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19화 (219/254)

219 화

아타라 지원군의 지휘관으로 가 기로 결정된 지 사흘이 지났다.

마음 같아선 정해진 그날에 주 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지 만, 공식 발표가 나는 사흘 뒤까 지만 대외비를 지켜 달라고 했기 에 말하고 싶어도 참고 있었다.

"아리아...... 뭐...... 해?"

여느 때와 같이 검술 수련을 끝 내고 샤워를 한 뒤 덜 마른 머리 를 대충 말리면서 나왔을 때, 나 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아리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 니 처연하게 감아 버렸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어 서."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바닥에 그 대로 널브러지듯 누워 있는 아리 아의 주위엔 아리아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염이 거세게 불타고 있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이었기에 망정 이었지, 공작가 저택이 나무로 지 어져 있었다면 진작에 불이 번졌 을지도 몰랐다.

"왜, 왜 그래? 응?"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불꽃을 헤 치고 그 중심으로 들어가 아리아 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아리아의 불꽃은 나를 해치지 않았다.

내 목에 팔을 둘러 안긴 아리아 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언니가 아타라에 간다고 들었 어."

" 아."

"나도 가고 싶었는데 의료부는 지원을 받지 않는대."

푸른 눈은 울적함이 가득했다. 나는 죄책감이 솟아나는 걸 느끼 며 아리아의 짧은 머리칼을 부드 럽게 쓸어 주었다.

"금방 다녀올게. 안전히. 응?

"......걱정돼."

아리아가 내게 더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리아의 어리광이 었다. 나는 미안하면서도 어쩐지 기뻐져서 작게 웃었다.

아리아는 아직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였다. 이 정도는 그 나 이답다 싶었다.

"괜찮을 거야. 네 언니는 강하잖 아."

나는 아리아를 달래며 그녀를

안은 채로 내 방에 들어갔다. 그 리고 보이는 광경에 헛숨을 들이 쉬었다.

"••••••칼?"

180cm를 웃도는 장신이 시체처 럼 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나 는 아리아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널브러진 인영을 쿡 찔 러 보았다.

"마법사는...... 지원을 받지 않 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2황자에 대신관까지 가는데 공작가 자제가

둘이나 더 붙으면 그건 지나친 인 력 낭비라 국제적인 이미지상 문 제가 된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우울한 듯 축 처 져 있었으나, 눈빛은 사람을 찢어 죽여도 열댓은 더 찢어 죽일 듯 살벌했다.

그 또한 아타라 지원군에 지원 했으나 반려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마치 내일 당장 마왕의 신 부가 되어 팔려가기라도 하는 것 처럼 절망에 빠져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 조 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족끼리...... 시간을 좀 가질 까요? 같이 차 마시러 갈 사람?"

"아리아는 갈 거야."

"칼도 간다."

그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는 두 사람이란.

아직도 순진하고 귀여웠다.

셋이서 외출하는 것은 오랜만이 었다.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를 탄 우리는 수도의 번화가로 향했 다. 은근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 하는 칼과 아리아를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이동하는 시간이 즐거웠 다.

"이 찻집, 내 거야."

" 정말?"

마차가 번화가의 중심에서 성황 을 이루는 찻집 앞에 멈춰 섰을

때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찻집을 살 폈다.

빈티지풍의 찻집은 외부만 봐도 기획자의 실력이 느껴질 만큼 감 각적이 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판에 적힌 가격은 평민들이 오기에 저 렴하지는 않았지만 한번 기분 낸 다는 생각으로 지불할 수 있을 만 한 가격이었다. 귀족과 평민 모두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네스랑 바디체인 말고 다른 사업들에도 투자하고 있다는 소리 는 들었는데, 찻집에도 투자했구 나.'

아리아의 수완을 생각하며 새삼 감탄하고 있었을까, 아리아가 제 뺨을 긁적거렸다.

"사실 만든 지 좀 됐어. 늘 언니 랑 오고 싶었는데, 많이 바빠 보 이더라."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가시를

품고 원망하는 게 아니라 묵묵하 게 사실을 말하는 투라 더 가슴이 아팠다.

아리아가 아무리 천재적이고 어 른스러워도 아직 어렸다. 카이사 르가 애를 쓰곤 있지만, 아리아와 나만큼의 애착을 쌓긴 힘들었다. 내가 아리아에게 부모만큼의 사랑 을 줘야 했다.

