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0화 (210/254)

210 화

"오, 이거 내 호위 기사인 크리 시스 경 아닌가."

열린 문 틈새로 금빛 머리칼이 살랑거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 를 울렸다.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푸른 눈은 반가움과 불길함을 동 시에 불러일으켰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황제, 헬리오스 솔라티네였다.

오늘은 그의 호위 기사로서 북 부와의 회담에 참가하는 날이었 다.

"역시 그대는 차려입으면 때깔 부터 다르다니까."

헬리오스는 신상 장난감을 구경 하는 5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내 주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감탄 했다. 늘 그렇듯 황제의 체통은

아침에 세수하며 세숫물에 함께 쓸어내린 모양새였다.

그런 헬리오스에게 완전히 적응 해 버린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옷,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에 듭니다."

나는 허리를 폈다.

오늘 하루 동안 황제의 호위 기 사로 지내는 만큼 황제의 체면을 지킬 필요가 있었기에, 다소 불편

하더라도 헬리오스가 보내 준 옷 으로 차려입어야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제복은 하얀 천 에 금실로 세밀한 문양을 수놓은 가운데 라펠에 푸른색 천을 덧댄 디자인이었는데, 하얗고 번쩍거린 다는 것이 기사단 정복과 비슷하 면서도 훨씬 화려했다.

'이렇게 화려한 건 오랜만이네.'

편리만을 추구하는 나는 가벼운 약식 제복만 입고 다녔으니, 이렇 게 치렁치렁한 건 오랜만이었다.

사실 입는 당시엔 호위 기사 주 제에 너무 꾸미는 게 아닌가 싶었 다. 그러나 헬리오스의 차림을 본 지금, 이 정도는 화려한 것도 아 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는 입어야 완전 히 묻히지 않겠네.'

나는 자체발광하는 태양이라도 되는 양 번쩍거리는 그를 보며 고 개를 끄덕이고 납득했다.

"내 말대로지? 그대는 로우테일

과 반만 넘긴 앞머리가 잘 어울 려."

헬리오스가 뒷짐 진 채로 만족 스럽게 웃음 지었다.

[머리는 무조건 로우테일이네. 머리끈은 파란 리본으로. 앞머리 는 7대 3 정도로 타는 것도 좋지 만 역시 반만 넘긴 것이 좋을 거 라고 생각하네. 둘 중 보고 더 나 은 쪽으로 하게나. 신발은 옥스퍼 드 구두도 괜찮지만 무릎 바로 아 래까지 오는 부츠도 괜찮다고 생 각하네. 망토는 추운 곳에 가니

털이 있는 걸로.......]

헬리오스는 이 옷과 함께 아주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 왔다. 나 는 그가 황제 자리를 때려치우고 스타일리스트로 전직한 줄 알았 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황궁 기사 단원으로 살며 황제의 척박한 인 생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나는 순순히 헬리오스의 가이드를 따랐 다. 그 지루한 인생에 어떻게든 재미를 찾으려 하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내 안목은 확실하다니까."

자랑스럽다는 듯 말한 헬리오스 가 내게 눈짓했다. 곧바로 의미를 알아차린 난 그의 뒤를 지키고 섰 다.

헬리오스가 먼저 방을 나서는 것을 기다리며 조금 긴장한 채로 서 있었을까, 바로 나갈 줄 알았 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대가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던가?"

"18 살입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리긴 어리구나.'

나이에 걸려 무언가를 하지 못 한 적은 없으니 늘 잊고 살았건 만, 생각해 보니 나는 꽤 어렸다. 전생의 성숙한 정신이 있다고 해 도 기억 자체는 희미했으니, 결국 확실히 기억하는 삶은 18년뿐이 었다.

헬리오스가 나를 쓱 돌아보았다. 늘 장난스럽던 푸른 눈이 이례적 으로 씁쓸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가 일찍부터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하네."

그 한마디는 엄숙하고도 진중했 다. 황제로서 하는 말보단 사람 대 사람으로서, 연장자로서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 고 있다, 한숨과 함께 웃었다.

늘 자기 멋대로인지라 대체 뭔 가 싶으면서도 미워할 순 없는 사 람이 었다.

"그럼 가지."

헬리오스는 내 대답을 듣지 않 고 몸을 돌렸다. 망토가 휘날리고 견장이 흔들리는 찰나에 사람에서 황제가 되었다. 그는 분명 나보다 무력이 약함에도 내 앞을 가로막 은 등은 마치 태산 같았다.

"우리의 적을 보러 가야지."

바람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 다.

