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화
"......스파이란 말이죠."
나는 착잡한 마음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입도 골치 아픈데 내부의 적 이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으나 이미 예상한 부분이었기에 충격적 이진 않았다.
북부는 키프로스 백작가를 사로
잡으며 겁도 없이 제국의 황궁까 지 침입했다. 아타라라고 건드리 지 않을 리 없었다.
"일개 시종으로 위장해 침투한 정도라면 이렇게 심각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아요. 추적한 바로, 북 부에 전해진 정보 중엔 아타라의 귀족이 아니라면 모를 내용들도 있었다고 해요."
"그건......
"네. 귀족 중에 북부와 내통한 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지그문트 그놈...... 어려서부터 일을 쳐도 단단히 칠 싹수가 보인 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런 일일 줄은 몰랐지.'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북부의 손이 어디까지 뻗 어 있을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요정의 밤> 원작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으나, 안타깝 게도 이런 것까진 기록이 되어 있 지 않았다.
'원작 속에선 이 시기에 아리아
와 칼의 러브라인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던가.'
나는 가까스로 기억을 되짚어 원작을 떠올리며 새삼 맞은편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Xl_? Xl_-) -] 즈흐 O O X
' ■ • ■ ■ ■ • ■ 三기 才丄 1 ■ ■ ■ •
(좋냐? 좋냐고. 거절했어야지.)"
"......큭, 미안하다고 했잖나."
르웰린을 받아들인 게 그렇게 원통했던 건지, 아리아는 이를 악 물고 속삭이며 칼의 옆구리를 콱 꼬집고 있었다.
가까스로 신음을 참고 있는 칼 과 손에 힘을 주는 아리아를 보고 있자니 과연 원작이 신빙성이 있 긴 할까 싶었다.
저건 사랑이 아니라 미운 정으 로 쳐 주는 것도 굉장히 후했다.
'게다가 원작의 카슈미르 크리시 스는 용병이 되지 않았으니••... 이 세계는 오래전부터 원작과 어 긋났구나.'
죽어가는 아리아를 안고 공작가
로 가 카이사르에게 빌었을 때부 터 원작이 어긋난 거라고 생각했 는데. 이제 보니 원작은 오래전부 터 어긋나 있었다.
원작의 카슈미르가 용병 미르가 되지 않았다면 카라쇼를 만나지 않았을 터. 그럼 지그문트 또한 만났을 리 없었다.
'원작의 지그문트와 지금의 지그 문트는 같은 사람일까.'
나를 만나지 않은 지그문트는 어땠을까. 내가 그에게 어떤 방식
으로든 영향을 주긴 했을까.
나는 그랬길 바랐다.
그는 내게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았는데,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사뭇 억울하지 않은가.
"아타라 측에서도 스파이가 있 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색출 작 업을 하고 있지만, 아직 색출된 건 아니니까 가서 조심해야 해요. 아무나 덥석덥석 믿지 말아요. 도 와 달라고 한다 해서 다 도와주지 말고."
르웰린은 5살배기 아이를 혼자 나룻배에 태워 폭포로 띄워 보내 는 사람처럼 걱정이 많아 보였다. 그는 무엇보다 사람을 잘 믿는 내 성정을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순진하진 않다 고 속으로 투덜거리긴 했지만 순 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을 쉬이 믿는 건 사실 이었으니까. 그건 지그문트와의 경험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데카 르도 영애."
이야기를 함께 듣던 아리아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함께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은 모두 들을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아리아 를 바라보았다.
"그대의 조언 덕분에 언니가 조 금 더 안전할 수 있을 거란 생각 이 들어요."
아리아의 성격에 라이벌에게 진 심 어린 감사를 전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일 텐데, 나 때문에 그 걸 하고 있었다.
짙은 녹빛 눈동자가 그런 아리 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르웰린의 눈빛에 부드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았다.
장미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매 끄럽게 올라갔다.
"나도 카슈미르의 안전한 귀환
을 바라는 사람이니까요. 고마워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녀의 콧잔등이 장난스럽게 찡 긋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예쁘게 말해도 홍차를 샤르도네로 운송하는 사업 을 그대에게 넘겨주진 않을 거예 요."
"내가 그런 것 때문에 거짓 감 사를 할 사람처럼 보이나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좋아지나 싶었으나, 아니나 다를
까 금방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나 는 티격태격하는 르웰린과 아리아 를 보다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자라는 말이 딱 맞았다.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슈슈. 아탁라에 가는 네게 줄 것이 있다. 그곳에 스파이가 있다 면 훨씬 유용하겠군."
잠시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 을까, 칼이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상자를
받아 든 나는 상자를 이리저리 돌 려 보았다.
작은 크기의 상자 안에선 작은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 다. 집중해서 기운을 읽어봐도 생 명체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다.
'사람은 아니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상 식적으로는 이 크기 안에 사람이 들어갈 리 없겠지만, 칼은 왠지 마법으로 가능할 것 같아 순간 걱 정했다.
이미 엘에게서 예쁘게 리본을 두른 율리안이란 충격적인 선물을 받은 참이라, 태양신교 경전을 노 래 부르듯 읽어 주는 기계 같은 거라 해도 사람만 아니라면 고맙 게 받을 수 있었다.
"나랑 칼 크리시스가 전부터 언 니에게 주려고 연구하던 건데, 언 니가 간다는 소리를 듣고 빨리 완 성시켰어. 시제품이라 조금 불안 정하지만 오류를 일으키진 않을 거야."
아리아가 휙 얼굴을 들이밀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뭘까 싶어 고개를 기울이다 뚜껑을 열 어 보았다.
"이건...... 뭐야?"
상자 안에 든 건 조약돌만 한 검은색의 매끈한 물체였다. 손에 쥐고 있기 딱 좋은 크기.
