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화
지그문트의 단호한 한마디는 회 의장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서늘하던 분위기는 이제 뜨겁게 들끓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호의적으로 나왔는 데도 고민조차 없이 잘라내는 건 무례한 행동인 데다, 애초에 협상 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과 다름없 었다.
"조금 궁금해지는군. 그렇게 나 올 거면 이 회담을 연 이유가 뭐 지?"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던 헬리 오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여느 때와 같이 웃는 낯이었지 만, 그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봐 온 나는 그가 평소보다 훨씬 냉정 한 기색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 었다. 큰맘 먹고 제안한 것이 곧 바로 거절당했으니 그럴 법도 했 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논의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지그문트는 턱을 괸 채 새까만 장갑을 끼고 있는 손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의 태도는 오만했으 나, 그는 그런 태도에 놀라울 만 큼 잘 어울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번 뜩였다.
"우리는 전쟁을 통보하기 위해 왔다."
혼들림 없는 목소리는 단호하다 못해 매정했다. 협상의 여지가 없 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원하는 게 있어서 전쟁을 벌이 겠다는 거 아닌가요. 원하는 걸 이루어 준다는데도 그래야 하나 요? 설마 그저 살육을 바라는 건 가요."
엘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게 보여 주던 온기를 완벽하게 걷어 낸 그의 얼굴은 얼음 조각상 같았다.
엘의 말에 짧게 헛웃음을 뱉은 지그문트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래.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 지."
나는 눈을 부릅떴다. 이 미친놈 이 스승님의 이름을 먹칠하다 못 해 살육까지 즐기는 인간 말종이 된 건가 싶었다.
"정확히는 복수겠지만 말이다."
쾅.
지그문트가 탁자를 내리쳤다. 힘 이 강하게 들어가지 않아 탁자는 약간 갈라지는 데에서 멈췄지만, 사람들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 다. 모두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직도 모르겠나. 우리는 이익 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위해 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다."
복수.
그럴듯한 이유이면서도 가장 잔 혹하고 덧없는 것이었다. 복수만
큼이나 허무한 명목이 없었다.
' 아.'
나는 분위기에 정신이 팔려 제 대로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을 그제 야 발견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은 특유의 눈빛이 있었다. 소름끼치 도록 텅 비어 있는 채로 안광만 번뜩이는 그 눈빛 말이다.
지그문트를 비롯하여, 북부 측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눈빛을 가
지고 있었다.
나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 었다. 그들은 전쟁에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걸.
"한낱 복수를 위해 몇 명이 죽 든 상관없는 건가?"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헬리오스 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심해 를 담은 푸른 눈이 엄한 빛을 띠 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앞에 서 위축되었을 법도 하건만, 지그 문트는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낱 복수? 제국은 참 쉽군. 죽일 대로 다 죽이고, 해칠 대로 다 해쳐 놓고선 이전 시대의 과오 라고 넘어가면 되니. 북부는 제국 으로 인해 수많은 것들을 잃은 뒤 채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아직도 북부엔 40대가 극히 적어. 그 시절에 제국이 노예로 만들어 끌고 가거나 죽여 댄 탓이다."
지그문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작은 가시를 넘어 날카로운 칼날 이 솟아 있었다. 그는 늘 얼어붙
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건만, 이 순간만큼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았다.
헬리오르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 전쟁을 벌이면 선황의 잘 못된 판단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 자보다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거 라는 걸 기억하게. 무고한 이들이 죽고 다쳐도 괜찮단 말인가? 그 대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도?"
그는 훨씬 더 너그러워진 투로
지그문트를 달래듯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부가 핍박 을 받은 건 그대 시대가 아니잖 나."
쾅!
지그문트가 책상을 거칠게 내리 쳤다.
헬리오스의 마지막 한마디를 발 화점으로, 지그문트의 표정이 시 리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는 제국에 강제 징용 되어 지금까지 생사가 불분명하 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조차도 몰랐던 지그문트의 과거였다.
"내 어머니는 북부의 선대 지배 자로서 평생 북부를 위해 일하셨 으나 제국군의 칼에 찔려 돌아가 셨다. 내 어머니의 친우는 제국 서커스단에 팔려간 뒤로 지금까지 행방을 모른다. 내 삼촌은 제국군 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다리가 잘 렸다."
그는 섬뜩하도록 차갑고 무감각 한 목소리로 참혹한 과거를 얘기 했다. 보랏빛 눈동자가 번들거렸 다.
"맞다. 실질적인 피해를 본 건 이전 세대지. 하지만 그로 인해 상실을 겪은 건 내 세대다. 얼마 나 많은 북부의 아이들이 부모 없 이 고아로 컸는지 알기는 하는 건 가."
뜨겁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 다.
담담히 이어지는 그의 말에 반 박하거나 말을 보탤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국인으로 태어 나 제국인으로 혜택을 받은 이상 과거의 죄를 외면해선 안 됐다.
헬리오스는 할 말을 잃은 듯 입 을 다물었고, 엘은 얼굴을 구겼 다. 나는 태연하게 굴려 노력했지 만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숨 길 수 없었다.
지그문트의 과거를 들은 건 오 늘이 처음이었다.
'그런 삶을 살았구나.'
지그문트도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예상하긴 했다. 고귀하게 생 긴 것과는 다르게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뒷골목에서 기어 올라온 이들의 그것이었기에 추측은 어렵 지 않았다.
하지만 그저 추측하는 것과 이 렇게 직접 듣는 것은 완전히 느낌 이 달랐다.
나는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운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죄악에 면죄부가 될 순 없겠으나, 그가 지금 내뱉은 단편적인 이야기만 들어도 제국을 향한 지그문트의 증오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주위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북부인들 이 소중한 것들을 잃었지. 그래서 북부인들 대부분이 전쟁에 찬성했 다."
