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3화 (213/254)

213 화

"......내 호위 기사와 북부의 수 장이 구면인 모양이군?"

멍한 표정으로 나와 지그문트를 번갈아 본 헬리오스가 한참 입술 을 달싹이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 었다.

"무슨 사이인가?"

그는 새파란 눈을 내게 고정한

채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뭐라고 답하지?'

나는 눈을 데구르르 굴려 헬리 오스의 눈총을 피했다. 우선 저지 르긴 했지만 지그문트를 금붕어에 이름 붙여 주는 당뇨 걸린 콧물쟁 이로 만들어 버린 헛소리에 대책 이 있을 리 없었다. 옛 친구 비슷 한 것으로 둘러대려 입을 열었을 까, 지그문트가 더 빨랐다.

"아주 각별한 사이지. 한때 동고 동락하며 서로에게 목숨을 맡겼

다."

"......뭐라고?"

폭탄 발언에 장내가 크게 술렁 였다. 살갗 위로 따갑게 시선이 쏟아졌다.

카이사르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채 저 개소리가 사실이냐는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 고, 디에고는 차가운 이성이 깃든 눈빛으로 지그문트를 지그시 노려 보았다.

조금 전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

은 나는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올 렸다.

틀린 말은 없었다. 그 표현만 보 면 맞았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애 매모호한 단어들을 조합한 탓에 지그문트의 말만 들으면 나와 그 가 연인이었다고 오해하기 십상이 었다.

'그 동고동락에서 즐거움이 196 고 고통은 500%라는 게 문제겠 지. 마수 앞에서 살기 위해 합을 맞추며 불가피하게 목숨을 맡긴 것뿐이고, 사실 서로 목숨을 빼앗

으려 든 적이 더 많다는 것도.'

밥 한 끼만 같이 먹어도 인생에 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함께한 적 있다고 돌려 말할 놈이었다. 언어 의 마술사가 아니라 언어의 마귀 라고 불러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그......?"

아직 놀란 낯을 채 다 정리하지 못한 헬리오스가 더듬거렸다.

지그문트는 의뭉스러운 낯으로 아름답게도 웃었다. 아무런 대답

도 하지 않았지만, 딱 봐도 침묵 으로 수긍하는 것 같았다.

"......북측 총사령관과는 용병으 로 지내던 시절에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결국 한숨 섞인 투로 털어 놓았다. 연인으로 착각당하는 것 보단 한때 동업자였던 사이인 게 훨씬 나았다.

내 대답엔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기야, 제국의 훈련관이 북부의 사령관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제국의 명성에 누 가 될 터였다.

"우리가 동업자로 정의될 수 있 는 줄은 몰랐군."

"하하. 이제 아셨으니 됐습니 다."

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헛 소리를 하는 지그문트를 향해 입 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확실히 적절치 않긴 했다. 동업

자같이 정다운 것이 아니라 원수 니까.

"글쎄. 네가 카라쇼를 죽인 뒤론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그리고 지그문트는 내 인생 최 고의 개자식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답게 기어코 내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들었다. 아주 태연한 목소 리로.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순간 귀를 의심한 나는 물끄러 미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내 요 동치는 감정에 따라 장내의 공기 가 천천히 낮아지고, 가장 빠르게 이변을 느낀 카이사르와 노아가 나를 살폈다.

지그문트는 알고 있었다. 세상 모두가 몰라도, 지그문트만은 그 설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카라쇼에게 칼을 박아 넣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인간이, 저렇게 말해선 안 됐다.

'걸려 들어가면 안 돼.'

나는 천천히 이성을 붙잡았다. 너무 뻔하게 눈에 띄는 도발이었 다.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면 국제 적 문제가 일어날 테고, 모든 책 임은 내게로 돌아올 테니까. 그는 나와 제국 사이에 불화를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저도 총사령관님을 더는 동업 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업

자 사이엔 적어도 온다면 온다, 간다면 간다 말은 있지 않습니 까? 그런데 총사령관님은...... 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그 정도 공격엔 혼들리지 않는다 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이제 나는 카라쇼의 이름을 들 먹이기만 해도 이성을 잃을 정도 로 어리지는 않았다. 그녀가 덜 소중해져서가 아니라, 참을성을 배운 것이었다.