"••••••미안."

"으응.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 었어."

마부가 말에서 내려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사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아는 나를 뒤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 짓말이겠지만, 섭섭함보단 자랑스 러움이 더 컸어. 언니는 부러울 정도로 훨훨 날아갔으니까. 가문 의 도움 없이 언니의 힘만으로 하 나하나 성취해 가는 모습을 보며 자극도 받았고."

좁은 집에서 용병 일을 하고 돌 아온 날 맞이할 땐 죽어 있던 하

늘빛 눈이 이젠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깔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 까. 광활한 하늘의 색채보다 더 청명했고, 신비로운 푸른 나비의 날개보다 더 투명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서, 크리시스 가문에서 투자받은 돈을 모두 청 산하고 내 힘만으로 사업을 이어 가 볼 거야."

나는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 아직 도움을 받아 마땅한 나이건

만, 너무 이른 생각이 아닌가 싶 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심각한 표정을 한 칼이 아리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는 투자를 받은 게 아니라 가문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지원을 받은 것뿐이다, 아리아 크리시스."

'크리시스'를 유독 강조해서 발 음하는 그에게서 상냥함이 엿보였 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아리

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저 었다.

"공작가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부채감 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모두 청산하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설 때, 그때 진정한 어른으로 독립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아리아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 명 시선은 찻집 언저리를 바라보 고 있는데도 어쩐지 아득한 미래 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한 사람이 될 거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 아도 될 만큼."

공들여 쌓아 올린 돌탑처럼 단 단한 목소리엔 토를 달 수 없었 다. 저건 혼자 살겠다는 선포가 아니라, 좀 더 성장하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아리아의 선택을 묵묵히 존중했다.

"너도 참 재밌는 인간이다."

칼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흥미로 번뜩이는 붉은 눈은 그 어 느 때보다 따사로워 보였다.

나는 조금 놀랐다.

'사이가 많이 좋아졌나 보네.'

처음엔 서로가 철천지원수처럼 굴더니 이젠 친밀해 보였다. 특히 나 아리아를 보는 칼의 눈빛은 전 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뭐랄까, 사랑스러운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눈빛을 분석하고 있었을까, 아리 아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라고, 콩 크러스트."

"취소다. 여전히 지랄 맞군, 알 로에."

내가 잘못 본 것 같았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를 자연스럽게 비집고 들어가며 찻집 문을 열었다. 둘은 싸우던 걸 멈

추고 내 뒤를 따라왔다.

"안녕하세, 헉, 사, 사장님?"

상냥하게 인사하던 계산대의 직 원이 아리아를 발견하곤 당혹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검은 눈 동자가 크게 혼들리고 있었다.

'업무 중에 갑자기 사장이 들이 닥치면 당황할 만하지.'

나는 백번 이해하며 속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예고도 없이 사장에게 업무 점 검을 받게 생겼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기분일 터. 나는 갑 작스레 분주해진 직원들을 보며 조금 미안해졌다.

"업무 문제로 온 게 아니니 긴 장 풀어요. 오늘은 가족들이랑 차 마시러 나온 거니까."

사교계에서 으레 짓곤 하는 비 즈니스용 미소를 띤 아리아가 사 뿐하게 계산대로 다가갔다.

계산대를 지키고 선 직원이 바

짝 긴장했다. 오너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아리아는 무척 생소했다.

"둘 다 뭐 마실래?"

"페퍼민트로."

"난 홍차면 돼."

이왕이면 사과잼 넣은 게 좋겠 지만, 집에서 마시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요구할 생각은 없었

아리아가 눈을 들어 물끄러미 메뉴판을 살폈다.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직원 이마의 땀방울이

번식했다.

꽤 시간이 걸린 끝에, 아리아는 입을 열었다.

"페퍼민트티 하나, 사과잼 넣은 홍차 하나, 그리고......

내 취향을 알고 있는 아리아가 신경 써서 주문해 준 게 기뻐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찰나, 아 리아의 산홋빛 입술이 샐쭉 휘었

"시나몬 향 추가한 밀크티 한

잔, 청귤 조각 얹고 물은 미지근 하게 한 레몬티 두 잔, 아, 한 잔 은 레몬청을 반만 타 주고. 애프 터눈 디저트 세트 제일 큰 사이즈 하나. 치즈케이크는 바나나 크레 이프로 교체해 주고 헤이즐넛 향 은 모두 초코 향으로 바꿔 주세 요. 참, 햄을 살라미로 교체한 햄 치즈샌드위치도 하나요."

