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하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아인 하르트 후작이라면 그대를 선택할 줄 알았네! 그렇게 아끼고 돌던 부관을 드디어 내놓는군!"
내가 지휘관 직을 수락하자마자 노 아는 통신구로 헬리오스에게 연락을 보냈다. 꼭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곧바로 회신이 도착하고「일 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져 나는 지금 헬리오스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체통은 개나 준 채 로 낄낄거린 헬리오스가 자기 홍차에 각설탕 6개를 퐁당퐁당 빠뜨리고 휘 휘 섞었다.
나는 설탕물인지 홍차인지 모를 것 을 바라보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언제 봐도 괴상한 차 취향이었다.
"사실 내가 그대에게 직접 지휘관 자리를 내릴까 고민하기도 했네. 그 게 더 빠르고 명료하긴 하지. 하지만 크리시스 공작이 얼마 전에 내게 자
식들이 전쟁에 나가려 해서 고민이라 고 하소연했거든. 그 하소연을 듣고 도 그대를 지휘관으로 올렸다면...... 공작이 내 머리칼을 죄다 뽑아서 소 여물로 줬을지도 모르네. 방패막이가 좀 필요했지."
헬리오스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졸지에 이용당한 노아가 허허롭게 웃 었다.
"절 방패막이로 사용하셨다는 소리 를 제 앞에서 잘도 하시는군요"
"왜 이러나, '제국의 검' 아인하르 트 후작. 그대의 의무가 바로 날 지
키는 것 아니었나?"
"저도 공작님은 무섭습니다. 그분이 제게 대련을 신청해서 대련장이라도 날아가게 되면 폐하 사비로 재건해 주실 겁니까."
"하하! 그 정도는 내 사비로 처리해 주지. 그래도 공작이 그대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잖나. 나는 아주 물로 본 다니까. 일국의 황제를 말이야."
"송구하지만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 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정말 송구할 소리를 하는군. 그대 나 공작이나 무엄함에선 반란분자들 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네."
나는 의식의 흐름 같은 말들을 주 거니 받거니 하는 두 사람을 강 건너 물 구경하듯 관전했다. 둘이 황제랑 후작 때려치우고 희극 콤비로 진출해 도될것 같았다.
"어쨌든 그대나 나나 이 일에 적합 한 인물로 크리시스 영애를 생각했음 은 확실하지."
헬리오스가 웃음기 섞인 얼굴로 나 를 바라보았다. 심해의 푸른빛을 취 해 만들어진 작은 샘은 내 마음을 모 두 비추어 낼 듯 맑았다.
"그대는 제국의 황제와 황궁 기사 단장이 인정한 사람이네. 자부심을 가지고 다녀오게. 그곳에선 그대가 바로 제국의 얼굴이야. 그대의 행동 이 제국의 행동이고, 그대의 결정이 제국의 결정이 될 걸세."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미 몇 번이고 결심하己 이런 상 황을 바랐음에도 완전히 무르익지 못 한 나약한 마음은 여전히 내 속에서
꿈틀거렸다.
울렁거리는 속에 목울대를 울렁였 을까, 내 기색을 읽은 건지 조금 엄 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헬리오스가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씨익 웃었다.
"하지만 책임감이 무거운 만큼 누 릴 권리가 많은 법이지. 누가 그대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내가 바로 제국이 라고 하고 짓눌러 버리게. 아주 뻔뻔 하게 대접받고 오게."
"내가 바로 제국이라니...... 제 부 관에게 반역을 저지르라는 소리를 돌 려 하시는군요"
"거기선 나나 교황이나 크리시스 경이 뭐라고 하는지 모를 텐데 어떤 가? 그대가 무엄한 말을 했다는 소리 가 들려와도 눈감아 줄 테니 걱정 말 게."
뭉클하게 받았던 감동은 곧이어 시 작된 헬리오스와 노아의 희극 2탄에 깨져 버렸지만, 그래도 헬리오스가 한 말은 내 마음속에 깊게 남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받고 있었다.
"맞아, 아타라의 수도에 감자 포타
주를 그렇게 맛있게 하는 가게가 있 다더군. 가서 먹고 내 것도 좀 싸 서......
"황제 폐해"
헬리오스가 시답잖은 말을 조잘거 리고 있었을까, 시종이 다급하게 알 현실로 뛰어 들어왰다. 알현이 진행 되는 중엔 웬만한 일로는 저렇게 황 제의 말까지 끊으며 뛰어 들어올 수 없기에, 나와 두 사람 모두 얼굴을 굳혔다. 큰일이라도 난 건가 싶었다.
"무슨 일이지."
