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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4화 (214/254)

214 화

날씨가 서서히 서늘해졌다.

푸르르던 초목에 알록달록한 물 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고, 얇던 겉옷은 두꺼워졌다. 창공이 높아 져서 하늘을 보려면 전보다 조금 더 고개를 쳐들어야 할까.

가을이 가까웠노라 신호가 올 때, 북부 또한 곧 오겠다고 초대 장을 보냈다.

"북동쪽으로 침공했다고 들었는 데. 아타라의 피해는 어느 정도인 가? 심각하다던가?"

"꽤 심각하다는군. 지원군을 파 병할 거라고 하네. 우리 아들이 이제야 꿈에 그리던 서점을 차렸 는데, 가게를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꼼짝없이 징병되게 생겼 네. 어쩌면 좋나......

나는 불안함과 우울함이 안개처 럼 짙게 깔린 거리를 가로질러 걸 었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과 신문 배달부들이 다급하게 나르는 신문들의 맨 앞장을 차지 한 건 하나같이 같은 주제였다.

[북부인들의 아타라 왕국 침공, 제국을 향한 선전포고』

누가 보다 버린 건지, 바닥에 나 뒹굴며 엉망이 된 신문이 내 발에 채였다. 고개를 숙여 걷느라 기사 의 제목을 저절로 읽게 된 나는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막을 수 없 었다.

회담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되 지 않은 시점에 북부는 아타라를 침공했다. 아타라의 북동쪽 끝자 락에 위치한 도시, 바슈칸은 쑥대 밭이 되었다.

현재 그곳을 점령한 북부는 그 곳에서 시작해 차차 아타라의 중 심 수도로 손을 뻗을 계획인 것 같았다.

'아타라는 제국의 북동쪽 지역과 맞닿아 있어. 아타라를 점령해 기 지국으로 삼아 제국을 치려는 거 겠지.'

축복받은 땅, 아타라. 아타라는 수많은 자원이 매장되어 있기에 대륙에서 손에 꼽을 만큼 부유한 왕국이었다.

'첫 침공 지역으론 굉장히 대담 하지. 성공하기 힘들겠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그들의 영토에서 천연 마석이 대거 발견되며 마도공학이 발전하 기 시작했고, 발전된 마도공학을 군사력에 접목시키기 시작하며 무 력에서 또한 쾌거를 이루었다.

때문에 점령하기가 대단히 힘들 겠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아타라 의 풍부한 자원과 재력을 모두 손 에 쥘 수 있었다.

'북부가 아타라를 복속시키는 건 반드시 막아야 해.'

제국이 아타라로 지원군을 보내 는 건 당연했다.

동맹국으로서의 조약과 의리가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였지만, 사 실 바리케이드로서의 몫을 톡톡히

하고 있던 아타라가 무너지면 제 국 또한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제국은 아타라가 지원군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억지로 보내야 할 판이었다.

"반갑습니다. 통행패를 보여 주 시겠습니까?"

황궁 정문으로 들어서자, 지키고 서 있던 익숙한 얼굴의 기사가 내 게 목례하며 정중히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머니에서 통행 패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가끔 마차가 답답하게 느껴질 땐 걸어서 출근을 했기에 그 또한 나를 알아보았을 테지만, 전쟁을 앞두고 경비가 삼엄해지며 아무리 익숙하고 친근한 사람이어도 반드 시 보안 절차를 거쳤다.

"확인했습니다. 태양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패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 이더니 나를 들여보내 주었다.

이제 겨우 동이 튼 새벽인데도

황궁은 북적거렸다. 아타라가 침 공당한 소식이 바로 어제저녁 제 국에 알려졌으니 오늘은 한참 바 쁜 게 당연했다.

나는 황급히 뛰어다니는 사람들 을 조금 안쓰럽게 바라보다, 노아 의 사무실로 향했다.

'의논해야 할 사항이 있네. 오늘 은 최대한 일찍 출근해 아침 훈련 이전에 내 집무실로 들러 줘야겠 네.'

오늘 새벽, 통신구를 통해 노아

에게서 연락이 왔다. 요즘 들어 통 잠에 들지 못해 새벽까지도 거 뜬히 깨어 있던 나는 연락을 확인 하자마자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서 이른 시간에 도착한 참이 었다.

