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지휘관님, 받아도 되는 겁니 까?"
조나단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병사들과 힐다도 놀란 표 정으로 날 바라볼 때, 나는 수정 구만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준다만 네 표정 다 보인다.
"보라고 짓는 표정이니까 닥쳐."
힐다의 수정구를 통해선 지그문 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고, 투명 한 표면을 통해 야차 같은 내 얼 굴만 보였다.
나는 힐끗 주위를 돌아보았다.
보는 눈이 많았다. 북부의 수장 과 친분이 있다는 건 알려져 봐야 하나도 좋을 게 없는 사실이었다.
"......심문은 뒤로 미루겠다."
나는 다급하게 천막에서 나섰다.
-언제까지 노려보기만 할 셈이 지?
재수 없도록 감미로운 목소리는 웃음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책상 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난 천막 주위에서 사람을 모두 물리고, 수정구 속 지그문트와 기 묘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힐다 베스토를 처형할 거다."
툭, 무심하게 내뱉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보를 불 기미가 보이지 않더 군. 교육을 잘 시킨 모양이야."
-......북부인들은 비겁하게 생을 꾀하면 후에 요르하로 가지 못한 다고 믿으니까.
"쓸모도 없는 것을 살려 둘 필 요는 없지. 오늘 안에 죽일 거
턱을 괴며 수정구를 내려다보았 다. 투명한 수정구에 비친 내 얼 굴은 다행히 피도 눈물도 없는 사 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래. 이건 일종의 선전포고이자 위협이었다.
- 하하.
진지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건 만, 수정구에선 청량한 웃음소리 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필시 그가 재수 없는 웃음을 한가득 짓고 있 을 거라고 예상했다.
-많이 컸구나, 슈슈.
나는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간 신히 다잡았다.
"부하가 죽는 게 웃긴가?"
-그럴 리가.
"그럼......
-그저 우스워서 말이다.
그는 웃음기 만연한 투로 부드 럽게 속삭였다.
-네가 사람을 죽일 수는 있나?
내 중심을 옭아매는 목소리는 올가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위협이었다. 하지 만 나는 널 잘 알아. 누구보다 더.
나는 손이 떨리도록 강하게 주 먹을 쥐었다. 떠올리기 싫어도 너 무 잘 그려지는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너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
"그렇게 믿고 있다가 뒤통수 맞 는 것도 참 재밌겠네."
-조금도 두렵지 않군.
"내가, 정말 못 할 거라고 생각 하나?"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 었다. 속에 붙은 불꽃으로 인해 숨결이 불의 열기만큼 뜨거워졌
-그럼 죽일 건가? 카라쇼와 글
렌처럼?
지그문트는 여상스럽게 가장 깊 은 심연을 건드렸다. 상처를 말뚝 으로 후벼 파는 듯한 느낌에 나는 수정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 필요하다면."
-하지만 원치는 않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은 해야지."
-죽이지 않을 수 있다면 죽이지 않을 거고 말이다.
나는 침묵했다. 말없는 긍정이었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여 죽이 는 게 즐거워진 건 아니었다. 살 인은 내게 언제까지나 마지막 수 단이었다.
-협박 말고 거래를 제안한다면 수긍할 생각이 있다만.
달콤한 속삭임이 무거운 마음을 가르고 들어와 간지럽혔다.
힐다를 지금 죽이는 게 안전함 을 알고 있었다. 적군 수장과 비
공식적인 거래를 한다는 게 얼마 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오직 개인적인 신뢰 하나만을 사이에 둔 채 이어질 거래.
지그문트가 지킬지도 미지수인 데다, 이런 거래를 했다는 게 알 려지면 군법으로 처벌당할 수 있 었다.
"그럼 제안하지."
하지만 물러서는 건 내 성격에 맞지 않을뿐더러, 잘하면 힐다를
의미 없이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힐다를 살려 보내겠다. 대 신......
-대신?
나는 고민했다. 지금 가장 필요 하고, 지그문트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뭘까.
오래 걸리지 않아, 나는 입꼬리 를 비죽 올렸다.
"북부군이 다음 아타라를 침입
할 때 칠 지역을 말해라."