"그게••••••
헬리오스가' 눈매를 치키며 엄격한 황제로 돌아간 가운데, 시종이 들어 온 문 쪽을 곁눈질하며 헬리오스의 눈치를 살폈다. 헬리오스가 눈빛으로 압력을 주고서야 시종은 말을 이었 다
"지금 황후 폐하께서, 알현을 요청 하십니다."
'티나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크게 떴 다.
티나 키프로스 이 제국의 황후이자 2황제 세레논의 어머니. 세레논의 스 승으로 일할 땐 학부모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만났건만, 요 근래엔 바빠서 만날 틈이 없었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을 곱씹으며 상 념에 빠져 있었을까, 헬리오스가 다 급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나 지금 문제 없어 보이나?"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 까지 정리한 헬리오스가 초조해하는
표정으로 노아를 돌아보았다. 데이트 라도 하는 것처럼 외양을 다듬는 헬 리오스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 을까, 눈을 느리게 깜빡인 노아가 주 먹을 꽉 쥐었다 폈다.
그의 부관으로 지내오며 노아의 습 관들을 알게 된 바, 저건 그가 웃음 을 참고 있을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멀쩡하십니다. 백의 반절에 가까워 지는 연세이시면서 소년처럼 구시는 군요"
"......젠장! 오늘은 아침부터 바빠서 적당히 입고 나왔단 말일세!"
노아가 미묘하게 놀리는 투로 대꾸 하자, 헬리오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황제의 화려한 흰 제복 새로 얼핏 보이는 목덜미는 기이할 정도로 붉었 다
' 뭐지?'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흥미진진했다.
헬리오스에게 티나는 정략결혼 상 대이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키프 로스의 잔당일 뿐일 텐데. 게다가 티 나는 권력을 위해 디에고를 죽이려 하는 악녀로 소문이 파다할 텐데, 그 는 티나가 왔다는 사실에 불쾌해하거 나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 다
'그것보단......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울렁인 헬 리오스의 목울대를 응시했다.
그래. 헬리오스는 이례적이게도 긴
장하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 돌아가시라 전할까 요?"
"아니, 아니다."
미묘한 헬리오스의 태도를 심기 불 편해하는 것으로 읽은 건지, 소식을 알렸던 시종이 그의 눈치를 봤다. 이 를 급하게 저지한 헬리오스는 나와 노아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 황후가 동석해도 되겠지? 될 걸세."
저건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 반 쯤 강요하는 것이었다.
나야 티나가 불편한 것도 아니었기 에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己 노아는 잠시 입을 가리고 고개를 틀 더니-몰래 웃은 것 같았다- 마찬가지 로 동의했다.
"들라 하게."
의자 손잡이를 쥔 헬리오스가 시종 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티나가 모습을 드러 냈다.
그녀는 여전했다. 연보랏빛 단발머 리에 바다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 연 파란 눈이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그녀는 우아함을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았다.
사뿐히 다가온 티나는 흠잡을 데 하나 없는 몸짓으로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나와 노아 또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 은 티나는 우리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 에서 서 있었다.
"어쩐 일로 날 찾았나."
헬리오스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그 모습을 보고 역시 헬리오스는 티나를 싫어하는 건가 싶었지만, 문
득 본 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흐르 고 있었다. 헬리오스가 이렇게까지 긴장한 걸 처음 본 나는 놀라움을 감 출 수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와 미안해요 전할 말이 있어서요"
티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연보랏빛 이 도는 새하얀 속눈썹이 펄럭였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람치곤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눈을 든 그녀의 시선은 내게로 고 정되었다. 티나는 이곳에 온 후 나를
꽤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할 말이 많겠지. 테러 건 이 후에 한 번도 얘기를 못 했으니까.'
양심이 찔린 나는 그녀의 희뿌연 푸른빛 두 눈을 슬그머니 피해 버렸 다. 미르와 다른 사람인 척했던 것이 아직도 조금 미안했다.
"전할 말이라면?"
무심한 눈으로 제 손끝을 내려다본 헬리오스가 살짝 티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무심하고
차가운 태도였는데, 그러면서도 긴장 한 것처럼 혀로 입술을 자꾸만 축였 다
「재밌지 않나?」
그런 헬리오스를 흥미진진하게 바 라보고 있었을까, 머릿속으로 노아의 진언이 들려왔다. 나는 수긍했다.
「두 분은 사이가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글쎄. 처음엔 분명 나빴지. 정략혼 이었던 데다 황후 폐하에 대한 악질 적인 소문들만 가득했으니 말일세.
두 분이 따로 소통하는 일도 없었 고.」
노아가 티스푼으로 차를 휘저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그는 꼭 자식의 연 애를 지켜보는 부모 같았다.
