 간의 기 싸움이라는 게 있으니 너는 공식적으론 북부의 요청으로 인한 특별 참석자가 아 니라 황제의 호위 기사 신분으로 가게 될 거다. 내일 출근하면 아 마 황제의 호출이 있겠지. 그때 더 자세히 들어라. 내게 전달된 사항은 여기까지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답했다. 나를 물끄 러미 바라보던 카이사르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었 다. 질책과 북돋음이 함께 담긴 손길이었다.

"너무 빨리 어려운 길에 들어서 는구나."

세간에서 악마의 것이라 불리는 붉은 눈이 씁쓸하고도 부드럽게 풀렸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네가 너무 많은 것을 지 고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카이사르의 말은 길고 화려한 법이 없음에도 늘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아마 한없이 진중했기에 그럴 것이다. 나는 울렁이는 마음 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그가 헝클어뜨린 머리칼을 소중히 매만지며 웃었다.

"함께 짐을 져 주시고 계시니 힘들지 않습니다."

온전한 진심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내 방으로 올라왔다.

공작가에 들어온 뒤 여태껏 사 용하고 있는 흑장미의 방은 원래 는 칙칙하고 엄숙한 느낌이 강했 으나, 서서히 내 취향대로 변하기 시작하며 이제는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여기는 후계자가 쓰는 방인 데...... 이러다 진짜 소공작이 되

면 어떡하지.'

시중을 물리고 혼자 옷을 갈아 입던 나는 문득 걱정이 들었다. 대귀족 회의에서도 후계자로 몰린 데다, 카이사르가 은근히 나를 후 계자로 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러다 어영부영 후계자가 되어 버 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었다.

'얼른 제비뽑기하자고 해야지.'

카이사르는 공작가 후계자를 칼, 아리아와 제비뽑기해서 결정하라 고 했다. 그의 성격에 빈말일 리

없으니 진심일 터였다.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싶긴 했 지만. 이렇게 내가 후계자로 기정 사실화되느니 빨리 제비뽑기를 해 서 칼과 아리아 중 한 명에게 넘 겨줘야 했다.

똑똑.

"아가씨. 계신가요?"

"잠시만."

옷을 막 다 갈아입은 찰나, 방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 마

리아였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진 작 알아차리고 있던 나는 마지막 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곤 방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오늘 오후에 아가씨 앞으로 우 편이 와서요."

마리아가 내 앞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 들었다.

"다만 발신인도 주소도 없이 아 가씨 이름만 덩그러니 쓰여 있어

서 수상해요.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건 철저히 확인했지만...... 누가 보냈는지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신 가요? 없으시다면 그냥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크라프트지로 된 서류 봉투는 빳빳하고 깨끗했다. 표면엔 마리 아의 말대로 내 이름만 덩그러니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을 적어 내 린 우아한 필체를 느리게 매만지 던 나는 이내 차갑게 미소 지었 다.

"그래. 아는 거야."

봉투엔 마력의 기운이 묻어 있 었다. 그 마력의 주인을 알지 못 하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아 주 희미하게.

꽤나 고의적으로 느껴지는 이 기운이 누구의 것인지 나는 잘 알 고 있었다.

"예전에 의뢰해 두었던 정보가 왔구나."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재수 없는 얼굴. 지그문

트였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거냐고 걱정 하는 마리아를 안심시키곤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선 손에 쥔 서류 봉투를 몇 번이고 구기고 싶 었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은 이성 으로 참고 있었다.

몇 달 전, 나는 내 발로 'Hide & Ceek'에 가 지그문트에게서 직 접 정보를 샀다. 내가 알아봐 달 라고 요구한 세 사람. 내 어머니 안테이아 헬라와 레오의 유모 레 이샤, 그리고 지그문트였다.

'구한 정보는 알아서 너희 집으 로 배송해 주지.'

지그문트는 뻔뻔히도 그리 답했 었다. 정말 그 말대로 했고.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얼굴을 일그러뜨 리곤 서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의뢰를 하는 당시엔 그나마 친 구냐는 물음에 잘 모르겠다고 답 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그와 친구면 곧 역적이었다. 지그

문트와의 관계가 더 악화될 수 없 을 만큼 파탄이 난 현재엔 그의 손을 거친 자료를 보는 것조차 껄 끄러 웠다.

'하지만 그 자식 성격에 이런 것 에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내게 줄 정보를 철저하게 조사했을 것이 다. 내가 아는 지그문트는 그랬 다.

'레이샤에 대한 자료는...... 필요 한데.'

나는 고뇌에 빠져 앓는 소리를 내며 서류 봉투를 매만졌다.

내 어머니에 대해선 야샤와 카 이사르를 거치며 많이 알게 되었 고, 지그문트에 대해선 더 이상 궁금한 것도 없지만, 레이샤에 대 한 정보는 아직 부족했다.

'이건 길드의 의뢰인으로서 받은 정보니까 괜찮겠지.'

나는 열기를 결심하고 페이퍼 나이프로 서류 봉투를 찢었다.

부드럽게 열린 봉투 안엔 세 장 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세 장을 모두 꺼내고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우선 어머니에 대한 건 패스.'

맨 첫 장, 안테이아 헬라이자 오 드리인 여자에 대한 정보 조사는 넘겼다. 그녀에 대한 궁금증은 어 느 정도 풀렸으니까. 나중에 한 번 정독하겠지만, 지금 가장 궁금 한 건 레이샤의 정보였다.

나는 바로 다음 장에 등장한 레 이샤의 이름에 집중을 기울였다.

[레이샤. 달빛 늑대 수인족.]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강 렬한 첫 문장 이후로는 내가 모르 던 정보들이었다. 천천히 읽어 내 리기 시작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제국 아카데미에 재학했고, 마 법부 차석이었다. 그 당시 마법부 수석이었던 안테이아 헬라와 검술 부 우등생이었던 레안드로 로마노 프와 함께 다녔다. 셋이 삼총사로

불렸다고. 레안드로 로마노프 는...... 추후 전 아타라 국왕의 황 비이자 현 국왕의 어머니가 된 다.'

레안드로 로마노프. 원작 '요정 의 숲'에선 오직 남주인공의 어머 니로만 등장하던 여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알렉산드로 레안드로 레오네 드 아타라. 첫 미들네임의 출처가 어 머니였구나.'

나는 목울대를 느리게 울렁였다.

레안드로와 안테이아, 레이샤 셋 이서 아는 사이였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레이샤는 그때의 인연으로 현 국왕의 유모가 되어 준 것으로 추 정. 그 후...... 현 국왕을 지키다 죽었다.'

기록된 레이샤의 인생은 간결하 고도 무거웠다. 대부분이 알고 있 었던 것이지만 셋이서 아는 사이 였다는 건 몰랐기에,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지그문트 그 자식이 도움이 되 다니.'

나는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어 페이지를 넘겼다.

"......하."

그리고 헛웃음을 뱉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마음을 복잡 하게 하는 것도,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그가 독보적이었다.

[지그문트 하이드, 북부의 지도

자.]

당당하게 적힌 그 이름과 칭호 아래, 그의 필체인 것이 분명한 글씨로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 다.

[네 인생 최고의 개자식.]

가장 완벽한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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