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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7화 (217/254)

217 화

"이전에 나눴던 대화, 기억하십 니까. 스승님께선 제게 어떤 세상 을 추구하느냐 물으셨죠."

세레논은 중저음보단 미성에 가 까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몽환적인 목소 리는 호수의 요정이 연주한다는 하프 소리와 닮았을까. 귀를 기울 일 수밖에 없었다.

그 대화를 잊을 리 없었다. 세레 논의 생각을 알게 되었던 그날.

'모든 것엔 금이 가 있습니다. 이 금은 흠집처럼 보이기도 하지 만, 저는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수로 생긴 틈에서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 을 보셨다면, 틈을 막으려고만 하 지 말고 벽을 허물어 주십시오. 바깥의 빛과 마주해 주십시오. 외 면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세레논은 내 어머니가 쓴 상소

문을 들어 자신의 신념을 말했다.

"제가 원하는 세상은 그때와 같 습니다. 누구도 외면당하지 않는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저 같은 그림자조차도요."

세레논은 그때와 똑같은 꿈을 말했으나, 그때보다 훨씬 성장한 느낌이었다. 처음 봤을 땐 인형처 럼 멍하고 텅 비어 있던 푸른 두 눈은 이제 온전한 생기로 반짝이 고 있었다.

"아타라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검으로 싸우는 것 밖에 없죠."

세레논이 자신의 손을 꽉 쥐었 다 폈다. 달무리를 닮은 은빛 오 러가 그의 손에서 스파크처럼 튀 어 올랐다.

그는 소드 익스퍼트가 된 지 얼 마 되지 않았음에도 오러를 능숙 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수재는 수재네.'

나는 오러의 농도와 세기를 보 며 내심 감탄했다.

내가 갑작스럽게 일이 많아지며 세레논과의 수업이 잠정적으로 무 기한 중단되었는데도 세레논은 새 로운 스승을 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러 운용에 대한 실습 가 르침을 받지 못하고 독학을 했다 는 것을 감안하면 믿기지 않을 만 큼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걸 할 겁니다. 그것이 절 죽음으로 이끌 더라도요. 황족이 동행하면 아타

라 쪽에서도 저희 지원군을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할 거고, 병사들의 사기도 올라가겠죠.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데 위험하다는 이유 하나로만 물러설 순 없습니다."

세레논이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속으론 수긍하면서도 입매를 굳혔다.

"황족은 함부로 위험에 뛰어들 어선 안 됩니다. 존재만으로도 일 종의 상징이 되는 분들이니까요. 안전한 황궁에 남아서 하실 수 있 는 일도 분명 있을 겁니다."

"황궁은 형님께서 지키실 겁니 다. 모든 황족이 황궁을 비우는 건 안 될 일이라지만, 모든 황족 이 남아 있는 건 겁먹었다는 조롱 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 다. 2황자이자 오러 사용자인 제 가 나서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안 전합니다."

내 회유에도 세레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반박은 치 기로 인한 고집이 아닌 타당한 반 론이 었다.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뜻을

담아 웃었다. 세레논을 진심으로 친애했기에, 그가 내린 결심을 믿 고 응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스승을 이기려 드시는군요."

" 청출어람이죠."

내가 회유를 포기했음을 느낀 건지, 세레논이 한결 편하게 웃으 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황후 폐하께선 허락해 줄 마음 이 조금도 없으신 것 같은데, 설 득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세레논이 두 눈이 번뜩였다.

"저는 평생 어머니의 명령을 따 라 살아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절 진심으로 사랑하신다면 이제는 제 가 선택한 제 길을 응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데, 정 말 그러려나. 나는 세레논을 응원 하긴 했지만 속이 썩을 티나가 조 금 염려되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납득하실 때까지 설득

할 겁니다. 제 걱정은 아타라로 떠나면 오랫동안 스승님 얼굴을 못 본다는 것뿐입니다. 그리워서 어떡합니까."

세레논이 능글맞은 투로 분위기 를 풀었다.

'세레논은 내가 지휘관이 된 걸 모르는구나.'