「그때도 황제 폐하께선 마음이 있 었던 것 같지만.」
「마음이라 함은...... 정입니까?」
「오...... 그대는 역시 무디군. 사랑 말일세.」
나는 놀라서 헬리오스를 휙 돌아보 았다.
주의 깊게 들어 보자, 그의 심장 박 동은 비정상적으로 빠른 범주에서 뛰 고 있었다. 자꾸 혀로 입술을 축였己 드러난 피부엔 희미한 꽃물들이 들어 있었다.
'분명, 저런 걸 사랑이라고 했지.'
나는 뒤늦게 탄식했다. 떠오른 감정 이 사랑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건 어 려웠지만, 신체 변화를 읽는 건 쉬웠 다
헬리오스는 확실히 세간에 알려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신기합니다. 사랑에 빠진 人람은 처음 보거든요」
「......처음 본다고?」
내가 신문물을 본 어린아이처럼 감 탄하고 있으니 노아가 조금 떨떠름하 게 답해 왔다. 갸우뚱하며 그를 바라 보니, 그가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그대라면 질리도록 보는 것일 텐 데 음. 아니네.J
"잠시 귀를 빌려주시겠어요"
노아와 진언으로 떠드는 사이 티나 가 헬리오스에게 다가갔다. 헬리오스 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작게 말해도 소드 마스터인 나와 노아는 들을 수 있으니 형식적 인 행동이었다.
나는 티나가 다가갈 때 늘 유들거 리던 헬리오스의 몸이 뻣뻣해지는 걸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람 앞이면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많이...... 뻣뻣하 신데요.」
멍청하게 군다고 하려다 아무리 못 듣는다 해도 너무 무엄한 것 같아 살 짝 돌려 말했다. 노아가 피식 웃었다.
「원래 인간은 사랑 앞에서 멍청해 지는 법이네. 제국의 황제라도 예외 는 아니지.」
금빛 눈동자가 인자한 기색을 담은 채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 그대도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그대 앞에서만 유독 멍청하 게 구는 이들이 있으면 의심을 좀 해 보는 게 어떤가. 꼭 멍청한 모습이 아니더라도,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말이야.J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그대를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지 않나.」
그 말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얼굴이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 거리다, 티나를 돌아보았다.
헬리오스에게 다가간 티나는 그의 금빛 옆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더니 상 체를 굽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 다
나는 그 순간 정처 없이 방황하는 헬리오스의 두 눈을 발견했다. 헬리 오스는 정말 평소답지 않게 굴고 있 었다.
"오늘 밤에, 제 처소로 오세요 그 때 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티나는 조금 낮고 느릿한 목소리로 그리 속삭였다.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내 귀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폐하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황위 계승 절차는 제법 까다로우니까.」
노아가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어쩐지 절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시선도 먼 산으로 돌려 버린 나는, 그 가운데 헬리오스 의 호흡이 순간 멈췄음을 느낄 수 있 었다.
"용건은 이것뿐이네. 더는 방해하지 않겠네."
상체를 세운 티나는 무심한 목소리 로 선언하곤 가뿐하게 발걸음을 뗐 다. 그 여상스러움은 꼭 사람을 죽여 놓고 유유히 떠나는 암살자 같았가.
"아, 그리고 크리시스 경."
티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푸 른 눈에 여러 상념이 스치다 사라졌 다
"오늘 일이 끝나면 나를 보러 오게. 시간은 언제든 상관없으니."
그 말을 남긴 티나는 후련하다는 듯 미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가 이곳에 온 목적이 헬리오스가 아닌 나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 다
"하...
티나가 사라지자마자 헬리오스는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마른세 수를 하는 손 틈새로 슬쩍 보이는 그 의 얼굴은 확연히 붉었다.
'헬리오스는••... 이용당했나?'
혹시 그 또한 눈치챈 것인가 싶어 괜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을까, 헬리 오스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 나이에 주책이 따로 없군."
그가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 다
"이리 좋으니."
찗고도 굵은 고백이었다. 상대는 가 고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충 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감정에 미묘하게 기시감이 느껴 져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을까, 노아 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조금만 웃어 도 되겠습니까?"
"지금 나랑 장난하나?"
"송구힙니다."
"하1 그래. 웃게. 시원하게 웃어 보 게! 아주 날 조롱해 보지 그러나"
"하하하하!"
"그렇다고 진짜 웃나? 지금 웃음이 나오나?"
나는 또다시 시작된 희극을 보며 한숨처럼 웃었다.
아무리 봐도 헬리오스는 이용당한 것 같았지만, 본인이 저렇게나 좋아 하니 되지 않았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