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르웰린......
나는 입에 있던 걸 씹지도 않고 꿀떡 삼키고선 무심코 중얼거렸 다. 칼과 아리아가 동시에 내 시 선이 꽂힌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
"르웰린 데카르도?"
아리아의 표정이 단숨에 서늘해
졌다. 제 영역에 발을 들인 사자 를 보는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아리아의 표정을 보지 못한 건 지, 봤지만 무섭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르웰린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 바빠서 보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그동안 그녀와 나의 선 곳이 달라져 있었다.
르웰린은 후작. 나는 아타라 지 원군의 지휘관. 둘 다 예비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임은 분명하다.
이제 더는 영애 대 영애로 편하 게 대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 다.
나는 천천히 눈을 굴려 르웰린 을 살펴보았다. 그간 바빴던 건지 직전에 만났을 때보다 핼쑥해져 있었다. 그녀의 영양 상태를 염려 했을까, 르웰린이 입 모양으로 낱 말을 만들어 냈다.
'갈게요. 거기로.'
르웰린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 가 붉은 입술이 얇아지도록 호쾌 한 호선을 그려 보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다 낮게 웃음 을 흘렸다.
선 자리는 달라졌어도 그녀의 웃음은 여전했다. 그녀가 나를 불 편해하진 않을까 싶었는데, 괜한 걱정인 모양이었다.
"뭐야, 온대? 오지 말라고 해."
나와 르웰린을 번갈아 보던 아
리아가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나 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아리아 의 눈치를 살폈다.
"르웰린이...... 많이 불편해?"
" 하!"
아리아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사 나운 미소를 만들었다.
"감정적으로 불편한 게 아니라 경계하는 게 당연한 거야. 르웰린 데카르도는 사업계에서도, 사교계 에서도 내 숙적이니까."
그러고 보면 르웰린과 아리아의 사업 아이템은 둘 모두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짠 것처럼 겹치 곤 했다.
아리아가 비단 사업에 손을 대 면 곧이어 르웰린도 그곳에 손을 대고, 르웰린이 생화 조달 사업에 손을 대면 아리아도 따라가는 식 이었다.
'두 사람 다 시장의 흐름을 보는 눈이 특출나니...... 좋은 사업 아 이템을 비슷한 시기에 발견하는 거겠지.'
사교계는 말할 것도 없다.
제국의 젊은 사교계는 디에고와 르웰린, 아리아가 비등비등하게 나눠 가지다시피 했는데, 디에고 는 황태자이니 두루두루 친근하게 지내는 느낌인 반면, 르웰린과 아 리아의 파벌은 각자의 결속이 강 해 자주 부딪치곤 했다.
이전엔 아리아가 르웰린을 싫어 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었기에 르 웰린과 친하게 지내 보라고 설득 하곤 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
었다. 지금은 치기 어린 감정싸움 이 아니라 심각한 권력 다툼이니 까.
'정치계에 황제파와 귀족파가 있 다면 사교계엔 아리아 크리시스 파벌과 르웰린 데카르도 파벌이 있다고 했나.'
소문에 어두운 나도 요 근래 사 교계에서 격언처럼 도는 이 말을 모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명실상부한 라이벌이 었다.
"오지 말라고 하라니까? 나 여 기서도 기 싸움하고 싶지 않아."
아예 창가 쪽에서 몸을 돌린 아 리아가 미간을 꾹 눌렀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문을 곁눈질했다.
"어, 그, 미안."
딸랑.
"이미 늦은 것 같아."
찻집의 문이 열리고, 문이 일으
킨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이 화려 하게 휘날렸다. 꼭 불길이 넘실거 리는 것만 같았다.
들어서자마자 내게 시선을 고정 한 르웰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가을 해질녘 바람처럼 서늘하면 서도 고혹적인 목소리엔 날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탕!
내가 나도 모르게 헤벌레 읏으 며 손을 혼들려 했을까, 아리아가 포크를 식탁에 내리치듯 내려놓았
꽤 큰 소리가 났기에 아리아에 게 시선이 훅 쏠렸다. 르웰린은 그제야 아리아를 발견한 듯 눈을 깜빡였다. 청록색 눈동자는 흥미 와 냉정함, 호승심을 함께 담은 채로 반짝였다.
"나도 보고 싶었답니다, 데카르 도 영애."
