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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1화 (211/254)

211 화

"만나서 반갑군."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 건 헬리오스 였다. 그 또한 북부의 수장이 젊은 청년인 것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었으 나, 거대한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이답게 금방 평정을 되찾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이 많이 험했던 모양이네. 이리 늦은 것을 보아."

헬리오스는 여느 때보다도 짙은 포 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빙글빙글 웃 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한마디에 공기가 무거워졌다. 여상스럽게 뱉었다고 해서 그 말 안 에 담긴 가시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 가 있을 리 없었다.

"눈보라가 몰아쳤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왔지."

요요한 보랏빛 눈동자를 느리게 깜 빡인 지그문트가 유려하게 답했다.

순간이동으로 멀쩡하게 온 주제에 걸 어온 듯 말하는 본새가 지극히 뻔뻔 했다.

지그문트의 기세는 그보다 나이가 두 배는 더 많고 노련한 헬리오스 앞 에서도 꺾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가.

목소리와 눈빛에 배어 있는, 타고난 위엄.

예전부터 눈에 띄었던 지배자의 기 질은 이곳에서 가감 없이 드러났다.

그의 죽은 눈에 번개 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어떤 미친놈이 북부인들을 죄다 노예로 잡아가 버려서 눈을 치울 사 람이 없다."

헬리오스의 미소가 순간 굳고, 헬리 오스와 지그문트의 대화를 관망하던 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던 분위기가 급속 냉동 주 문이라도 건 것처럼 쩡 얼어붙었다.

지그문트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그가 일을 벌여도 단단히 벌이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오자마자 폭

탄을 던질 줄은 몰랐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저건 선대 황제를 말하는 거잖아.'

북부인들을 노예로 삼고, 미친 수준 의 공물을 요구하며, 충성을 확인한 다는 명목으로 틈만 나면 북부인들을 학살하곤 했던 선대 황제. 그는 북부 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 그들이 이빨 을 드러내게 만든 주범 중 하나였다.

'선대 황제가 미친놈인 건 맞지만 헬리오스는 눈앞에서 아버지 욕을 들 은 건데......

나는 황급히 헬리오스를 곁눈질했 다. 여기서 그가 분노하기라도 하면 상황은 극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 다

"하, 하하!"

물론 서로 먹고 먹히는 처절한 정 치판에서 평생을 군림한 헬리오스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맞네. 내 시대가 오기 전에 미친개 하나가 날뛰었었지. 그 때문에 고생 이 많았음을 아네."

헬리오스는 한 수 더 높은 수준에 서 ▲스.루 부모님 안부를 물으며 호 탕하게 웃었다.

'별 걱정을 다 했네.'

그의 미친 행각에 익숙한 나는 혀 를 차며 넘겼다. 헬리오스를 잘 모르 는 북부인들은 그의 반응에 혼란스러 워하는 것 같았지만.

"자, 자. 긴 얘기는 들어가서 하도 록 하지. 정상회담을 눈 맞으면서 하 긴 그렇지 않은가. 다리도 아픈데 들

어가 앉으세."

헬리오스는 능청스럽게 굴며 천막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의 기 싸움을 잊은 건지 친한 친구에게 말 하듯 친근한 투였다. 어디 늑대 굴 앞에 던져 놔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을 먹어선 안 되는 이유를 설명 할 것 같은 평정심과 태연함이 바로 헬리오스의 가장 큰 무기였다.

'헬리오스가 황제라 참 다행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하늘에 감사하며 그의 호위 기사로서 곧바로 그의 뒤

를 쫓았다.

사르륵.

헬리오스가 움직이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그문트를 지나 칠 때, 바람에 휘날린 내 망토와 그 의 망토가 스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이 설원의 겨울보다 더 지독한 겨 울을 품은 남자의 향취가 내 코끝을 스쳤을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그문트 하이드는 여전히 어려운

사람이었다. 단연 내 인생 최대의 미 스터리라 부를 만했다. 감정 한 점 내비치지 않는 청명한 자수정은 사람 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바보 짓을 하는 모습 보면서 즐거웠겠다.」

그 찰나에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마나의 울림을 통한 전언을 보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고민 했다. 지그문트와 마주하면 표정을 관리할 수 있을지, 검을 꺼내 들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혹시라도 단둘

이 있을 때 말을 걸면 어떻게 반응해 야 할지 등등.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모르는 척을 하는 게 최선이겠지만, 이미 그에 대 한 감정이 터질 듯 차 있는 상태에서 그게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최소한 내가 먼저 다가가진 않을 거라고 결심했는데......

