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커 헉!"
나는 가장 먼저 순간이동 마법 진으로 마수들을 불러오고 있는 주술사를 쳤다. 죽지 않을 정도로 출력한 오러에 정통으로 맞은 그 는 곧바로 혼절했다.
"......미르다! 쏴라!"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고함쳤다.
절벽 밑을 향해 화살을 쏘던 궁수 들이 일제히 내게로 화살을 겨누 었다.
'날 정면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 나 본데.'
나는 빠르게 눈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인원은 서른 명 남짓. 근거리 백 병전이 아닌 원거리 습격을 하러 온 이들답게 검사는 한 명도 없고 마법사와 궁수로만 구성되어 있었
만약 나와 결판을 내고자 했다 면 마법사들을 움직여 나를 공중 에서 떨어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궁수들을 이용해 내가 다 가오지 못하게 견제만 하고 있었 다.
쉬이익!
활시위가 궁수들의 손을 떠나고, 수십 개의 날카로운 화살촉들이 날 향해 날아왔다. 나는 마나로 만든 발 받침대를 박차고 오르며 몸을 휙 돌렸다.
촤아악!
내가 돈 궤도를 따라 생성된 검 은 오러가 회오리처럼 회전하며 화살을 갈았다. 궁수들이 다시 화 살을 장전하는 사이, 마나를 폭주 하듯 방출했다. 주위에 병사들이 없으니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었 다.
팅!
검은 오러가 내 몸을 연기처럼 휘감았고, 화살들이 튕겨 나갔다.
'빨리 끝낸다.'
후욱.
나는 심장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오러를 오른쪽 바위산으로 날렸
콰콰쾅!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검은 파동이 새하얀 설산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대지가 진동하고, 바위산에 서 있던 이들
이 모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탁
나는 난장판이 된 바위산 위에 착지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쉬이익.......
거대한 바위산은 내 오러에 마 치 버터나이프에 잘리는 버터처럼 매끄럽게 움푹 파였다. 그 단면에 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너무 힘을 줬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중심을 잃 도록 가볍게 흔들기만 할 생각이 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과한 출력 이었다.
다행히 아래 협곡까지 피해를 주진 않았으나, 힘 조절에 조금만 더 실패했다면 병사들까지 다쳤을 지도 몰랐다.
'이 정도면 처음에 친 주술사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질겁하며 주술사가 쓰러져
있는 반대편 바위산을 돌아보았 다. 그는 숨은 붙어 있었으나, 금 방이라도 죽어도 놀랍지 않은 상 태였다. 심문을 위해 남겨 두려 했건만.
'오러 연습을 좀 해야겠군.'
공작가에 들어간 뒤로 용병 일 을 멈추며 여유가 생긴 만큼 정식 적인 수련을 하는 시간이 훨씬 늘 었다. 그 덕분에 실력은 급속도로 향상했으나, 그에 반해 늘어난 실 력을 실전에서 확인할 기회는 거 의 없었다.
나는 지금 전보다 강해진 내 오 러의 위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 하고 있었다.
"마법진! 빨리 마법진을 발동해 라!"
오른쪽 바위산에 서 있던, 리더 로 추정되는 여자가 쓰러졌던 몸 을 황급히 일으켰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부딪친 건지 그녀의 머리에선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
'도망치려는 거군.'
처음부터 나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고 견제만 했던 이유를 깨달았 다. 나를 상대할 수 없음을 일찍 이 파악하고 시간만 벌어 도망치 려고 했던 것이다.
"우습군. 먼저 습격한 주제에 정 정당당하게 맞붙을 자신은 없는 건가?"
나는 부러 큰 목소리로 중얼거 렸으나, 다들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역시 이 정도 도발로는 넘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머리부터 친다.
그들이 싸울 생각이 없다면, 싸 울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된다. 나 는 리더에게로 바람처럼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콰앙!
"크윽!"
여자가 재빨리 검을 들어 내 공
격을 막았다. 길게 밀려난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향해 검을 휘둘 렀다.
챙! 챙!
합이 몇 번 오갔다. 여자의 공격 을 가볍게 막아 내며 그녀를 탐색 한 난 오래 지나지 않아 알 수 있 었다.
'이 여자, 검이 주특기가 아니 야.'
애매한 검술 실력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이 말해 주 고 있었다.
이 여자는 마법사였다.
"파이어볼!"
콰쾅!
내 예상이 적중했음을 알려 주 듯, 내 머리 위로 불덩이가 쏟아 졌다.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 다.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과 망토 끝자락이 휘날리며 불에 살짝 그 을렸다.