출구와 등을 지고 있던 아리아 가 몸을 돌려 르웰린을 마주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아 리아는 능청스럽게 눈을 휘었다.
"그리 반가워해 주시니 부끄러 워요."
르웰린이 잠시 눈을 가늘게 뜨 다, 이내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
"물론, 크리시스 영애 또한 반가 워요. 저번 기부 경매 이후론 처 음 보네요. 그때 영애가 가져가려
고 했던 암브로시오 왕국의 고서 를 제가 낙찰해 갔던 건 유감이에 요."
아리아의 곧은 눈썹이 꿈틀거렸 다. 얼마 전에 경매를 다녀와서 저기압이더니 저 일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아리아는 더 짙게 미소 지었다.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쪽이 가져가는 건 당연하죠. 마음 쓰실 것 없답니다. 저는 데카르도 영애 께서 부르신 가격만큼이나 지불해 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것뿐
이니까."
이번엔 르웰린의 미간이 움찔거 렸다. 두 사람의 기 싸움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 다.
"예전 일은 이쯤 해 두죠."
오래 걸리지 않아 평정심을 되 찾은 르웰린은 내가 앉은 자리로 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가볍게 식 탁을 턱 짚더니, 나를 바라보며 눈을 가볍게 휘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동 석해도 될까요?"
"이런. 아쉬워요."
나보다 아리아의 대답이 더 빨 랐다. 아리아는 이를 악물고 읏고 있었다.
"보다시피 자리가 다 차서."
아리아는 손을 뻗어 식탁에 올 려 두었던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얽었다. 나는 얼떨결에 아리아와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눈을 끔뻑였
아리아와 내 손을 바라보던 르 웰린이 눈을 번뜩였다.
"의자야 가져오면 되죠. 게다가 이곳은 크리시스 영애의 찻집이니 어렵지 않을 텐데요."
"어렵진 않죠. 하지만 굳이, 싶 네요. 좁은 곳에 모여 앉을 필요 가 있을까요?"
녹안과 벽안이 치열하게 맞부딪 쳤다. 두 사람의 시선 사이로 불 티가 튀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
르웰린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안 되나요, 슈슈?"
새초롬한 눈매가 살짝 내려가고, 그녀 눈가의 매력적인 눈물점이 기울어졌다. 아리아는 그 옆에서 당장 거절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피 했다.
"저는...... 뭐든 상관 없습니다."
여기서 누구의 손을 들어 줘도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내 비겁한 중립 발언에 두 사람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다가 동시에 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칼은 묵묵히 찻잔을 기울여 찻 물을 입 안에 머금었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그의 눈 빛은 제발 자신을 끼우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도 데카르도 영애와 티타임 을 가지고 싶지만, 영애와 제 오
라버니가 안면이 없지 않던가요? 칼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 이 칼을 실드로 사용했다. 칼이 찻물을 삼키다 말고 눈을 질끈 감 았다.
꽤 그럴듯한 거절 이유였으나, 르웰린은 놀랍게도 그 순간 이겼 다는 듯 미소 지었다.
"칼 공자. 나 알죠?"
"콜록."
르웰린의 말투는 처음 만난 사 람을 대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 말투에 신빙성을 더하듯, 칼은 답 지 않게 사레가 들려서 기침을 하 기 시작했다.
'둘이 아는 사이였어?'
나는 놀라서 칼과 르웰린을 번 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친분이 있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저번에 카슈미르가 주겠다고 했던 총을 직접 건네받았죠. 이후 에 총 쏘는 방법을 칼 공자에게서
배웠어요."
" 아."
그러고 보니 르웰린에게 주기 위해 칼에게 주문 제작을 맡겼던 총을 그가 르웰린 본인에게 직접 전해 주었다고 해서 의아해한 적 이 있었다. 우연히 만났다는 말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그 뒤로도 몇 번 만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총을 만들어 주신 게 감사해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 겠다고 했었죠."
붉은 눈이 희미하게 혼들렸다. 나는 칼이 동요하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르웰린이 씨익 웃었다.
"이번 기회에 한 잔 사 드려도 될까요?"
칼이 아리아를 힐끗 바라보았다. 명백히 눈치를 보는 행동이었다. 괜스레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다 보던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앞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나는 동석도 상관없다."
승기는 르웰린에게로 기울었다. 아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간 채 미 세하게 떨렸다.