역시 인생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 다. 그는 곧 전쟁을 일으키고 내 등 에 칼을 꽂을 예정이었건만, 정작 나 는 멍청하게 그를 도와주었으니 얼마

나 우스웠을까 생각하면 감정이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아니.」

답변을 기대하지 않은 채로 지나치 려 하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 속을 울렸다. 나는 순간 걸음을 멈칫 했다.

「즐거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럼 어땠을까. 나를 배신하己 스 승의 신념까지 배신하며 전쟁을 일으 키는 것이 괴롭긴 했을까. 그 또한

고민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구하는 나를 보며 죄책감을 느낀 적 이 있을까.

수많은 궁금증과 물음이 차오르다 가도, 끝이 없는 무저갱처럼 깊은 보 랏빛 두 눈을 보면 할 말을 잃었다.

우뚝 멈춰 있던 나는 먼저 걷던 헬 리오스가 어째서 뒤따라오지 않느냐 는 눈빛을 보내며 의아한 표정을 지 을 때쯤 겨우 한마디를 할 수 있었 다

「......차라리 즐기지 그랬냐.」

내가 너를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로 보며 마음 편히 베어 낼 수 있게.

스르륵.

나는 지그문트에게 눈길을 주지 않 은 채로 그를 스쳐 지나갰다.

완전히 매정해지지 못하는 마음을 안고서.

호위를 목적으로 온 이들은 거의

대부분 바깥에서 대기했고- 천막에 들어온 이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공간 압축 마법이 걸린 천막은 겉보 기에도 꽤 커 보였으나, 직접 들어와 보니 거의 황궁의 알현실만 했다.

"넓고 좋군. 오늘 밤은 친선의 의미 로 이곳에서 다 같이 야영을 해도 되 겠어."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자리에 걸터앉은 헬리오스가 껄껄 웃었다. 나는 그의 헛소리를 익숙하게 넘겨들 으며 그의 뒤를 지키고 섰다.

곧이어 들어온 지그문트가 헬리오 스와 엘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의 호 위로 보이는 여자가 지그문트의 등 뒤에 정자세로 섰다. 고개만 들어도 눈이 마주치는 위치에 있었기에 나는 자동적으로 그녀를 살펴보앴다.

'......흑마법의 기운.'

지긋한 나이에 기계 같은 얼굴을 한 그녀에게선 불길한 악취가 냈다. 그녀뿐만 아니라 지그문트와 함께 온 모든 북부인들에게서 흑마법의 기운 을느낄수 있었다.

'북부의 수준은 전체적으로 높은 건 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경지 를 짐작하던 나는 입매를 굳혔다. 불 쾌하고 찝찝한 기운이 안개처럼 껴 있어 자세히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자라는 것 은 직감할 수 있었다. 동행한 다른 이들 또한 예사스러운 실력들이 아니 었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기계처럼 바 닥만 보던 여자가 눈을 들어 나를 바 라보았다. 주름진 눈매가 서늘했다.

워낙에 포커페이스리-북부엔 포커 페이스들만 있는 건가 잠시 생각했다 - 감정을 읽기는 어려웠지만, 내게 호의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 했다. 나 또한 눈을 서늘하게 뜬 채 기 싸움하듯 시선을 맞추고 있었을 까.

"다 왔군. 그럼 지금부터 회담을 시 작해 볼까."

헬리오스가 짝 하고 박수를 쳐 주 변의 시선을 모았다.

"북부가 회담을 청해 온 이유에 대 해 듣는 것에 앞서 제국의 입장부터 얘기해 보려 하는데 어떤가."

자연스럽게 흐름을 잡은 그가 대답 을 바라는 눈으로 지그문트를 바라보 았다. 느른하게 턱을 괴고 있던 지그 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 제국이 내린 결론 은 이것일세.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 는다는 것."

조금 전까지의 장난기와 능청스러 움을 싹 뻰 헬리오스의 목소리는 진

중했다. 그의 말에 북부 진영에서 잠 시 술렁임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이 부분을 선포하고 나간 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곳 에 오기 전, 모든 수도 귀족들이 모 여 이루어진 귀족 회의에서도 이 부 분에 대한 반발이 컸다.

'먼저 원하는 걸 알리는 건 우리가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전쟁이 벌 어져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면서 합리적인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선언 자체가

이 회담에서의 을을 자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럼 북부에선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과한 것 들을 요구할 터였다. 그걸 경계하는 이들이 전쟁을 원치 않는 이들만큼이 나 많았다.

차라리 전쟁을 벌여서 본때를 보여 주자는 의견과 손해를 보더라도 전쟁 을 막는 것에 집중하자는 의견이 팽 팽하게 대치하던 가운데.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대립에 종결을 지은 것은 엘이 었다.