오랫동안 퇴적물 쌓이듯 쌓여
있는 북부의 해묵은 증오를 피해 갈 순 없었다.
그 해묵은 증오는 길을 비켜 주 지 않았다. 나아가기 위해선 완전 히 부숴야 했다.
지그문트가 두 눈을 시리게 빛 냈다.
"전쟁으로 보복하지 않는다면 죽은 내 형제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지? 그들의 원한과 분노는 누 가 풀어 주지? 땅에 스며든 형제 들의 피가 보복해 달라고 끊임없
이 울부짖는다."
그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우리의 전쟁에 대단한 대의나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 니, 이건 복수다."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침묵이 감 돌았다.
전쟁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각 오하고 있던 사실이지만 확인 사 살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복수극일 뿐
이었다.
정말 잘못한 이와 정말 당한 이 들은 대부분 죽은 시점에서 그 후 대가 펼치는 전쟁.
그 끝이 어찌나 허망할지 알면 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
마찬가지로 생각에 빠져 있던 헬리오스가 천천히 수긍했다. 나 는 그의 포커페이스 너머로 희미
하게 보일락 말락 하는 감정의 이 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죄책감과 책임감이었다.
"배상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 는데. 배상과 사과로는 안 되겠 나?"
헬리오스가 한 번 더 물었다. 꼭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복수극을 펼쳐야겠냐고.
지그문트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북부에서는 용맹하게 살다 간 이들이 모두 전사들의 나라 '요르 하'로 간다고 믿는다. 하지만 억 울하게 죽은 이들은 용맹하게 살 았더라도 그곳에 가지 못하지. 살 아남은 자들이 망자를 억울하게 만든 장본인에게 보복한 뒤에 그 들이 요르하에 갈 수 있다."
나 또한 들어 본 전설이었다. 힘 을 숭상하는 북부인들은 죽은 뒤 전사들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겼다.
"보복은 오직 피로 해야 한다."
결국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기 분으로 서서 땅을 내려다보았다. 기분이 나쁜 걸 보아, 나도 모르 는 새에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 던 모양이었다.
내가 착잡한 마음을 겨우 정리 하고 있을 때.
"아, 특별히 호출한 사람이 한 명 있었지."
지그문트가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날 칭하는 것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그와 딱 눈 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감정을 내비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파 악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어째서 나를 불렀는지도 내가 멋대로 추 측한 것일 뿐, 확실한 이유는 몰 랐다.
'설마 갑자기 나를 죽이려 든다 거나.'
지그문트 하이드라면 내가 상상 치도 못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힐 지도 몰랐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를 빤히 바 라보았다.
모두가 나와 지그문트에게 집중 한 가운데.
지그문트는 눈꼬리를 휘어 한없 이 달콤하게 웃었다.
"안녕, 슈슈. 오랜만이지. 잘 지 냈나."
"뭐, 씨••••••
연인이라도 되는 양 친근하게 나를 부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 정말로 육두문자를 입 밖에 꺼낼 뻔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경악했고, 나 또한 경악한 채 지 그문트를 꼬나보았다. 순간 육두 문자를 뱉지 않으려 힘껏 깨문 혀 에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비린 맛과 쓴맛이 함께 나 는 침을 꿀꺽 삼키곤 빠르게 머리 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하이드가 지금 내게 아는 척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제국 쪽에 나와의 친분을 과시 해 봐야 특별히 떨어질 건 없을 테고, 북부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아는 사이라는 것뿐인데 특 별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았 다.
그 부분에서 막혀 잠깐 앓고 있 었을까. 문득 발상을 전환해 본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저 새끼랑 알고 있으 면 곤란한 건 나구나.'
그야 이미 북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지도자라 웬만해선 평판이 깎이지 않겠지만, 나는 갑 작스럽게 등장한 용병 미르였다. 훈련관에 오를 때 탈도 논란도 많 았던.
반대를 모두 잠재우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잠재운 것일 뿐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조금만 실수를 하면 옳다구나 하고 나를 밀어내 려 할 이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그 상태에서 내가 북부의 지도 자와 친분이 있다고 알려진다면?
'좋은 반응은 절대 안 나오겠지. 북부와 내통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나올 가능성이 제일 높고.'
훈련관으로서의 내 입지도 흐트 러트리고, 용병 미르의 신뢰도 떨
어트리고, 나도 엿 먹이는 아주 환상적인 계획이었다.
나는 또다시 혀를 간지럽히는 쌍욕을 가까스로 삼켰다.
'어떻게 반응하지.'
나는 애써 표정을 정리한 채로 고민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게 가장 현명 하긴 했다. 대강 놀란 표정을 지 으며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아니 냐고 몇 번이고 잡아떼면 의심은
해도 확신은 하지 못할 터였다.
분명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만.
보랏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살 짝 젖힌 고개는 꼭 날 업신여기는 것 같았다. 그 무표정도 묘하게 얄미웠고, '쫄았냐, 애송아?'라고 말하는 눈빛도 아니꼬웠다. 물론 내 개인적이고 악의적인 해석일 가능성이 다분했지만.
나는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가끔은 감으로
움직이는 것이 낫다는 걸 알고 있 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친놈을 상대 하려면 나도 미친놈이 돼야 했다.
'차라리 이판사판으로 가자.'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지그 문트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이거 하이드 씨 아니십 니까? 여기서 뵙습니다. 댁네 애 완 금붕어 윌터는 잘 지내나요? 당뇨로 고생하시더니 회복의 진척
은 있으시고요? 날씨가 추운데 감기는 안 걸리셨죠? 이맘때쯤이 면 늘 콧물로 고생하셨지 않습니 까. 저도 반갑습니다."
그래. 이번엔 내가 지그문트를 당황시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