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화
살짝 나를 돌아본 그가 슬프게 미소 지었다.
"지원군의 지휘관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줬으 면 좋겠지만...... 당신은 들어주지 않겠죠?"
나는 그저 웃었다. 이미 엘은 내
가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 고 있을 터였다.
은빛 속눈썹이 잠시 파르르 떨 리다, 한숨과 함께 떨림이 잦아들 었다.
"다 놓고 함께 가고 싶은데, 그 것도 허락해 주지 않을 거고요."
"엘 "
"알았어요. 안 그래요."
내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그는 붉은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순순히 물러섰다.
은색 불빛들은 막강한 신성력의 소유자를 알아본 듯 엘에게 달라 붙었는데, 불빛에 휩싸인 그는 이 제 막 강림한 신처럼 신비롭고 성 스러워 보였다.
"강하다는 걸 알아도 염려돼요. 슈슈를 많이 좋아하니까. 소드 마 스터에게라도 전쟁은 위험할 텐데 다칠까 봐 걱정돼요."
엘은 눈매를 축 늘어뜨리며 나 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빛 눈 동자는 물에 젖은 새하얀 백합 꽃
잎처럼 촉촉하고 애처로워 보였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저 표정과 눈빛엔 늘 약해졌다.
"내가 따라다니면서 내 신성력 으로 치료해 주고 싶지만...... 그 럴 수 없으니 다른 걸 준비했어 요."
"야! 이 미친 새끼야! 벼락 맞을 놈아! 내려 달라고!"
탁
엘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느새 우리는 자체적으로 은은한 빛을 내뿜어내는 샘 앞에 도착해 있었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비명 이 들려온 천장을 향해 시선을 돌 렸다.
천장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 여 있어 높이조차 가늠하기 힘들 었으나, 나는 희끄무레하게 매달 려 흔들리는 인영을 확인할 수 있 었다.
"슈슈 전용 반창고 정도로 생각 하고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녀요. 아주 조그만 흠집도 바로 치료해 야 해요."
"미친놈아, 내가 성수 샘에 토하 는 꼴을 정말 봐야겠냐? 거꾸로 매다는 건 너무하잖아!"
"말 잘 듣는 물건이면 좋았겠지 만 안타깝게도 반항기가 조금 있 는 인격체네요. 혹시라도 기어오 르면 짓이겨 버려요. 폐기시켜도 괜찮아요."
"아타라 갈게! 가면 되잖아! 젠 장, 드디어 사교계에 재미 좀 붙 였는데 그렇게 추방시켜야 속이
시원하냐! 이 천하의 개자식! 악 마도 네게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할 거다!"
엘이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일 때, 위쪽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고 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는 거울을 보면 혼들리고 있 을 게 분명한 두 눈으로 천장과 엘을 번갈아 보았다.
엘은 빙긋 웃곤 허공에 내려와 있는 정체 모를 밧줄을 붙잡았다.
"선물이에요."
촤르르륵.
"꺄아아아악!"
하얀 손이 밧줄을 잡아당기면,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찢 을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 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자체적으로 신비로운 빛을 내뿜 는 성수의 샘.
라의 안배이자 축복이라고 불리 는 그 고귀한 성소 위엔, 무언가 가 왼쪽 오른쪽으로 시계추처럼 혼들리고 있었다.
"흑, 공녀니이임......! 살려 주세
초췌한 얼굴의 대신관 율리안이 머리에 커다란 리본을 단 채 밧줄 로 꽁꽁 묶여 거꾸로 매달려 있었
나는 경악에 빠져 그 모습을 바
라보다 혼들리는 눈으로 엘을 돌 아보았다.
"마음에 안 드나요?"
엘은 잘못된 것을 모르는 아이 처럼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 울였다.
나는 새삼 다시 느꼈다.
엘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 이었다.
"우선, 우선 율리안부터 내려 주
세요."
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태양신 라를 열성적으로 믿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율리안이 제국의 보물에 토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래, 새끼야! 공녀님 말 안 들 려? 날 내리라시잖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율리안이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소리치자, 눈썹을 살짝 꿈틀거린 엘이 곱게 눈꼬리를 늘어뜨리더니 밧줄을 조 금 더 풀었다.
촤르륵.