"......차는 부디 제가 사게 해 주세요. 제 가게인데 영애께서 사 게 할 순 없죠."
그렇게 르웰린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하하. 데카르도 영애의 얼굴을 계속 보게 되니 좋네요. 지금은 '가족' 모임 중인데 말이죠."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라는 건 가요? 너무 좋아해 주시니 부끄 러워요, 크리시스 영애."
나는 사과잼을 잔뜩 탄 홍차 잔 을 만지작거리며 손을 녹였다. 지 금 당장 찻물이 얼지 않는다는 것 이 놀라웠다.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두 여자는 북부의 피까지 얼게 만드는 추위 를 방불케 하는 싸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부끄러우신 것치곤 굉장히 멀 쩡해 보이시는데요. 바쁜 일은 없 으신 건가요? 슬슬 가 보지 않으 셔도 괜찮은 건지."
아리아가 까르륵 웃으며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봄 하늘처럼 청명한 푸른 눈이 이글이글 타오 르고 있었다.
"무슨 소린가요. 크리시스 영애 가 이렇게 차를 사 주셨는데 어떻 게 마시다 말고 가는 무례를 저지
르겠어요. 나를 예의 없는 치로 만들어 버리려는 건가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꾸한 르웰린은 보란 듯이 히비스커스 티가 든 찻잔을 기울여 찻물을 머 금었다.
찻물은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 인 르웰린의 머리칼만큼이나 붉었
"......슈슈. 잠깐 화장실 좀 다녀 와도 되겠나?"
두 사람을 번갈아 본 칼이 목울 대를 울렁이더니 나를 쿡 찌르며 물었다. 그의 눈빛엔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안 됩니다."
'어디 혼자 도망치려고.'
난 음울하게 속삭이며 그의 무 릎을 꽉 눌렀다. 칼은 낮게 신음 하며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나를 흘 겨보았다.
"뭐야."
탁
아리아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 려놓았다. 순한 눈이 곱게 휘었 다.
"두 사람, 이 자리가 불편해? 설마 나 때문에?"
나는 발가락 사이까지 소름이 돋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았다.
내가 덜덜 떨며 고개를 저으려
던 찰나, 르웰린의 고운 손가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혹시 내 탓일까요? 내가 눈치 없이 껴서?"
싱그러운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나와 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 갔다. 서늘한 검날이 살갗에 닿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순간 칼과 나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그의 붉은 눈에 비친 나도 뭣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너무 즐겁습 니다."
"나는 지금 죽도록 행복하다."
누가 보면 안쓰럽다고 할 만큼 형편없는 변명이었다.
아리아와 르웰린의 눈이 가늘어 졌다. 그들이 무어라 말하기 전, 난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제가 아타라 지원군의 지휘
관으로 가게 됐습니다. 아나요, 르웰린?"
르웰린의 눈빛이 단번에 진중해 졌다. 그녀가 짧게 한숨을 쉬었 다.
"네. 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르웰린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찻 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그녀 는, 무감각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 렸다.
"올해 겨울에 후작 작위를 받을 예정인데, 그때 카슈미르는 없겠 군요."
곧 후작 작위를 받게 될 거란 건 알았는데, 그렇게 일찍 받을 줄은 몰랐다.
르웰린의 예측대로 올해 겨울엔 쭉 아타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 기에 뭐라 답하지 못하고 있었을 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조금 씁쓸해 보이던 표정이 진지
해져 있었다.
"대륙을 누비는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다 보면 그 누구보다 빠르 게 소식을 접하게 되죠. 가장 은 밀한 소식까지요. 정보는 돈과 함 께 움직이거든요. 나도 아버지께 우연히 듣게 된 정보예요."
목소리를 낮춘 르웰린이 칼과 아리아를 돌아보았다.
"슈슈의 안전을 위해 알려 주는 거예요. 비밀은 엄수해 줄 수 있 죠?"
"물론."
"사업에 무거운 입은 필수죠."
내 안전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단번에 진지해진 두 사람이 수긍 했다. 고개를 끄덕인 르웰린은 나 와 눈을 맞췄다.
청명한 녹안에 걱정과 이성, 상 념 등, 수많은 것들이 뒤섞여 있 었다.
"아타라 왕궁에 북부의 스파이 가 침투해 있어요. 그곳에선 누구 도 함부로 믿으면 안 돼요."
그녀가 내게 속삭인 정보는 놀 랍고도 유용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