칼과 아리아의 마력이 강하게 느껴졌으나, 겉으로만 봐선 사용 처를 짐작할 수 없었다.
칼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사람 탐지기다."
"사람 탐지기요?"
"그래. 네가 워낙 사람에게 약하 니 말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지 아닌지 탐지해 주는 마도구 다."
"그게 됩니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마도구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자니 아리아가 의기양양
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사실 믿을 만하다는 것 자체를 확인한다기보다는 심리 마법과 탐 지 마법 수십 개를 쌓아 올려서 걸리는 이를 잡아내는 것에 가깝 지만, 그래도 유용할 때가 있을지 도 몰라. 절대 믿어선 안 되는 사 람 앞에 서면 기계가 진동할 거 야."
'천재 둘이 붙으면 뭐라도 되는 구나.'
나는 한참 마도구를 내려다보다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여기선 칼과 아리아의 마력이 물씬 느껴 졌으니, 가끔 두 사람이 그리울 때 만지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았 다.
"고마워. 꼭 잘 사용할게."
나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유용 한 물건이라는 사실보다 두 사람 이 나를 위해 힘써 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하나 약속해, 언니."
아리아가 똑바로 시선을 맞춰 왔다. 그녀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아타라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그 다음 전장은 나도 함께 가는 거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미 얘기가 끝난 부분이고, 아 리아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했음에도 그녀가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
사실 아직도 가지 말라고 말리 고 싶었다. 안전한 곳에 머물러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리아는 듣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알았다.
"......그래. 같이 가자."
꼭 전쟁에 나가야 한다면 차라 리 내 옆에 두는 것이 나았다. 내 가 계속 지켜보고 도울 수 있도 록.
"그거면 됐어."
아리아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작고 말랑하던 손은 어느새 자라 윤곽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늘빛 두 눈엔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으나, 그럼에도 날 향한 믿음을 보였다.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잘 다녀와. 집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 인사에서 용병으로서 사지로
나가던 나를 배웅하던 아리아가 겹쳐 보였다. 늘 아리아에겐 못할 짓만 하는 것 같아 심장이 욱신거 렸다.
난 고통을 억누르고, 가까스로 웃음 지었다.
"응. 다녀올게."
그녀가 있는 곳이 내 집이다.
내 대답은 늘 동일했다.
지원군이 아타라로 출발하는 날 이 밝았다. 나는 간소한 짐을 차 리고-오랜 시간 있을 거지만, 워 낙 용병으로 살며 야영에 이골이 난 탓에 짐을 간추리는 건 금방이 었다- 황궁으로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파견 기간 동안 크리시스 경의 부관으로 일할 조 나단 에이머리입니다."
" 반갑군."
나는 내게 악수를 청하는, 검은 머리 검은 눈에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를 조금 생소하게 바라보았
부관이 생길 거라 언질은 들었 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부관으로 지냈는데 이렇게 부관을 맞이하게 되니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행정은 익숙지 않으시다고 들 었습니다."
"실전 전투와 군사적 명령에만 익숙하다."
"제가 그 부분을 보완해 드리기 위해 부관으로 임명받았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시면 제가 수행하 게 될 겁니다. 염려치 마시죠."
조나단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엔 감정 한 점 없는 데다 태도도 기계적이었기에, 나 는 그가 부관용 마도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지만.
'게다가 날 별로 좋아하지 않 네.'
온갖 종류의 악의에 익숙한 나
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조나 단 에이머리는 나를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경력이 길고 실력 있는 사람이 니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인정하 지 못하는 거겠지.'
미리 들은 조나단에 대한 설명 을 되짚어보며 스스로 납득했다.
나는 그의 눈에 낙하산으로 보 일 것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날 그렇게 볼 것이다.
'그들을 믿게 하는 건 내 몫이 지.'
그들을 탓할 게 아니라 내가 해 결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매 끄럽게 미소 짓곤 맞잡은 손을 흔 들었다.
"실력 있는 인물이라 들었다. 잘 부탁하지."
"......잘 부탁드립니다."
조나단은 떨떠름해하며 손을 놓 았다. 동공과 홍채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검은 두 눈은 날 짧
게 탐색하다 떨어져 나갔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집결 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왔다.
아타라까지는 거리가 상당했기 에 지원군 전부가 한 번에 텔레포 트로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텔레포트와 도보로 인한 이동을 병행해야 했고 도착까지는 3일 정도가 걸렸다.
병력이 한꺼번에 이동하면 위험
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병력의 반 이 먼저 선발대로 출발한 뒤 나를 포함한 다른 반이 후발대로 갈 예 정이었다. 어제 출발한 선발대는 도착지까지 반은 갔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힐끗 조나단을 돌아보았다.
"그 차림으로 갈 예정인가?"
" 네?"
"우리가 처음으로 도착할 지방 은 상당히 추워. 털외투 정도는 챙겨 두는 걸 추천하지."
우리의 첫 정착지는 북부 지역 이었다. 그곳에서 조나단의 얇은 외투는 제 일을 하지 못할 터였
그가 눈을 깜빡였을까, 어느새 집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 은 병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 다.
모두가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 었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 야 했다.
그 사실이 바위처럼 내 폐부를
압박해 왔으나, 나는 더더욱 미소 지었다. 두려움도, 주저도 보이지 않도록.
"반갑다."
내가 여태껏 보았던 지도자들의 모습을 베껴 나갔다. 헬리오스의 능청스러운 엄격을, 노아의 부드 러운 카리스마를, 카이사르의 좌 중을 압도하는 위엄을 떠올렸다.
그 모든 걸 담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대들의 지휘관, 카슈미르 크 리시스다."
이제 내가 이들을 움직여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