북부와의 회담은 제국과 북부의 땅이 맞닿아 있는 레스토리아 설 원에서 진행되었다. 양측 다 수많 은 수작질의 가능성이 열리는 복 잡한 도시보단 허허벌판인 설원에 서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 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제국에서 레스토리아로 가는 인

원은 황궁 기사단에서 선별된 기 사 10명과 신전의 성기사 10명, 마탑에서 선별된 마법사 10명이 었다.

'얼핏 보면 많아 보이는 인원이 지만, 제국의 수뇌부가 전원 출동 하는 상황이니까.'

나는 이동을 위해 순간이동 기 계 앞으로 한데 모인 인원들을 확 인했다.

내가 호위를 맡은 황제 헬리오 스부터 교황 엘리오르, 황태자 디

에고, 공작 카이사르, 황궁 제1 기사단장 노아, 제2 기사단장 라 이너까지.

'이곳의 인원들이 잘못되면••... 제국은 즉각 멸망이나 다름없지.'

이 정도 호위도 극단적으로 간 소화한 거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벌어 질 참극을 상상하다 그만두었다. 별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 다.

'어.'

주위로 눈을 굴리고 있었을까. 나는 문득 엘과 눈이 마주쳤다.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늘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흐드러지게 웃음 지었다. 조금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나는 잔뜩 반가운 티를 내는 엘 을 향해 눈짓으로 인사했다. 내게 다가오려는 듯 움찔거리던 그는 복잡한 주위 상황을 확인하고 확 얼굴을 굳혔다.

그 소름 끼치는 서늘함에 도리 어 내가 움찔했을까, 곧바로 평소 의 웃는 낯으로 돌아온 엘이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끝나고, 만나요?'

이게 뭐라고.

입가에 손까지 세워 가린 채 속 삭거리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 았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

게 알겠다고 입 모양을 만들어 보 였다. 그럼 또 좋다고 헤실 웃는 하얀 얼굴은 순진해 보였다.

나는 혹시 누가 볼까 주위를 한 번 살폈다. 괜히 교황과 이렇고 저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 엘을 곤 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먼저 그를 향해 입술을 움직여 보였다.

'감기 조심하세요.'

나야 감기에 걸릴 가능성이 음

수로 치달아도 엘은 신성력을 제 외하면 일반인이니 혹시 감기가 걸리진 않을까 싶었다.

물론 교황 정도 되는 신성력의 소유자면 모든 독과 질병에 면역 이 된다는 설이 유력하긴 했지만, 비밀스러운 신성력은 루머만 무성 해 사실 여부가 불분명했다.

내 입 모양을 곱씹듯 새하얀 속 눈썹을 펄럭이며 눈을 끔뻑이던 엘이 이내 크게 웃음을 흘렸다. 환한 얼굴은 반짝거리고 있다는 착각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 였다.

'추워지면 당신이 안아 주세요.'

나는 엘의 기다란 하늘색 머리 칼 뒤에서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 았다. 요망하다고 할 수 있을 그 의 행동은 절로 내 귓가에 열이 오르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이동해 주시기 바랍 니다."

내가 무어라 답하기 직전, 포탈 을 발동시키고 마지막 안전 점검 을 마친 마법사가 큰 소리로 외쳤 다. 그 외침으로 주위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여어, 가자고, 내 호위."

헬리오스의 부름도 있었고 말이 다.

조금의 기품도 없는 시건방진 부름이었지만 헬리오스다웠다. 나 는 수긍하며 그를 지키고 섰다.

"크리시스가야 중립이라지만 지 금은 내 호위 기사 아닌가. 신전 과 내통하면 곤란하다고."

과장스럽게 두 팔을 벌린 헬리 오스가 섭섭함을 담은 목소리를 지어 냈다.

나는 떫은 감을 한입에 쑤셔 넣 은 사람의 눈빛으로 그를 꼬나보 다-이때 헬리오스가 호탕하게 소 리 내어 웃었다- 마지못해 고개 를 끄덕였다.

내통 같은 건 애초에 한 적도

없지만.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기사단의 반절이 상황을 보기 위해 먼저 포탈을 건너고, 안전하 다는 신호가 온 뒤 헬리오스의 차 례가 되었다.

나는 그의 그림자처럼 붙어 건 너가는 헬리오스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새삼 생각했다.

화아악!

나는 내 스스로가 빛나는 것보 다, 빛나는 사람의 뒤를 지켜 주 고 더욱더 빛나게 해 주는 것이 더 즐겁다고.

포탈을 건너는 동안 옅은 어지 럼증이 느껴졌다.