'아무리 과거 일이라고 해도 제국이 북부의 원한을 살 만한 짓들을 했던 건 맞죠. 그들의 반란이 미련하다고 는 말해도 그들에게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요'

그 말엔 모두가 침묵했다. 제국을 위한 일이었다고 자위하며 뻔뻔하게 군다고 해도, 북부의 고통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과거 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북

부인들이 제국에게 험한 핍박을 받은 것이 당장 직전의 선황 때였기에 제 국의 폭정에 당한 이들이 아직도 살 아 있는 시대였다. 그들의 적대심에 는 명목이 충분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손해를 보는 건 우리입니다. 그쪽은 가진 게 없어서 악과 분노로 온다지만 우린 가진 게 많으니 잃을 것도 많죠. 전쟁을 막는 것이 최우선이에요 손해를 보더라呈 죗값을 치른다고 생각해요'

엘이 나긋하게 내뱉는 말들은 내 생각과 똑같았기에, 당시의 나는 한

층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휘어들고, 온 귀족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상냥한 신의 사자가 보듬는 것이라기보단 집 어삼키기 전 먹이를 핥아 올리는 은 빛 뱀의 입질에 가까웠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이들이 소름 끼친 듯 얼어붙었을까.

'신께서도 그걸 바라세요.'

확인 사살처럼 떨어진 한마디는 판

결을 내리는 법봉의 두드림 소리와 진배없었다.

전 제국민의 사상을 지배하는 태양 신교 그런 태양신교의 수장이자, 태 양신의 유일한 대리인 엘리오르 라.

무려 신의 이름을 성으로 가진 남 자의 말은 신의 음성과 맞먹었다. 그 가 신의 뜻이라 선포했을 땐, 그에 반하면 이단이 된다는 소리였다. 제 국에서 이단으로 몰린다면 사회적 인 생과 물리적 인생 모두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다른 의견 있는지.'

깍지 낀 두 손 위에 제 턱을 얹은 엘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 행동, 웃음, 시선과 눈빛 하나하나에서도 신성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다.

물론 반대를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북부와의 회견에선 전쟁을 일 으키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실 행 가능한 요구는 모두 들어주도록 한다.'

침묵이 감도는 회의장을 둘러본 헬

리오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으 로 회의는 끝이 났다. 교황의 권위를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속으 로 감탄하며 엘을 바라보던 나는, 그 와 눈이 마주쳤다.

'나 잘했지?'

그의 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조금 전 위엄 넘치던 교황의 모습 은 온데간데없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 지로 변모해 있었다. 기다란 연하늘 색 머리칼은 살랑거리는 꼬리 같고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는

강아지의 반짝이는 눈망울 같아서, 나는 조금 웃기도 했다.

'그대가 이걸 바랐잖아요'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그런 모양을 만들었을 땐 기묘한 기 분이 들기도 했다.

꼭, 그가 말하는 신이 나인 것 같아 서.

'이젠 원작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서 미래 예측은 못 하겠지만...... 이 정도면 북부도 수긍하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 부러 긍정적인 생각을 배제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자꾸만 몽실 떠올랐다.

어쩌면,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네. 북부의 요구 사항은 웬만해선 다 들 어줄 생각이야. 물질적인 것이든, 명 예든, 제시해 보게나. 북부의 완전한 독립은 시간이 좀 걸릴지 몰라도 그 대들의 대에서 이루어줄 수 있네. 과

거 제국의 만행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도울 테니 원만히 조율하고 평화롭게 끝내는 것은 어떻겠나."

헬리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제안 했다.

그리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회의 같은거 안 하나?'

나는 의아하게 북부 측을 바라보았 다. 이렇게까지 파격적인 제안을 하 면 무엇을 요구할지 회의에 들어가든 지, 시간이 필요하다며 회담을 끝내

든지 할 줄 알았건만, 그들은 조용했 다.

그 불안한 고요 속에서 입술을 깨 물던 찰나, 지그문트가 입을 열었다.

"하. 하하하!"

그의 붉은 입술 새로 흘러나온 건 웃음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 웃 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무엇 보다 놀라운 건 '그' 지그문트 하이 드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는 것이었

다.

그의 웃음은 허탈했己 자조적이었 으며, 서늘한 동시에 뜨겁게 부글거 리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지그문트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천 막 안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상황에 맞지 않는 무례한 짓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웃어 젖 히던 지그문트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 여 웃음기를 정돈하더니 고개를 들었 다

그의 보랏빛 두 눈이, 전에 본 적 없는 강렬한 분노와 광기를 담고 번 뜩이고 있었다.

"어쩌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생각 이 없다만."

희망은 늘 그랬듯 이루어지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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