"갸아아악!"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던 율리안 과 샘 사이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 어들었다. 고운 은발이 샘의 수면 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며 샘에 서 솟아나는 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나, 나를 성수의 샘에 무자비하 게 담가 버릴 셈이지! 퐁듀에 꼬 치 담그듯! 흐아악!"
"불구덩이가 아니라는 것에 감 사해야 할 텐데."
"태양신 라이시여! 세상이 대체 왜 이럽니까'! 인간적으로, 아니 신적으로! 인성 쓰레기를 당신의 사자로 택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닙 니까! 귀엽고 착한 나를 택했어야 지!"
"네 신성모독에 경악을 금치 못
하겠구나."
율리안이 소리를 지를 때 엘은 태연자약하게 놀란 투를 꾸며 내 며 대꾸했다.
태양신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율 리안이나, 성수의 샘 위에 대신관 을 달아 놓은 엘이나 신성모독이 수준급이었다. 지금 당장 심판의 벼락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리 쳐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떫은 눈으로 엘과 율리안 을 번갈아 보다가 엘의 새하얗고
넓은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 다. 엘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내려 주세요. 어지러울 것 같습 니다."
저러고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 으나, 율리안은 피가 머리에 쏠릴 대로 쏠린 것처럼 보였다. 엘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명하신 대로."
그는 품에 손을 넣어 은빛으로 반짝이는 단도를 꺼냈다.
쉬이익!
단도가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고 날아갔다.
엘이 던진 건 분명 위험하기 짝 이 없는 날붙이임에도 그의 동작 이 지나치게 가볍고 우아해 꽃다 발을 던진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았
서걱.
칼날이 율리안과 천장을 잇고
있던 팽팽한 밧줄을 시원하게 잘 랐다.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
풍덩!
평민들은 일평생 한 방울 구경 하기도 힘든 고귀한 성수가 사방 으로 튀어 오르고, 율리안이 샘에 빠졌다.
나는 엘을 돌아보았다. 나와 눈 이 마주친 그는 눈꼬리를 휘며 어 깨를 으쓱였다. 내려줬는데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모두 뒤로한 채 급하게 샘으로 달려갔
"율리안! 살아 있습니까?"
신비롭게 반짝이는 샘에선 대답 이 돌아오지 않았다. 뛰어들어서 라도 건져 와야 하나 고민할 때, 수면이 일렁였다.
촤아악!
"푸학! 켁
율리안이 수면을 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머리칼이 축 늘어 졌고 연보랏빛 눈동자에 그림자를 만드는 기다란 은색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가 숨이 부족해 헐떡거리자, 물에 젖은 새하얀 신관복 아래 투 명하게 보이는 흉부가 움직였다.
여태껏 넉넉하고 금욕적인 신관 복만 입고 다니니 몰랐건만 이제 보니 율리안은 몸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율리안은 객관적으로도 대단히 잘생긴 청년이었기에 장면만 보면 <요정 호수의 축복을 받은 사내> 같은 제목의 명화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으나, 상황은 영 아니었 다.
"온몸에 토마토 소스 바르고 식 인종 마을에 던져질 놈...... 하라 바나 아가리에 머리 낀 상태로 하 라바나랑 같이 투명화될 놈......
율리안은 생전 듣지 못한 창의 적인 욕들을 중얼거리며 개헤엄을
쳐 샘을 빠져나왔다.
그가 가까스로 땅에 서자 반짝 이는 물방울들이 비처럼 잔디밭에 쏟아져 내렸다.
'오......
사람은 물에 젖으면 배로 야해 보인다는데,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진실인 듯했다. 물에 젖은 신관복 은 이전의 금욕적인 자태와 옷으 로서의 기능을 모두 잃고 율리안 의 잘 짜인 몸을 그대로 드러냈
어쩐지 보면 안 될 걸 본 기분 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고귀한 성수로 목욕하는 경험 을 또 언제 해 보겠나. 내 친우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렇게 증명하게 되는군."
"너...... 장난하냐?"
"성수가 신성력 사용자에게 얼 마나 좋은데. 피부가 아기 피부 같아졌구나."
"과유불급이다, 미친 새끼야! 지 금 온몸에 꿀을 뒤집어쓴 느낌이 라고!"
율리안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 린 채로 물놀이를 끝내고 나온 개 처럼 머리를 혼들어 머리카락의 물을 털어 냈다.
