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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6화 (216/254)

216 화

"불편한가?"

"네? 아, 아닙니다."

나는 잔을 쥔 손에 무심코 힘을 주다 화들짝 놀라며 힘을 풀었다. 잔엔 이미 금이 간 상태라 눈치를 보며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대를 질책하려 부른 게 아니 니 편히 있게."

티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잔에 입술을 대었다. 그녀 특유의 엄격한 분위기 때문 에 티나는 입만 다물고 있어도 한 나라의 멸망을 명령하기 전의 군 주 같았다.

탁.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희뿌 연 푸른색 눈동자가 날 똑바로 응 시했다.

"그대, 미르였더군."

"죄송합니다."

나는 양손으로 무릎을 꽉 쥔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미르와 다른 사람인 척하며 티나와 동업 했으니 그녀에겐 기만으로 느껴지 기에 충분했을 터였다.

"됐네. 어떻게든 도와달라고 도 움을 요청한 건 내 쪽이었고, 만 난 지 얼마 안 된 내게 숨기고 있 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는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라면 황족 기만죄에 해당 될 부분이지만."

"죄송합니다......

나는 쭈그렁 밤탱이가 되어 움 츠러들었다. 티나의 냉랭한 얼굴 은 늘 혼들림 없는 무표정이었기 에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 다.

"그대는 역시 황후를 할 재목은 아니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 티나가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욕을 먹

은 건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 을까, 티나가 피식 웃었다.

"그러기엔 지나치게 성정이 좋 아."

나는 그녀가 웃는 걸 그때 처음 본 것 같았다. 비소나 형식적인 웃음이 아닌, 여유와 편함을 담은 웃음 말이다.

"내가 그대를 부른 이유는 세레 논 때문일세."

"2황자님이 요?"

"그래. 그대, 이번에 아타라 왕

국 지원군의 지휘관으로 가지 않 나."

'어떻게 알았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티나를 바 라보았다. 오늘 막 정해진 사항인 데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티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궁에서 살며 느는 건 눈치 와 감뿐이네. 지휘관이 누가 될지 의견이 분분한 시점에 폐하께선 아인하르트 후작에게 인물 선정을

맡겼지. 그러던 와중 그대가 갑자 기 후작과 함께 폐하께 불려갔고.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다 알아차 렸을 걸세."

이 황궁에서 비밀은 없다는 사 실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을까, 티나 가 제 앞머리를 훅 쓸어 넘겼다. 나는 그녀에게서 평소답지 않게 초조해하는 기색을 읽을 수 있었 다.

크게 숨을 들이쉰 티나는, 한숨

처럼 말을 뱉어 냈다.

"세레논이 아타라의 지원군으로 출전하겠다고 나섰네. 그대가 그 아이를 말려 줬으면 하네."

"저하께서 요?"

나는 놀라 반문했다.

황족이 전쟁에 출전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기 위 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나서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아주 드물었다.

황제가 전시 상황에서 죽을 경 우 곧바로 남은 황족들 중 한 명 이 황권을 넘겨받아야 하는 만큼, 황족들은 안전한 곳에서 지켜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 아이는 황족으로서 침입 소 식을 조금 일찍 들었지. 그게 3일 전인데, 그날부터 가겠다고 고집 을 부리네. 말려도 소용없었지."

" 어째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더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서. 하지만 나서는 게 꼭 그 아이 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의무도 아닌데 대체 왜......!"

티나의 얼굴에 거친 감정이 일 렁였다. 그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한 손으로 얼굴을 덮고 숨을 골랐다.

마치 날아가야 하는 다 큰 아기 새를 놓아주지 못하는 어미 새 같 았다.

"세레논이 스승인 그대의 말을

잘 따르기도 하고, 그대가 지휘관 이니 정 안 되면 강제로라도 그 아이를 지원군에서 열외시킬 수 있지 않은가. 부탁하겠네."

티나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느리 게 입술을 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왜 저하를 막 으려 하시는 겁니까? 오히려 잘 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부러 무정하게 자아낸 내 물음 에 티나가 나를 휙 돌아보았다.

안개 낀 푸른 눈이 일순 이글거렸 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 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런 눈빛을 받고도 침착 하게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전장에서 공을 세우 신다면 한층 황제의 자리에 가까 워지실 겁니다. 게다가 키프로스 가 반란의 주범으로 기정사실화된 지금, 황위 계승의 판세를 뒤집을 수단은 전장에서의 공밖에 없을 텐데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티나가 탁자를 내리쳤다. 감정이 거세당한 듯 스스로를 완벽히 통 제하던 그녀가 폭발했다.

여태껏 험한 일 한번 해 보지 않은 듯 곱고 하얀 손은 그 한 번 의 내리침만으로도 새빨갛게 부어 올랐으나, 티나는 신경 쓰는 기색 이 아니었다.

그녀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인해 평소 페이스를 찾지 못한 채 간절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가 죽으면 권력이고 황 위고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일세!"

그 비명 같은 외침에서 티나가 세레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뼈 가 저리도록 느껴졌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사랑한 걸까.'

세레논 본인은 원치도 않는 왕 좌로 그를 몰아넣던 티나의 사랑 은 폭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마음을 진정 악의라 부르겠는가? 잘못되었어도 사랑은 사랑임을.

