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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3화 (223/254)

223화

"좋은 아침이군."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 까."

길게 하품을 하며 천막에서 나 오던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던 조 나단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 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예를 차렸

나는 어깨를 가뿐히 돌렸다. 몸

이 굉장히 가벼웠다.

"그래. 역시 운동을 하고 자니 개운하더군."

조나단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 했다. 나는 태평하게 눈이 쌓인 산맥 너머를 바라보는 척하며 그 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큐베라 무리를 사냥하고 온 이 후, 조나단의 태도가 묘하게 달라 졌다. 얼핏 봤을 땐 어제 일에 겁 을 먹고 내게 수그리기 시작한 것 같았으나, 실상은 그게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약간의 거부감을 고의적 으로 티 내고 있었는데...... 어제 일 이후론 속에 칼을 완전히 숨겨 버린 느낌이지.'

그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온순해 졌다. 누가 보면 좋은 변화라고 하겠으나,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는 차라리 상대하기 쉽다. 눈에 보이는 가시 만 떼어 내면 되니까. 하지만 등 껍질 속에 들어가 버린 거북이는

다가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날 향한 경계가 짙게 깔린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기계적으 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 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나를 경계 하는 이상 나도 그를 믿을 수 없 었다.

"병사들에게 진군 준비를 명하 게."

"네."

부관이니 자주 봐야 할 텐데, 이 대로라면 그가 계속 불편할 것 같 았다.

간밤에 눈이 무릎까지 쌓여 마 법사들이 발열 마법으로 눈을 녹 이며 나아갔다.

힘들게 행군하는 병사들 사이에 서 지휘관이라는 이유로 말을 타 고 이동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지휘관의 권위라는 것이 있기에 내리진 못했다.

' 음?'

나는 말고삐를 쥔 채 무료하게 눈을 굴리다 문득 내 앞에서 행군 하는 병사 한 명에게 시선이 갔 다.

" 딸인가?"

내 물음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 던 사진을 놓칠 뻔한 병사는 놀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 지휘관님?"

"사연 많은 눈으로 보고 있길 래."

그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혹스 러운 듯 눈을 굴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어린 딸입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 습게도 벌써 보고 싶습니다."

그가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손 길로 쓸어내리는 사진에선 여자아 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침음을 삼켰다.

'저거...... 죽음의 복선 아닌가?'

전쟁터에서 소중한 사람의 사진 을 보며 그리워하는 행동은 전장 한복판에 맨몸으로 나가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 병사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 다.

얼른 사진 넣으라고 하려 할 때, 아련한 미소를 지은 그가 결정타 를 날렸다.

"돌아가면 꼭 그 아이와 연꽃을

보러......

"잠깐. 거기까지만 해라."

나는 황급히 그를 제지했다. 병 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 나, 아무리 그래도 그 발언은 위 력이 너무 강했다. 자살 폭탄을 허리에 매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람 하나 구했다는 생각에 안 도했을까, 병사가 쭈뼛거리며 입 을 열었다.

"저, 지휘관님."

" 뭔가."

"아이가 선물을 사 오라고 하는 데...... 혹시 이 나이대의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그는 날 두려워하는 티를 잔뜩 내면서도 용기 있게 물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딸。] 몇 살이지?"

"12살입니다."

"그 나이면 검을 배우기 시작해 도 될 나이니 아타라의 강철로 만 든 검을 선물해도 괜찮지 않겠

"하긴, 요새 들어 검에 관심을

보이긴 하더군요. 검은......

나는 순간 말고삐를 확 당겨 이 동을 멈췄다.

"지휘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던 조나단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선 내게로 다가왔다.

지휘관인 내가 멈추니 다른 병 사들도 얼떨결에 행군을 멈췄다.

얼떨떨한 시선들이 내게 쏠렸으 나,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로 주변을 둘러보 았다.

이곳은 양옆이 높은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이었다. 길은 좁았 고, 바위산은 워낙 거대해 앞뒤로 밖에 움직일 수 없었다.