지그문트와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잠시 그를 노 려보던 나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 와 나의 기 싸움에 불편함과 의문 을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짧 게 한숨을 쉬며 목례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진심 한 점 없는 거짓말이었지 만, 이렇게라도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이곳은 중요한 회담 자리이 고, 나는 이곳에 정식 참가자가 아니라 그림자인 호위 기사로 참 석한 것이니까.

더는 내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려 선 안 됐다.

"하. 그래."

지그문트가 헛웃음을 뱉곤 고개 를 끄덕였다. 만약 더 잡고 물어 뜯었다면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사달을 냈 을지도 모르는데 다행히도 물러나 주었다.

"그럼......

다시 원래의 포커페이스로 돌아 간 그는 검은 장갑에 가려진 손을 까닥거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예고 없이, 허 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人、a 르|

■ O •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다. 검날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검날 사이로 마주치는 보랏빛 두 눈.

검 끝이 향한 곳엔 지그문트가 있었다.

"무슨 짓......!"

"그만."

지그문트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여자가 내 행태에 격분하여 마찬 가지로 검을 꺼내려 했을까, 지그 문트가 제지했다.

검을 눈앞에 두고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가 나를 바라보며 고 개를 기울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검 손잡이에서 손 떼십시오."

나는 3분의 1쯤 뽑힌 지그문트 의 검을 내려다보며 딱딱하고 기 계적으로 말했다. 회담에서 타 국 가 지도자에게 검을 겨누는 건 자 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짓이 었지만, 이번엔 타당한 명분이 있 었다.

"저는 황제폐하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검 도로 넣어 주십시 오."

제국에서 호위 기사들에게 내려 오는 제1 규칙은 '보호하는 사람 을 우선시해라'였다.

지그문트는 분명 검을 뽑으려 했고, 지그문트의 바로 앞엔 헬리 오스가 있었다. 지그문트가 어떤 의도로 꺼냈든 헬리오스에게 위협 적이었기에 나는 대항해야 했다.

내가 나섰기에 관둔 것뿐, 노아 와 카이사르 또한 지그문트를 막 기 위해 검 위에 재빨리 얹은 손 을 아직도 치우지 않고 있었다.

"설명을 하지 않았군. 유감이야. 검을 꺼내려 한 건 이 자리를 이 만 끝마치기 위해서다. 우린 그 자리에 검을 꽂아 두는 것으로 중 요한 자리를 파하니까."

지그문트가 태평하게 말하며 헬 리오스에게 눈빛을 보냈다. 지그 문트에게 검을 겨눈 날 그때까지 제지하지 않고 있던 헬리오스가 한숨을 쉬었다.

"크리시스 경. 거두게."

나는 희미하게 인상을 구기면서

도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헬리오 스의 호위 기사로 있는 지금, 그 의 명령은 내게 절대적이었다. 검 끝에서 벗어난 지그문트는 옅게 웃곤 자신의 검을 꺼냈다.

미리 말할 수 있었을 텐데도 뒤 늦게 말하며 분위기를 위협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에서 수완이 엿 보이면서도 대단히 재수가 없었 다.

"땅은 얼어붙어도 검에 깃든 뜻 은 온전하길."

지그문트가 탁자를 뚫고 설원 깊숙이 처박히도록, 검을 제 마나 로 감싸 힘껏 내리찍었다. 탁자에 구멍이 뚫리며 크게 흔들리고, 반 동이 사방으로 울렸다.

나는 그 충격에 바로 노출된 헬 리오스를 보호하며 지그문트를 노 려보았다.

지그문트는 놀랍도록 망나니처 럼 굴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까 지 제멋대로 구는 건 딱 두 가지

경우였다.