나는 우습게도 그런 티나에게서 과거의 나를 봤다. 사랑하는 방법 을 몰랐던 어린 나를.

"그럼 이제 세레논 저하께서 황 제가 되지 않아도 괜찮으신 겁니 까?"

티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 전히 버리지 못한 욕심이 그녀의

두 눈에서 일렁였다.

"저하를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 은 못 하겠습니다. 저하께서 바라 시는 것인데 강제로 열외시킬 자 신도 없습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 께서 그래도 괜찮다고 하신다면, 한번 설득은 해 보겠습니다."

사실 나는 세레논이 가고자 하 는 길을 응원해 주고 싶었지만, 티나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만류 정도는 해 볼까 싶었다. 티나 또 한 크게 결심을 한 것 같았으니 까.

"......아직 완전히 괜찮다고는 못 하겠네. 세레논을 황제로 올리 는 건 내 평생의 염원이었어."

티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굳은 의지가 서린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 다.

티나가 권력을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내가 검을 포기하고, 르웰린이 사업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부를 잘라 낸다 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조 차 앞으로 검을 잡지 못한다는 소 리를 들으면 크게 방황할 터였다.

"그러니 부탁하겠네. 세레논을 설득해 주게."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꼈다.

내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때.

"황후 폐하. 세레논 황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티나와 나는 시선을 교환 했다.

"들어오라 해도 되나?"

"전 상관없습니다."

내 긍정에 티나가 세레논의 출 입을 허했다.

곧 마호가니 목재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문이 열리고, 그 뒤로 익숙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어머니."

"왔느냐."

모자 간의 인사라고 보기엔 상 당히 딱딱한 말들이 지나갔다.

나는 미묘하게 굳은 표정의 세

레논을 보며 티나와 세레논이 꽤 치열하게 싸웠음을 파악할 수 있 었다.

원래 세레논이라면 실실 웃는 표정으로 일관할뿐더러, 애정에 목말라 티나에게 살갑게 굴었을 테니까.

두 사람 다 변화의 돌풍 한가운 데에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스승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티나에게 눈짓으로 무심히 인사 한 세레논이 날 돌아보며 환히 웃 었다. 나는 잠시 티나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스승님은 이제 제가 모 셔 가도 되겠습니까? 저도 나눌 대화가 있어서 말입니다."

세레논은 시원스럽게 말했으나,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서늘한 눈초리의 티나가 세레논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살얼음판을 걷는 기운이

감돌았다.

가족 싸움을 하시려거든 저는 빼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여 몸을 최대한 작게 만 들었다.

늘 실없이 웃는 듯하지만 실제 론 기가 굉장히 센 세레논과, 포 스의 화신과도 같은 티나의 싸움 에 끼었다간 좋은 꼴은 못 볼 게 분명했다.

'세레논을 설득해 보겠다고 한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 같지만.'

내가 뒤늦게 회의에 빠져 있었 을까, 눈싸움을 마친 티나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크리시스 경. 황자와 가 보도록 하게. 시간 내주어 고 맙네."

"아, 네. 저도 감사합니다."

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레논의 이끌림을 따라 나왔다. 티나는 그와 내가 나갈 때까지도

수심이 깊은 표정이었다.

"스승님, 너무한 건 아십니까?"

황후궁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 지 않아 세레논이 입을 열었다. 채도가 낮은 푸른색 눈이 날 원망 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미르라는 걸 귀띔도 안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그건......

"스승님과 대련을 할 때마다 규

격 외로 강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소드 마스터이셨을 줄은...... 그건 상상도 못 하고 알려진 소드 익스 퍼트들 중에 스승님이 있다고 생 각하고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말입 니다. 밝히실 때 제자인 저는 생 각도 안 나셨겠죠. 섭섭합니다."

"아니. 저는......

"그래도 제가 미르의 첫 제자인 건 맞죠?"

조금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하려 했을까, 세레논이 나를 뜨겁게 응 시했다. 그의 눈빛은 섭섭함과 함 께 묘한 흥분을 담고 있었다.

"이제 기사단의 훈련관이시라지 만, 기사단을 직속 제자라고 보긴 어려울 테니 직속 제자는 제가 유 일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아, 그렇죠. 맞습니다."

나는 이것이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키워드임을 깨닫고 황급 히 동의했다. 세레논은 걸어가다 말고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미르의 검술을 따라한다 뭐 한다 난리를 치는데 전 직접 배운 거군요."

세레논은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민망해진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다 주제를 바꿨 다. 본격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었 다.

"황자 저하. 아타라의 지원군으 로 가고자 하신다는 걸 들었습니 다."

세레논의 표정이 단번에 심각해 졌다. 그는 한숨과 함께 연보랏빛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사소한 습관까지도 티나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어머니가 만류해 달라 하셨습 니까?"

"......네."

세레논은 눈치가 빨랐다. 귀신 같은 눈치의 소유자인 아리아보다 도 예리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 그의 앞에서 거짓말은 무 의미하다는 걸 알기에, 나는 순순 히 수긍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스승님께서도

말리지 못하실 겁니다."

세레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의 희뿌연 푸른 눈이 분명한 빛을 담고 반짝였다.

"저는 전쟁에 출전할 겁니다. 그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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