'마검사...... 골치 아픈데.'
나는 쉴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들어오는 검의 공격을 받아내며 미간을 좁혔다.
마검사와 오랫동안 동료였던 나 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일인지 알 고 있었다. 재수 없는 얼굴이 머 릿속에 빙글빙글 어지럽게 떠다녀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하지만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도 잘 아니까.'
쾅
나는 오러를 폭주시키며 여자를 밀어붙였다.
내가 상대해 온 건 최강의 마검 사였다. 이 정도 실력의 마검사는 나를 위협하지 못했다.
콰쾅! 챙!
마법을 사용할 틈도 없이 몰아 붙이니 예상대로 여자는 속절없이
밀려났다. 로브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그녀의 푸른 눈이 악과 오 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북부인 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던 광기는 그녀에게서도 어김없이 보였다.
캉!
마침내 그녀가 내 속도를 완전 히 놓쳤을 때, 나는 그녀의 검을 힘껏 쳐 냈다. 은빛 검이 빙글 돌 며 허공을 날았다.
무기 하나 없이 나를 마주하게 된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노기가
가득한 얼굴은 폭력배처럼 험악했
'리더니 아는 것도 많겠지.'
죽이는 것보단 살려 두는 게 이 득이다. 절대 내가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적의를 담담하게 받아 내며 그녀 의 몸을 묶어 체포하려다, 눈을 부릅떴다.
여자가 입을 살짝 벌린 채 혀를 굴리고 있었다.
퍽
복부를 걷어차인 여자가 털썩 쓰러졌다. 나는 빠르게 그녀를 짓 눌러 제압하고 망설임 없이 그녀 의 입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커헉, 아악!"
"입버릇이 나쁘네."
입이 막힌 여자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내 손을 짓씹었다. 거친 반항으로 인해 손이 피로 물들었
으나, 나는 묵묵히 그녀의 입 안 을 뒤지길 계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 동그 란 무언가가 걸렸다.
" 이거군."
나는 짙게 숨을 뱉으며 피범벅 이 된 손을 그녀의 입에서 꺼냈
내 손에 들어온 작고 동그란 환 은 사람을 죽일 위력을 가지고 있 었다.
꿈속에서 질리도록 본 광경이었 다. 혀 아래 환을 꺼내 씹는 글렌 과 쓰러지는 작은 몸을 멍하니 바 라만 보던 나.
'내 이름, 글렌이야. 잊지 마. 네 가 죽인 사람의 이름이니까.'
어린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잊 지 말라고 했다. 그 말대로, 나는 여태껏 그 두 음절을 잊지 못했 다. 비소로 물든 얼굴을, 눈물을 흘리던 푸른 눈을 잊지 못했다.
"두 번 당할 줄 알았나?"
파삭.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환을 꽉 쥐었다. 환은 검은 오러에 타 가 루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했다.
카라쇼와 글렌으로 차고 넘친다. 악몽의 종류가 느는 건 사절이었 다.
"크아악!"
"아픈 건 당신일 텐데."
나는 내 아래에서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는 여자를 오 러의 줄로 칭칭 묶었다. 그리 강 하게 묶지 않았으나, 여자가 계속 발버둥 치는 바람에 검은 오러가 그녀의 살갗을 뚫고 긁었다.
'기어코 피를 보는구나.'
나는 피비린내 나는 광경에 얼 굴을 살짝 찡그리다, 나머지 적들 도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지금이다! 도망쳐라!"
그 순간 여자가 소리쳤다.
' 아.'
나는 그제야 여자와의 실랑이로 너무 긴 시간을 할애했음을 깨달 았다.
내 실력이 부족해 시간이 필요 했다고 변명할 수 있으면 좋겠지 만,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자를 최대 한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고 시간
을 너무 많은 들인 것이다. 멍청 한 짓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남은 북 부인들은 반대편 바위산의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 젠장!"
쉬이익!
나는 마법사 중 하나에게 빠르 게 단도를 던졌다.
"텔레포트!"
파앗!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환한 빛 이 터져 나와 그들을 감쌌다.
푹
"크윽!"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사라지기 직전, 단도는 마법사의 어깨에 정 확히 박혔다.
나는 거세게 호흡했다. 그들이
있던 자리엔 눈송이만이 차가운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있었다.
"하하하!"
자책과 분노, 허무함에 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았을까, 등 뒤에서 가래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내 손을 물어 낸 피가 묻은 입술로 미친 듯이 웃고 있었 다.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희게 번뜩였다.