미쳤거나, 어떻게 되든 자신이 있거나.

"회담은 이것으로 끝이다."

지그문트는 주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방적이고 무례한 태 도였으나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따라 과묵하게 자리를 지 키던 북부인들도 자리에서 일어났 다.

"다음에 볼 땐 전쟁터에서일 거 다."

이미 모든 결정을 내린 듯한 목 소리는 시리고 단호했다.

펄럭, 검은 망토가 크게 휘날려 시야를 가렸다. 그는 이내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까지도.

북부인들 모두가 바깥으로 사라 지고, 바깥의 인기척도 순간이동 으로 증발하듯 사라졌을 때에야

침묵이 깨졌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지."

엘이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매서운 혹한 같은 목소리 로 중얼거린 그는 금방이라도 육 두문자를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이 었다.

"......북부가 미친 지도자를 얻 었군. 미치고 영악한 지도자를."

헬리오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 는 착잡해 보였다.

새로운 양면을 마주하며 모두 생각이 많아 보이는 가운데, 나는 한숨을 쉬며 문 틈새로 희미하게 보이는 천막 밖의 풍경을 응시했 다.

쏟아지는 눈발이 점점 더 굵어 지며 겨울 내음이 짙어지고 있었 다.

"슈슈. 날이 춥습니다. 이만 들 어가죠."

제국으로 순간이동하기 전에 짧 은 휴식 시간을 갖는 동안, 눈밭 에 서서 저 멀리를 한참 동안 바 라보던 나는 귓가를 울리는 익숙 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툭.

눈송이가 쌓여 서늘했던 내 어 깨 위에 코트가 걸쳐졌다. 나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곳에선 로즈 우드 향이 났다.

"라이너. 전 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아무리 질병에 걸리지 않으신다고 해도 견디는 것에 익숙해지진 않으셨으 면 좋겠습니다."

라이너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고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 잖습니까.'라고 덧붙이며 다정한 손길로 자신의 코트 단추를 잠가 주었다. 그의 코트는 크고 따뜻한 모포 같았다.

그 모든 것이 온기를 품고 있었 기에 시렸던 가슴께가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배시시 웃다 그

와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라이너는 전쟁이 일어나면 어 떻게 하실 겁니까?"

"으 "

O •

내 질문에 라이너가 고민하는 듯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는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큰 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잡으라 는 듯. 내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자,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더니 내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매만졌다. 추운 온도에 노출되며 차가워진

손이 그의 온기로 녹기 시작했다.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온통 창백한 세상 속에서도 빛 을 잃는 일이 없는 황금빛 두 눈 이 나를 담아냈다. 나는 손으로 퍼져 오는 온기를 만끽하며 그를 응시했다.

"주변 환경은 달라지겠죠. 하지 만 이 나라와 정의를 위해 살겠다 고 나섰던 제 마음도, 제게 주어

진 의무를 실행하고자 하는 의지 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굳은살로 조금은 거친 손끝이 내 손 틈새를 매만졌다. 맞붙은 손 위로 눈송이까지 떨어지며 두 배로 간질거렸다.

그 가운데 라이너는 웃었다.

"저는 여전합니다. 여전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 을 겁니다."

북극성은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지나도 늘 반짝이고 있었다. 그 불변함에서 나는 큰 위로와 안심 을 얻었다.

아무리 힘들어 빛이 보이지 않 을 것 같은 때에도 북쪽을 보면 당신은 여전히 그곳에 있겠구나, 그곳에서 빛나 주겠구나, 싶어서.

"그러니 혹여라도 염려하지 마 십시오. 눈보라가 몰려와 많은 것 을 휩쓸어 가도 저는 이곳에 있습 니다."

라이너는 꼭 내 생각을 다 아는

것처럼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 잠시 편안히 눈을 감았다. 눈이 내려 고요한 설원이 꼭 누군가의 품처럼 느껴 졌다.

"......저도 그렇습니다."

눈보라가 몰려와도 난 이곳에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킬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북부의 첫 침 공이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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