하기야, 겨우 2시간 전에 결정 된 사항을 눈치로 알아차린 티나 가 경이로운 것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세레논을 향해 짓궂

게 미소 지었다.

"그 걱정은 붙들어 놓으셔도 되 겠습니다."

"네? 아, 자주 연락해 주시는 겁니까?"

"아마 질리도록 보게 되실 겁니 다."

나는 똑바로 말해 주지 않고 빙 빙 돌리며 의뭉스럽게 말했다. 지 금 말하기보단 나중에 깜짝 놀라 게 해 주고 싶었다. 세레논은 갸 웃하다가도 사람 좋게 웃어 보였 다.

"좋은 뜻이겠죠?"

"물론입니다."

'세레논이라면 뒤를 맡기기에 충 분하지.'

인간적인 마음으론 그가 위험해 지지 않길 바랐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세레논의 합류는 무척 든든한 소식이었다. 그는 누구도 반박 못 할 실력자이자 내 제자였 으니까.

내가 안도하고 있었을까, 세레논

이 뭘 물어보려는 건지 잠시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말입니다. 이건 별개의 이야기인데......

"아, 네."

"혹시 아리아 크리시스 영애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으 십니까?"

"••••••네?',

그리고 돌아온 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내가 어리둥절해서 되묻자, 세레 논이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같은 사교계에서 활동하다 보 니 만날 일이 많고...... 의례적으 로 선물해야 할 일도 간혹 있어서 말입니다. 그냥 알아 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주절거리며 내뱉는 말들은 그럴 듯한데도 왠지 변명처럼 들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왜 잘 키운 자식을 남한

테 보내는 부모가 된 것 같지.'

이상한 기분이 폐부를 잠식했다.

알려 주는 것이야 별로 어렵지 않은데도 왜인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아주 미세하게 붉어진 그 의 귓가를 보면 심술인지 뭔지 모 를 것이 불쑥 튀어올랐다.

나는 충동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아리아는 절 좋아합니다."

" 네?"

"아리아 크리시스 영애는 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단 말입니 다."

나는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날 바라보는 세레논에게 한쪽 입꼬리 를 비틀어 보였다.

"그 외에는 안타깝지만 잘 모르 겠군요. 저하께서 직접 알아보셔 야겠습니다."

유치하게 굴고 있다는 건 알았 지만 불퉁한 태도를 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쩐지 알려 주면 지는 것 같았다.

"아, 제가 직접...... 그렇죠. 맞 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반발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세 레논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은 굳은 의지를 담은 채로 반짝 였다.

"관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 른 사람에게 물을 게 아니라 당사 자와 부딪치며 직접 알아가는 게 맞겠죠."

명쾌해졌다는 표정을 지은 세레 논이 활짝 웃었다.

"이런 곳에서도 가르침을 주시 는군요.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감 사합니다. 무슨 뜻이신지 잘 알았 습니다."

'무슨 뜻이었는데......?'

나도 모르는 내 말의 뜻을 알아 차리고 교훈을 얻은 세레논은 황 무지에서 꽃 한 송이만 발견해도 신의 계시라고 혼자 깨달음을 얻

을 것 같았다.

"아리아는......

지이잉.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주머니에 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나는 곧 바로 그것이 엘에게서 받았던 엘 직통 통신구라는 걸 알아차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세레논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신구를 확인했다. 그곳에 적힌

메시지는 명료했다.

[아타라에 가는 슈슈에게 줄 게 있어요. 나를 보러 와 줘요. 최대 한 빨리.]

'대체 2시간 전에 결정된 사항 을 어떻게 안 거지?'

나는 탄식하며 혀를 내둘렀다. 티나야 같은 황궁에 있기라도 하 지만, 황궁에서 꽤 떨어진 신전에 있을 엘은 어떻게 알아낸 건지 감 도 잡히지 않았다.

그의 정보력은 과연 제국을 손 바닥에 두고 보고 있다는 교황다 웠다.

나는 통신구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저흐}. 죄송하지만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 호출을 받았습니다."

"벌써요? 나눌 얘기가 많은 데......

'최대한 빨리'라는 문장에 마음 이 급해졌다. 세레논은 아쉬워하

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 덕였다.