현재 가장 필요한 정보이자, 지 그문트가 유출시킬 리 없는 중요 한 정보였다.
-......뭐?
"왜. 힐다 베스토의 목숨을 위해 이거 하나 못 말해 주겠나? 좋은 지도자는 아닌 모양이야."
-하.......
내 비아냥거림에 지그문트가 헛 웃음을 뱉었다.
'속은 좀 시원하네.'
나는 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어차피 대답이 돌아오길 기대하 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지그문트가 멍청이도 아니고, 인 질 한 명의 목숨을 위해 적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 줄 리 없었 으니 적당한 분풀이에 가까웠다.
"진짜 조건은 이거 말고 다른 걸로......
-말해 주면.
"......?"
-믿을 수 있나?
믿음. 이미 지그문트와 나 사이 에서 바스러져 버린 개념이었다.
'나는 아직도 지그문트를 믿을 수 있나?'
내가 말문이 턱 막혀 있을 때, 수정구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그 너머 지그문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음에도 짙은 미소를 그린
붉은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리가 침공할 곳은....... 지그문트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아직 나를 믿을 수 있나?
♦ * *
"지, 지휘관님!"
통화를 끝내고 천막을 나설 때,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힐다를 지키던 병사 중 한 명이었
"무슨 일이지?"
"이, 인질이 도망쳤습니다!"
"••••••뭐?"
'힐다를 놓쳤다고?'
나는 얼굴을 구겼다. 자리를 비 운 시간이라곤 10분 남짓이건만, 허탈함이 온몸을 적셨다.
'지금 인원들이 아무리 2군이라 지만 이 정도로 허접할 줄 몰랐는 데.'
1 차 지원군과 2차 지원군의 인 원을 배분할 때 1군엔 황궁 기사 단 소속의 기사들과 고위급 인물 들을 위주로 배치했다.
그리고 2군은 이제 막 징병되어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이들을 배치했는데, 내가 2군을 지키면서 가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병사들의 실력을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지만 눈앞의 인질 을 놓칠 수준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금 장난하나? 얼마나 방심했 으면 그런 일이 일어난 거지?"
날카롭게 추궁하자 병사가 식은 땀을 흘렸다. 뻘뻘거리며 내 눈치 를 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 었다.
"그, 그게, 저희는 계속 지키려 고 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제 실책입니다."
사박사박.
눈밭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 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대상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좁혔다.
"조나단 에어머리 경."
"저 혼자서 지킬 수 있다고 생 각해 지친 병사들을 쉬라고 내보 냈습니다만, 그 사이 구속구를 벗 은 힐다 베스토에게 제압당했습니 다."
"내 허락도 없이 말이지."
"......죄송합니다."
나는 조나단을 빤히 응시했다.
조나단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 듯 더 변명조차 하지 않고 담담한 낯으로 땅에 시선을 고정했다. 몸 싸움이 있었던 건지, 그의 창백한 얼굴엔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 다.
하고 싶은 질문을 삼켰다. 수많 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아 직은 아니라고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해 분노를 억누르고 조나단을 응시했다.
"마지막 목격자가 그대인 건가."
" 네."
"경위서 써 오게. 상황이 상황이 니만큼 일단 처벌은 미루지만, 이 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은 말 아. 군법을 통해 월권 행위의 죄 를 물을 거다. 자중해."
"네. 죄송합니다."
깍듯하고 정중하지만 무미건조 했다. 나는 머릿속에 뭉게뭉게 떠 오른 생각들을 뒤로한 채 성큼성 큼 조나단을 지나쳐 갔다.
"지휘관님! 인질을 붙잡을 병사 를 보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조나단과 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병사가 내 등 뒤로 소리쳤 다. 나는 멈칫했으나 다시 걸어 나갔다.
"됐다. 그런 것에 인력과 시간을 낭비하느니 하루 빨리 아타라로 가는 것이 좋겠군."
힐다를 다시 잡아오는 데 걸리 는 시간만큼 기약 없이 이 설원에 머물러야 했으니 어느 정도는 진
실이었으나, 사실 내가 나서면 힐 다를 잡아오는 것쯤은 금방이었
그럼에도 내가 반쯤 고의적으로 힐다를 놓아주는 주된 이유는 따 로 있었다.