위에서 무언가 떨어져도 피하기 힘든 지형이었다.

"에이머리 경. 그대는 감이 꽤 좋았지."

나와 정면으로 마주한 검은 눈 이 깜빡였다.

머루 같은 눈동자는 동공과 구 분이 안 될 지경임에도, 나는 그 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 을 발견했다. 내 표정이 너무 험 악해서 였을까.

"무언가 느껴지나?"

조나단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 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 니다."

그는 시선을 말고삐에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하늘 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그친 하늘은 먹먹하고 창 백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까마 득하게 높아 보이지 않는 바위산 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필사적으로 지웠으나, 내겐 느껴

졌다.

적들이 저 위에 있었다.

후두둑.

하늘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졌다.

쉬이익!

눈. 새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었 다.

시야를 방해하기 위한 진눈깨비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를 이곳에

묻어 버릴 수 있는, 몇 톤은 될 법한 어마어마한 눈 더미였다.

"뭐, 뭐야!"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 왕했다.

나는 말의 등을 밟고 빠르게 허 공으로 뛰어오르며 검을 뽑았다. 등 뒤의 푸른 망토가 세차게 나부

꼈다.

촤아악!

오러를 최대로 출력하며 검을 휘둘렀다. 빠른 속도로 날아간 검 은 오러가 병사들의 머리 위로 오 로라처럼 길고 넓게 전개되었다.

펑!

떨어지던 눈 더미는 오러의 방 어막에 맞고 굉음을 내며 사방으 로 튀어 올랐다. 산산조각이 난 눈의 입자가 다이아몬드 더스트처

럼 반짝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병사들이 눈 더미에 파묻혀 버렸을 것이다. 아 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나는 병사들 한가운데에 착지했 다. 명령을 기다리는 맹목적인 시 선들이 내 살갗을 따갑게 건드릴 때, 나는 위를 차갑게 노려보며 검날을 세웠다.

'아주 비겁하고...... 영리하네.'

지형적 우월함을 취한 상태로

지원군을 습격한다. 이가 악물릴 정도로 치사했으나, 전쟁에 규칙 과 도리가 있을 리 없다. 치사할 수록 좋은 계획이었다.

휙.

나는 검 끝으로 바위산 위를 가 리켰다.

"습격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 라!"

크아앙!

내 쩌렁쩌렁한 외침을 신호탄으 로, 하늘에서 마수들이 비처럼 쏟 아지기 시작했다.

"대열을 갖춰라!"

잠시 혼비백산했던 병사들이 금 방 제자리를 찾고 습격에 대응하 기 시작했다. 나는 발에 마나를 씩운 채 자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서걱.

크}°1아으]'!

나는 마수들이 땅에 착지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허공을 달리 며 마수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급소를 찔린 마수들이 비명을 지 르고, 검은 피가 솟구쳤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지형 이야.'

전투에선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건만, 그들은 이미 바위산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항의 물고기를 사냥하듯 적절히 작살만 던지면 되는 상황일 터.

'여기 남아서 병사들을 지키면 큰 손실이 일어나진 않겠지. 하지 만 패배한 것과 다름없어.'

이대로라면 북부는 전력 손실이 없는데 우리만 피해를 입을 것이 다. 살아 나간다고 해도 승리는 아니었다.

나는 내 어깨를 물러 달려드는 뱀 형태 마수를 반으로 가르며 깎 아진 절벽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상당했으나, 내가 마음먹

으면 오르지 못할 것은 없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계산하 기 시작했다.

'저 위로 올라가서 주동자를 벤 다면?'

마수들은 주술사가 죽으면 더 이상 명령을 따르지 않을 테니 무 용지물이 된다.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 가.'

난 시선을 흘끗 돌려 내가 마수 의 반 이상을 혼자 처리하고 있음 에도 남은 반의 마수들조차 빠르 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병사들 을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올라가서 주술사의 머리를 치고 오는 몇 분 동안 몇 명이 죽게 될 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내 결정이 이 군단의 안위를 결 정했다. 나 하나 죽고 다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몰아닥치는 공격을 겨우 방어만

하며 살아남은 것에 의의를 두느 냐, 병사들을 두고 무모하게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승리를 꾀하느

두 가지 갈림길에서 머리가 터 지도록 고민하고 있던 찰나.