"눈보라가 몰아닥칠 거다."
"하......
나는 허탈하게 헛웃음을 뱉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얻은 소득은 이 여자 하나뿐이었다.
전투의 주동자들이 사라진 뒤,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이를 갈며 여자를 끌고 내려온 나는 얼 마 남지 않은 마수들을 모조리 토 벌한 뒤 협곡을 벗어났다. 병사들 모두 지금 당장 쉬어야 할 것 같
은 상태였지만 이미 한 번 습격을 받았던 협곡에 남아 있는 것은 위 험했다.
"부상자는 13명. 중상자와 사망 자는 없습니다. 병사들이 지치긴 했으나 병력 손실은 없으니 성공 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 다."
협곡을 벗어나자마자 진을 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시점 에 조나단이 보고했다. 나는 수통 에서 흐르는 물줄기에 상처 난 손 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했으나 정 신이 피로해 눈꺼풀이 무거웠다.
" 안내해."
"네."
앞장 서는 조나단을 따라 구석 진 곳의 천막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스르륵.
조나단이 천막의 문을 걷은 그 곳엔 유일하게 포로로 사로잡은 북부 습격군의 리더가 있었다.
여전히 내 오러 줄에 묶여 있는 여자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 고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엔 마나 회로를 막는 마나 구속구가 채워 져 있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만드는 입마개를 찬 그녀의 양옆 으로 병사들이 지켜 섰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자 앞으 로 다가갔다.
"말은 할 수 있나?"
잿빛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이 꼴로 말을 할 수 있겠냐는 항
변의 눈빛이었다. 나는 손수 여자 의 입마개를 풀어 주었다.
쓰
"후, 내게서 정보를 얻을 순 없 을 거다. 명예롭게 요르하로 가도 록 그냥 죽여라."
시작부터 난항이 예상됐다. 나는 속으로 신음하면서도 차가운 표정 을 지어 냈다.
" 이름."
"그냥 죽이라고 했을 텐데......!"
쾅
검집으로 땅을 내리찍자 땅이 진동했다. 늘 억누르고 있던 소드 마스터의 기운을 가감 없이 내뿜 으며 여자를 응시했다.
"웬만하면 말로 끝내고 싶다. 널 부르긴 해야 할 거 아닌가. 이 르 "
원래라면 손가락이라도 하나씩 자르면서 고문해야겠으나, 그건 정말 내 성향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끝내고 싶었다.
생리적인 공포로 덜덜 떨면서도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 던 여자는, 이를 악물며 말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힐다. 힐다 베스토."
"그래, 베스토."
나는 병사 하나가 가져온 의자 에 털썩 앉았다.
'골치 아프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나는 힐다 같은 눈을 한 부류의 사람들 을 잘 알았다.
'오직 한 가지 목적만 집요하게 좇는, 악과 오기로 가득한 독종
이런 부류는 때려 죽여도 솔직 히 불지 않는다. 시도해 보지 않 아도 알았다.
'그냥 죽여야 하나. 하지만...... 웬만하면 죽이는 건 싫어. 포로라 곤 이 사람 하나 잡아 왔는데 아
무런 소득 없이 죽이는 것도 그렇 고. 그런데 계속 끌고 다닐 수는 없고. 그냥 풀어 주는 건 이상하 게 보일 거고.'
전투가 끝나면 다 끝나는 줄 알 았건만, 이런 문제가 또 남아 있 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지이잉.
힐다의 옷 주머니 부근에서 진 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지품 수색도 안 했
나?"
"......죄송합니다. 진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하기 전에 지휘 관님께서 들어오셔서......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리자 지키 고 서 있던 병사가 고개를 숙였 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곤 힐다의 주머니에 직접 손을 넣어 진동하 는 물체를 꺼냈다.
그녀는 움찔했으나, 전처럼 발버 둥 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체념 한 것 같았다.
' 통신구?'
동그란 수정구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으니 수정구형 폭탄 같은 건 아 닌 듯했다. 연락이 오고 있는데도 발신인은 뜨지 않는 수정구 표면 을 껄끄럽게 바라보던 나는 잠시 간의 망설임 끝에 통화를 수락했 다.
" 누구••••••
-안녕, 슈슈.
나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까드득.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자 수정구 에 금이 갔다. 가타부타 설명이 없어도, 더 이상의 소개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마디 인사 만으로도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지그문트 하이드......
나는 그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익 숙하고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간 평안했나.
내 오랜 숙적, 지그문트 하이드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