저건 테스트다.

길고 장황한 주문을 들으며 나 는 확신했다.

아리아가 저렇게 많이 먹지도 않을뿐더러-저게 나오면 다 나한 테 먹일 게 분명했다-, 그녀의 취 향은 간단하고 깔끔해 저렇게 장 황하게 주문할 리 없었다.

"그, 금방 신경 써서 준비해 드 리겠습니다!"

황급히 주문을 받아 적기 시작 한 직원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리아의 곧은 눈썹이 꿈 틀거렸다.

"신경 써서 주겠다고요?"

"네! 절대 실수가 없도록......!"

"그러면 안 되죠, 펠튼 씨."

곱게 휜 푸른 눈이 희번덕거렸 다.

"늘 완벽해야 하잖아요, 우리 찻 집은. 사장인 내 주문뿐 아니라 모든 주문에 최선을 다해야죠."

아리아의 카나리아 같은 목소리 는 소름이 끼치도록 나긋했다. 안 쓰러운 미스터 펠튼은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자신의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 아리아가 화려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하세요. 평소처럼. 기 대하고 있을게요."

창백해진 펠튼은 그 잠시 동안 50년은 늙은 얼굴로 세차게 고개 를 끄덕였다.

나는 아리아의 부하 직원이 아 니라 언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칼과 아리아, 그리고 나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찻집은 고즈넉한 분위기였는데, 주문한 음료와 디저트를 내오는 직원이 떨다가 케이크 접시를 놓 치는 바람에 내가 낚아채 잡아야 했던 작은 해프닝을 제외하곤 완 벽했다.

"오늘 하루 가게 닫으라고 할 까?"

아리아가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넌지시 물었다. 나는 피식 웃곤 고개를 저었다.

물론 사방에서 화살처럼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럽긴 했다. 칼과 아 리아가 워낙 거물인 탓에 모두 이 쪽을 힐끗거렸다.

나는 그 사이에 껴 덩달아 시선 을 받고 있었다.

"가끔 북적거리는 것도 좋잖아. 사람 구경하는 거지."

사람들의 집중에 익숙해진 나는 큰 감흥이 없었다. 내 반응에 안 심한 듯 길게 숨을 뱉은 아리아가 타르트를 조금 베어 내 입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먹 었다.

"이것도 먹어라."

그런 나와 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이 청포도 한 알을 따 내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나는 먹고 있던 것을 급히 삼키곤 포도 를 받아먹었다.

칼과 아리아가 시선을 교환했다. 다정한 우애가 담긴 눈빛이 아닌,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갑자기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손주를 먹 이는 할머니처럼 내게 음식을 들 이밀기 시작했다.

"넌 많이 단 걸 안 좋아하는데 아리아 크리시스가 센스가 없군. 과일 많이 먹어라. 과일."

"아닌데? 언니는 내가 주는 건 다 좋아하는데? 저 더러운 손으 로 주는 거 말고 내가 주는 거 먹 어."

여기저기서 밀려 들어오는 음식

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그 무엇도 거절하지 못한 채 얌전히 받아먹었으나 곧 볼이 아프도록 빵빵하게 찼다.

"그, 그망......

뻘뻘거리며 제지하려다 살짝 뭉 그러진 발음이 튀어나와 목덜미가 홧홧해졌을까.

일순간 익숙한 기운이 창밖으로 느껴졌다.

그녀에게선 늘 장미향이 났다. 데카르도의 장미 화원에선 사시사 철 장미가 피니, 필시 특별한 향 수를 뿌리지 않아도 장미 향기가 몸에 밸 터였다.

나는 홀린 듯이 창밖으로 시선 을 돌렸다.

가벼운 승마복을 입은 채 높게 묶은 붉은 머리를 흔들며 걸어오 는 여자.

그 걸음걸이는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갈 리 없다는 듯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까, 시선을 느낀 건지 그녀가 고 개를 돌렸다.

장미의 잎사귀를 닮은 초록색 홍채와 눈이 마주쳤다.

내 막역한 친구, 르웰린 데카르 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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