' 아.'

이 상황의 열쇠가 될 사람이 시 야에 걸렸다.

나는 곧장 그에게 달려가 내 계 획을 말했다. 전투에 힘을 보태던

그는 순식간에 다가온 나를 보고 놀라더니 내 말에 질겁했다.

"하, 하지만 장소를 정확히 모르 면 오류가 날지도......!"

"팔 하나쯤 잘려도 상관없어. 네 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그냥 해!"

내 단호한 명령에 그는 목울대 를 울렁이더니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

나는 그에게 달려드는 지네를 닮은 마수 한 마리를 검 끝으로 짓이겼다. 그가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하늘에서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화살! 불화살이다!"

불꽃이 신벌처럼 쏟아지고 있었

"마법사들은 방어막을 준비하 라!"

나는 절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내 명령에 마법사들이 황급히 방 어막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나, 이 미 떨어지기 시작한 화살을 막기 엔 늦었다. 사방이 눈이니 주위가 불바다가 되는 불상사는 없겠지만 사람이 맞으면 타격이 상당할 터.

내가 막아야 했다.

"고개, 숙여!"

검날에 달라붙어 넘실거리던 검 은 오러에 마나를 쏟아부으니, 오 러가 기름을 만난 불꽃처럼 솟아 올랐다.

쉬이익!

나는 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쿠콰쾅!

길고 넓은 초승달 모양을 그린 검은 오러가 쏟아지던 화살들을 폭파시키며 날아갔다. 막는 것을

베어 앞길을 내는 거친 길잡이 같 았다.

불씨는 난폭한 오러의 열기를 이겨내지 못한 채 모두 시들시들 꺼져 버리고, 타고 남은 재에 가 까운 화살의 잔재들만 땅에 후두 둑 떨어졌다.

쉬이익.

"다음 화살이 온다! 방어막 전개 멈추지 마!"

방어막 형성을 멈추고 멍하니

날 바라보는 마법사들을 향해 버 럭 소리쳤다. 적들은 화살이 내 검에 다 베여 나갔음을 보았을 텐 데도 굴하지 않고 공격을 재개하 고 있었다.

"지휘관님! 여기!"

화살이 방어막 직전까지 가까웠 을 때, 내 명령을 받고 혼자 다른 일을 수행하던 남자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달 렸다. 앞을 막는 곰 비슷한 마수

를 베어 내며 검은 피가 튀어 올 라 눈이 따가웠으나 멈추지 않았

어느새 내 코앞엔 눈 위에 나뭇 가지로 엉성하게 그려진 마법진이 있었다.

"발동해!"

나는 높게 도약했다. 두 눈을 질 끈 감은 남자가 마법진에 방대한 마나를 쏟아부었다.

"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발을 디딤과 동시 에 남자가 소리쳤다.

화아악.

새하얀 빛이 온몸을 덮쳤다. 나 는 익숙한 울렁거림을 참으며 눈 을 감았다.

팟.

다시 눈을 떴을 땐, 바위산 위의

정경이 보였다.

"저, 저건!"

화살을 쏘던 이들 중 하나가 허 공에서 등장한 날 발견하고 비명 을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본 적 없는 곳으로 텔레포트 시 키는 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더 니 성공했네.'

잘못된 텔레포트로 불구가 되는 건 혼한 사례였기에 팔이나 다리

한 쪽 정도는 잘려도 감안하려 했 건만-먼저 아타라 왕국에 도착했 을 1차 지원군에 대신관 율리안 이 있었다. 잘렸어도 절단된 부위 만 들고 가면 신성력으로 감쪽같 이 붙여 줬을 터-.

자신 없어 하던 것치곤 깔끔한 성공이었다.

나는 씨익 웃으며 검을 세웠다.

"까꿍."

반격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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