하기야 율리안 정도의 신성력 사용자라면 신성력에 상당히 예민 할 텐데, 온몸에 신성력이 가득한 성수를 뒤집어썼으니 느낌이 이상 할 터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만...... 한가 하게 인사할 상황은 아니군요. 괜 찮습니까?"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여 수건을 찾아내고 율리안에게 던져 주었다.
푸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던 율 리안이 수건을 낚아채더니 비 맞 은 개처럼 안쓰럽게 울상을 지어 보이곤 내게 안길 기세로 달려왔 다.
"공녀님......! 허엉......!"
"아, 잠깐. 거기, 거기 계세요."
내가 두 손을 들어 다급하게 제
지하자, 달려오다 우뚝 멈춰 선 율리안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
나는 시선을 애매하게 돌렸다.
"그...... 좀 많이 선정적이십니 다."
" 으음?"
용병으로 살며 이성의 벗은 몸 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었지 만, '잘생긴' 이성의 몸엔 면역이 없었다.
내 말에 율리안이 갸우뚱했을까, 엘이 섬광처럼 움직여 율리안의 목덜미를 붙잡더니 그를 잔디밭에 처박았다.
"켁! "
"못 볼 것은 제가 처치했으니 안심하세요."
율리안의 입에 푸르른 잔디가 들어가거나 말거나, 엘은 상큼하 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는 우아한 손길로 자신이 입 고 있던 교황 정복 겉옷을 벗곤
율리안 위에 살포시 덮어 주었다. 실로 병 주고 약 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믿음직스럽지 못하지만 신성력 하나는 나 다음이에요. 목숨만 붙 어 있다면 뭐든 살릴 수 있어요. 가끔 손 시리면 손난로로도 유용 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신 성력은 따뜻하니까."
물에 젖은 데다 흙까지 묻어 만 신창이가 된 율리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날 때, 엘은 만능 도구를 판 매하는 사람처럼 그를 소개했다.
나는 율리안이 진심으로 안쓰러워 졌다.
"저야 함께 간다면 든든하겠지 만...... 율리안은 저와 같이 가도 괜찮은 겁니까?"
나는 너덜너덜한 율리안을 걱정 스럽게 바라보았다.
대신관의 신성력은 기적에 가까 웠다. 대신관 한 명은 보통 의원 백 명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 었다.
전쟁에서 공격수만큼이나 중요 한 게 의료진인 법. 율리안이 함 께 가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느 낌이겠지만, 딱 봐도 가고 싶지 않아 보이는 율리안을 강제로 끌 고 가고 싶진 않았다.
"으, 네 냄새 나."
율리안은 제 어깨에 둘러진 교 황 정복의 냄새를 킁 맡더니 썩은 표정을 지으며 옷을 내팽개쳐 버 렸다.
그사이 냄새가 옮겨 붙어 향긋
한 백합 내음이 나게 된 율리안은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축축한 머리를 벅벅 긁적였다.
"공녀님과 함께 가는 게 싫은 건 아닙니다. 아타라가 싫은 것도 아니고요. 숭고한 사명을 가지고 전장의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거, 좋죠. 그런데 사실 제가 요즘 제 국 사교계에 재미를 붙여서요."
요즘 들어 율리안의 사교계 행 보가 꽤 늘어났다는 걸 아리아에 게서 들은 것 같긴 했다.
율리안이 연보라색 눈동자를 데 구르르 굴렸다.
"그...... 사실 공녀님의 동 생...... 컥!"
율리안이 말을 잇지 못하고 명 치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토했다. 엘이 손날로 그의 명치를 내려친 탓이었다.
얼마나 세게 맞은 건지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는 율리안의 귓가에 엘이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 으나 내가 듣지 못할 리는 없었
"잘 다녀오면 크리시스와 신전 의 협업을 제안해 사업 핑계로 만 남을 주선해 주마."
반항기가 가득하던 율리안의 두 눈에 순식간에 총기가 돌았다. 급 하게 숨을 들이쉬어 호흡을 고르 게 한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다.
"절대 아타라로 갑니다. 저는 공 녀님의 귀여운 설탕과자입니다."
나는 순식간에 태세를 변환한 율리안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아리아를 싸안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오늘 유독 자주 들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