'거래는 지켰다, 지그문트 하이
힐다를 놓아주는 것이 거래의 조건이었으니까.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이 낀 하늘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 울해졌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그날 이후로 큰 사건은 없었다. 북부의 침입으로 얻은 타격을 회 복할 시간이 필요하여 예정 도착 날짜보다 이틀 늦어지긴 했으나, 이 정도는 문제없었다.
순간이동과 행군을 바쁘게 반복 하며 며칠을 더 이동했을까.
"이곳이 아타라입니다."
드디어 아타라 땅을 밟을 수 있 었다.
소설 <요정의 밤>의 주요 활동 지역은 솔라티네 제국이기 때문에 아타라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 다. 그 가운에 등장하는 얼마 안 되는 정보와 내가 이 세계를 살며 알아 온 지식들을 조합해 아타라 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달의 왕국, 아타라는 보석과 마
정석 등의 지하 자원이 풍부하다.
그로 인해 부유하고, 마정석을 이용한 마도공학이 발전했으나, 북부와 맞닿은 지역이 많아 마수 와 북부인들의 침입을 자주 받았 다. 하지만 그럼에도 건재할 정도 로 대단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 다.
"와......
병사 하나가 감탄을 내질렀다. 전쟁이 아니라 관광을 온 것처럼 한가한 태도였으나 아무도 꾸짖지
않았다. 모두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아타라의 수도, 템페라는 수도답 게 굉장히 발전한, 부유한 도시였 다.
우리는 아타라 왕궁을 향해 이 동했다. 가는 길이 시내를 가로질 렀기에 아타라 백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는데, 그들은 전쟁의 공포에 빠져 있다가 지나가는 우 리를 보고 눈을 반짝이곤 했다.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
니다. 오는 길 수고 많으셨습니
마침내 왕궁 앞에 다다랐을 때, 나이가 지긋한 시종이 허리를 숙 여 인사했다.
휙.
"반갑군. 지원군의 지휘관 카슈 미르 크리시스다."
나는 말에서 내려 시종에게 마 주 인사했다. 어느새 다가온 다른 시종들이 내 말을 포함한 다른 말
들을 몰고 가고, 나는 마침내 걸 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밤은 편안히 쉬시길 바랍 니다. 지원군 분들을 위한 연회는 내일 열릴 겁니다."
시종은 상황을 설명해 주곤 우 리를 왕궁으로 안내했다. 나는 건 물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솔라티네 황궁만큼 크진 않았지 만, 화려함으론 뒤처지지 않았다. 갖가지 고귀한 보석들로 장식된 왕궁은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실 지
경이었다.
"이쪽이 일반 병사분들께서 묵 으실 숙소입니다. 그리고 이쪽 이••...
"국왕 전하께서 행차하십니다!"
그리고 시종의 설명을 가르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오늘은 편히 쉬라고 하셨는데......•"
시종 또한 모르던 일인지 당황 한 기색이 역력했다. 보석 꽃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구경하던 나는 그 말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탁
쌀쌀한 늦가을 바람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탁
호쾌하고 큼직한 걸음걸이는 그 의 특징이었다.
탁
투명한 잔에 담긴 압생트와 빛 깔이 똑같은 눈동자가 장내를 빠 르게 훑다 내게 고정되었다.
탁
마침내, 그가 내 앞에 멈춰 섰
나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정체 를 숨기기 위해 로브를 뒤집어쓰 는 게 아니라 얼핏 봐도 귀한 옷 을 입고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군청색 제복을 완벽히 갖춰 입 고 앞머리를 반쯤 쓸어 넘긴 그는 누구도 지배자임을 부정할 수 없 을 만큼 고귀해 보였다.
"슈슈."
낮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 다. 전언 수준으로 작은 소리였기 에 나만 들을 수 있었다. 더욱더 깊어진 레몬 향이 내 코끝을 찌르 고,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얌전히 기다렸는데."
사르륵, 하얀 머리카락이 나부끼 도록 고개를 기울인 그가 물었다.
"지금 안으면 화낼 거야?"
붉은 입술이 가볍게 말려 올라 갔다.
레오.
아타라의 국왕, 알렉산드로 아타 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