잠시 속이 메슥거렸지만, 마법사 가 아무런 도구 없이 발연하는 순 간이동보단 훨씬 젠틀한 편이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붕 뜬 감각이

사그라들고 공간이 거의 다 형성 되었을 때, 나는 위험 요소를 확 인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주위 를 둘러보았다.

휘이익-

설원엔 꽤 강한 바람이 불어오 고 있었다. 회담을 위한 천막이 설원 한복판에 떡하니 준비된 가 운데, 싸라기눈■이 밀가루 날리듯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설원의 시린 향취 를 천천히 들이쉬었다.

아무리 출세했더라도 고향을 잊 을 리 없다.

나의 피의 고향. 가장 증오하고 원망스럽던 곳.

'나를, 죽여라.'

나는 피로 물들던 설원을 잊지 못했기에 설원을 싫어했으나, 설 원은 끔찍한 기억이 남은 장소인 동시에 소중한 이들과의 추억도 남은 곳이었다.

조금의 애착까지 완전히 거세하 진 못했다. 이곳은 내게 애증의 장소였다.

"숨겨진 함정은 없습니다."

나는 상념을 걷어 내고 내 본분 을 다했다. 주위에서 함정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북부가 미치 지 않은 이상 소드 마스터 3명이 올 자리에 함정을 설치할 가능성 도 낮고 말이다.

"자네...... 이제 보니 탐지견 같 군?"

몸을 갸웃거리며 탐지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리오스가 웃 음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그 저 렴한 언행에 또 새롭게 감탄하며 적당히 무시해 주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포탈을 통해 전원이 설원으로 건너왔다. 설원 의 추위는 뼈를 에는 수준이지만, 헬리오스 옆엔 마법사가 붙어 보 호막과 온도 조절을 함께해 주고 있었기에 그 곁에 있던 나는 덩달 아 벽난로 앞에 있는 느낌이었다.

"늦는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대 기하고 있던 카이사르가 제 회중 시계를 확인하더니 서늘하게 얼굴 을 굳혔다. 슬쩍 곁눈질하니 시간 은 약속된 시간에서부터 7분이 지나 있었다.

"재밌군요."

안 그래도 피부가 새하얀데 옷 까지 하얀 계열이라 본의 아니게 보호색을 띠고 있는 엘이 중얼거 렸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시리게

번뜩였다.

평소엔 천사 같아도 국가의 수 장 중 한 사람인데, 자신이 무시 당하는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새끼 왜 안 와?'

그 사이에 낀 나는 살풋 얼굴을 구겼다. 무슨 일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지그문트 그 자식 인성 엔 일부러 늦는 것일 가능성이 높 았다.

'여기서 전쟁만 벌이지 말자

바람이 서서히 소용돌이치기 시 작하는 폭풍전야 한가운데,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는 찰나, 나 는 기이한 마력이 가까이에서 응 집됨을 느꼈다.

"온다."

나와 동시에 알아차린 카이사르 가 마력이 모이는 곳을 노려보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나는 차가운 숨을 크게 내쉬며 폐 부를 진정시켰다.

촤아악.

검은색 포탈이 눈앞에 펼쳐졌다. 흑마법 특유의 불길한 기운이 본 격적으로 퍼져 나오니 마나 친화 력이 있는 이들은 모두 얼굴을 구 겼다. 나는 긴장을 억누르며 포탈 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박.

검은 부츠가 튀어나와 새하얀 눈송이를 짓밟았다. 나는 그 순간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사박사박.

인영이 완전히 드러나고, 눈 밟 는 소리가 고요한 설원에 울려 퍼 졌다. 그곳에 집중되었던 시선들 에서 경악이 스쳤다. 나는 코끝을 찌르는 짙은 겨울 향기에 숨을 참 았다.

"늦어서 유감이군."

싸라기눈 섞인 바람결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바람결 에 검은 털 망토도 함께 흩날렸 다.

늦은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뻔뻔했으나, 모두가 충 격을 받았기 때문인지 이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북부의 족 장이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20대 청년일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정

체를 알기 전까진 나도 거칠고 우 락부락한 50대쯤의 중년을 생각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을 터였다.

그는 모든 반응에도 개의치 않 고 헬리오스와 엘 쪽으로 걸어왔 다. 검은 망토가 물결처럼 나부끼 는 모습까지도 한 편의 그림 같았 다.

검은 머리카락이 눈송이와 함께 나부끼고, 기이한 위압감이 끈적 하게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선 그는 고개를 들고 서늘하게 미소 지었 다.

새까맣게 죽은 보랏빛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북부의 수장, 지그문트 하이드 다."

새하얀 설원 위에서,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겨울의 주인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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