확실히 보안이 삼엄해진 건지, 나는 노아의 집무실로 도착하기 전까지 예전엔 치르지 않았던 확 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번거로웠 지만 누군가 위험에 처하는 것보 단 나았다.

나는 황궁에 도착한 지 30분도

더 지나서야 노아의 집무실에 도 착할 수 있었다.

똑똑.

"기사단장님. 카슈미르 크리시스 입니다."

"들어오게."

그의 허락에 나는 문을 열고 집 무실에 들어섰다. 책상에 놓인 서 류가 전보다 배는 더 많아서 탑처 럼 쌓여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 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서류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리던 노아가 만년필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는 서류를 처리할 때면 쓰곤 하던 금테 안경을 벗곤 제 미간을 꾹 눌렀다. 세월이 깃든 그의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급한 요청이었는데 들어줘서 고맙네. 자는 사람을 깨운 건 아 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어차피 깨어 있었습 니다."

내 대답에 노아는 왜인지 날 물

끄러미 응시했다. 아인하르트 가 는 부자가 쌍으로 빙청옥결한 눈 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의 금빛 눈동자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중 심이 꿰뚫리는 느낌이라 분명 잘 못한 게 없는데도 자아성찰하게 되었다.

"자네, 요즘 잠 못 자나?"

그리고 노아는 실제로 사람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눈썰미를 가 지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쯤 되면 웬만해선

몸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 한 달쯤 밤을 새어도 조금 피 곤해 보인다 싶을 뿐, 제대로 된 상태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 래서 상태가 나쁠 때 괜찮다고 속 여 넘기는 게 쉬웠다.

'슈슈. 오늘은 잠 잔 거 맞나?'

다만 문제는 상대 또한 소드 마 스터일 때였다.

오늘 황궁에 오기 전에 카이사 르도 내 상태를 살피더니 얼굴을 굳혔다. 그는 내가 요즘 들어 잠

에 들지 못한다는 걸 귀신같이 알 아챘다. 같은 소드 마스터는 속일 수 없었다.

"네. 조금 설치긴 합니다."

그래서 나는 노아를 속이길 포 기하고 솔직히 토로했다. 걱정스 럽게 나를 살피던 노아가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대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게 북부와의 회담 이후인 것 같네 만. 맞지?"

"......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무겁게 수긍했다. 나약한 모습을 밝히기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전쟁으로 보복하지 않는다면 죽 은 내 형제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 지? 그들의 원한과 분노는 누가 풀어 주지? 땅에 스며든 피가 보 복해 달라고 울부짖는다.'

회담에서 지그문트가 남긴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와서야 돌이킬 수도 없다는 걸 알 면서도. 그것은 내게 불면증을 안

겨 주었다.

"얼마 전에 불면증에 좋다는 차 가 들어왔네. 암브로시오 왕국 서 부에서 재배한 약초지. 좀 나눠 줄 테니 자기 전에 마셔 보는 게 어떻겠나."

"그러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아의 사려 깊은 말들에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 였다.

처음엔 훈련관이 되기 위해 허

울로 그의 부관이 되었지만, 이젠 정말 친근한 사이였다. 그는 꼭 인자한 친할아버지 같았다.

"피곤할 테니 오래 잡아 두면 안 되겠지. 이렇게 부른 이유를 말해 주겠네."

마시멜로를 올린 핫초코처럼 따 뜻하게 풀어져 있던 금빛 눈동자 가 진지하게 굳었다. 나는 자세를 고치며, 이어지는 그의 말에 집중 했다.

"알다시피 얼마 전 아타라가 북

부에게 침공당했네. 제국은 지원 군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지. 그것 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 는 누가 지원군의 지휘관으로 가 느냐는 거야. 원칙대로라면 나나 크리시스 공작님 같은 지도자급이 가야겠지만, 우리도 국방을 방비 하느라 숨 쉴 틈도 없이 바쁘네. 그렇다고 아무나 보내기엔 아타라 문제 또한 심각하지. 적당한 지위 를 가진 유능한 지휘관이 필요 해."