"제가 아타라에 갈 때 배웅 정 도는 해 주시는 겁니다."

"하하. 물론이죠."

배웅 정도가 아니라 같이 갈 테 지만, 나는 모르는 척 태연자약하 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나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 두 발 에 마나를 두른 채 나는 듯한 걸

음으로 빠르게 황궁을 벗어났다.

황궁과 신전은 마차로 10분 정 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 다.

마차보다 마나를 방출하며 내 다리로 달리는 게 훨씬 빨랐기에,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어 가 볍게 질주했다.

이제 귀족 자제가 된 만큼 이런 식으로 달리는 게 목격되면 품위 없다는 소리를 듣겠지만, 이게 익 숙하고 훨씬 편했다.

분침이 시계를 두 바퀴 더 돌기 전에 신전에 도착한 나는 푹 뒤집 어썼던 로브를 벗으며 신전 앞을 지키는 성기사들 앞에 섰다.

그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기본적인 확인 절차만 마치고 들 여보내 주었다.

"성하께선 패트로스의 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전에 들어서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신관이 허리 굽혀 인사하곤

내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나는 가볍게 목례한 뒤 발걸음을 옮겼 다.

패트로스의 길은 과거에 제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성기사의 이 름을 따서 만들어진 길로, 그 길 의 끝엔 영원토록 성수가 솟아나 는 샘이 있었다.

성수가 솟아나는 샘은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였기에 그 길을 별 다른 이유 없이 걸을 수 있는 건 성기사단장들과 대신 관들, 교황 정도가 전부였다.

원래였다면 나는 발조차 들일 수 없었겠지만 교황의 허락은 신 전 안에서 절대적이었으니 안 될 것이 없었다.

"들어가시죠."

신비로운 은빛 결정들로 장식된 입구 앞에서 멈춰 선 신관이 입구 를 가리켰다.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네곤 새하얀 비단 휘장을 걷었 다.

" 어흥."

그리고 걷자마자, 안쪽에서 느껴 지던 인기척이 훅 다가왔다. 백합 향이 후각을 잠식했다.

그가 뱉은 말은 낮고 잠잠한 음 정에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웠 다.

"와••••••악."

은빛 눈동자와 코앞에서 눈이 마주친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 다 예의상 놀란 척을 했으나, 내 뱉은 비명은 내가 듣기에도 지나

치게 무미건조했다.

"놀라 주는 건가요? 상냥하기도 하지."

엘은 소리 내어 웃더니 눈꼬리 를 휘어 접었다• 난 뻘쭘해져서 목덜미를 긁적이다 허리를 굽혔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

"그러게요. 회담 이후엔 처음이 네."

나긋하게 속삭인 그는 고개를

든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새 하얗고 길쭉한 손엔 여전히 험하 게 산 흔적이 엿보였다.

"같이 걸을까요? 길이 무척 예 브거든요."

그는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한 사 람치곤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갸웃했으나, 별일이 없는 게 다행이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 이곤 그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맞잡은 손으로 온기가 퍼졌고,

엘은 내가 가볍게 잡은 손을 단단 히 깍지 껴 잡았다.

페트로스의 길은 푸른 잔디밭 가운데에 곧게 나 있었다.

지금은 이른 오후인데 내부는 신기하게도 밤처럼 어두웠다. 은 색 불빛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주위를 밝히는 모습은 과연 장관 이었다.

가끔 피부에 닿으면 곧바로 흡 수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걸 보아 불빛들의 정체는 신성력인

듯했다.

"꼭 반딧불이 숲 같습니다."

"그렇죠? 무척 예뻐서 이곳에 올 때마다 슈슈와 함께 걷고 싶다 는 생각을 했어요."

엘이 나와 발맞추어 걸었다. 잠 시 대화가 멈추면, 주위는 바람 소리조차 없이 조용해 그와 나의 숨소리만 고요 속을 헤집었다.

진공 상태에 있는 듯 붕 뜨고 몽롱한 가운데 엘과 맞잡은 손의 온기만이 온전했다.

엘과 단둘이 세상 바깥으로 여 행을 나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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