고개를 끄덕이며 새겨듣던 나는 문득 노아를 바라보았다. 한 가지

가정이 내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 다.

" 설마......

" 맞네."

노아가 씨익 웃었다.

"그대가 지원군의 지휘관이 되 어 줄 수 있나?"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게...... 지휘관을 맡기셔도 되는 겁니까?"

나는 지금 노아의 부관이자 훈 련관으로 활동하고 있긴 했지만 지원군의 지휘관은 그것과는 급이 달랐다.

비유하자면, 기사단의 훈련은 여 러 파트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훈 련관으로서의 나는 그중 아침 훈 련만 맡는 과외 선생과 같았다. 하지만 지휘관은 아예 학교 하나 의 교장이 되라는 것과 같았다.

"그대는 내 부관이자 대리인으 로서 자격은 부족하지 않네. 이미

소드 마스터이니 강함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고. 용병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니 실전 경험도 충분 하겠지. 게다가 검술 대회 마지막 날 보니 아타라의 국왕과도 아는 사이더군?"

"아, 네. 친구입니다."

"다른 이라면 미친개처럼 날뛰 는 그 국왕 앞에서 찍 소리도 못 하고 휘둘리기만 하다 오겠지. 나 조차도 그를 통제할 수 있다고 확 신은 못 하겠네."

'뭔...... 레오 이 자식은 대체 어 떤 모습을 보여준 거지?'

나는 레오에 대해 논하는 노아 를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노아가 질린 표정을 지으며 거친 어투를 사용하는 건 혼치 않은 일 이었다.

나는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무 언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 다. 레오가 종잡을 수 없이 이리 저리 날뛰긴 하지만,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었다.

물론 제 형제와 세습 귀족들을 싹 다 참수시키고 왕에 올랐지만.

도덕관념을 지나치게 상실하기도 했지만. 말투도 오늘만 사는 것 같은 데다 성격도 어딘가 삐뚤어 졌지만••....

'미친개 맞구나.'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레오를 커 버해 보려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 아 겸허하게 인정했다.

확실히, 웬만한 사람이라면 가 봤자 레오에게 휘말리기만 할 뿐 의견도 못 내고 올 것 같았다. 노 아의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그대는 이 일에 적격일세. 여러 부분에서 놀라울 정도로 합당하 지. 다만 문제는 그대가 단체를 통솔할 능력이 있냐는 것인데

엄격하게 가라앉는 노아의 눈빛 에 긴장한 나는 목울대를 울렁였 다. 내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자 노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더 니 장난이었다는 듯 손을 휘저었 다.

"자네가 훈련관으로 일할 때 지

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았었네. 내 판단은 '차고 넘친다'였어. 그대는 병사들을 이 해하고 공감하는 동시에 군림할 줄 아는 지도자더군. 가장 완벽한 형태지."

손을 깍지 껴 모은 노아가 상체 를 굽혔다.

"황제 폐하께서 내게 지휘관이 될 이를 골라오라고 하셨고, 그대 만 괜찮다면 나는 그대를 지휘관 으로 올릴 생각이네. 그대가 없을 때도 기사단의 훈련은 그대가 짠

매뉴얼대로 진행될 테니 염려 말 고."

황금빛 눈동자가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어떤가. 해 보겠나?"

나는 살짝 시선을 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정말 전쟁이다.

노아가 내게 권하는 건 죽고 죽 이는 가운데 다른 이들의 사살을

명령하고, 한 번의 실수로 아군 수천 수만 명을 죽게 만들 수 있 는 지도자의 자리였다. 병사들이 야 시키는 대로 했다고 변명할 수 있다지만, 지휘관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면 장수들부터 잡아 죽이는 이유는 그들에게 모든 책 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책임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서, 나는 아마 전쟁이 끝나도 그 무게 에 짓눌려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네. 해 보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세요."

조금이라도 적은 사람이 죽게 하기 위해서.

내가 최고의 지도자는 아닐 테 지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의 지도 자였다. 그렇게 믿었다.

나 스스로는 자신이 없음에도 의심이 없는 것처럼 혼들림 없이 말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그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내 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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