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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6화 (226/254)

226화

'귀여운 녀석.'

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직설적 인 물음에 웃음을 삼켰다.

레오는 솔직했다. 그것이 과한 탓에 가끔은 거칠다는 감상까지 일으켰으 나, 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지.'

"지금은 안으면 안 돼. 체통 지켜."

나는 아주 작게 속삭이며 부러 얼 굴을 굳혔다. 애절한 부탁에 흐지부 지 수긍했다가 그가 나를 와락 안았 을 때 생겨날 수많은 구설수와 논란 들을 해명하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 었다.

"••••••진짜?"

" 나중에."

레오야 그의 성격상 인생 혼자 살 며 마이웨이를 걸을 테지만 나까지 거기에 동조할 순 없었다. 아타라에

온 김에 그의 체통을 지켜 주려 했

"솔라티네 제국에 영광을. 아타라는 그대들을 환영한다."

타인의 귀엔 우리의 속닥거림이 들 리지 않았을 테니 레오와 내가 불편 한 침묵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터. 양측에서 걱정스러운 숙덕거림이 커 질 때쯤, 레오가 능청스럽게 입꼬리 를 올렸다. 아타라 측 사람들은 레오 의 웃음을 보고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타라 왕국에 번영을. 환영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친구 레오를 대하는 태도에서 국왕 알렉산드로를 대하는 태도로 부 품 바꾸듯 갈아 끼우며 땅을 왼발 앞 꿈치로 툭툭 치고 주먹 쥔 왼손을 가 슴에 얹은 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기 전에 속성으로 배운 아타라식 인사법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네. 그대가 지휘관 카슈미르 크리시스인가?"

레오가 연둣빛 눈동자를 장난스럽 게 반짝이며 엄숙한 투로 물었다.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공식 적으론 첫 만남이라지만 실제론 막역 한 친우였으니 그의 태도가' 웃길 수 밖에 없었다.

"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검술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네. 내 그대를 만나길 고 대했지."

"소문이 과장된 듯합니다. 부끄럽습 니다."

몇 마디 형식적인 말이 오가고, 레

오는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 정도는 허락하겠나?"

묘한 시건방짐이 말투에 배어 있긴 했으나, 그것이 국왕인 그에게 습관 과도 같은 태도임을 감안하면 정중한 태도였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민 없이 손을 맞잡았다.

"제게 영광입니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박인 손에선 익 숙한 마나가 느껴졌다. 그리운 온기 였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혼들고 빼내었 을까, 레오의 미소가 짓궂어졌다. 그 가 느긋하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럼 반가움의 포옹 한 번 해 주 겠나? 이리 친히 아타라를 도우러 와 준 그대들에게 내 벅찬 마음을 참을 수가 없군."

안는 건 안 된다는 말에 순순히 수 긍하는 줄 알았건만, 그는 능구렁이 처럼 다시금 제안했다. 아슬아슬하게 공식적으로 문제가 없는 선상에서 말 이다.

'이 정도는 특별히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이렇게 친근함의 의미라고 못을 박 은 이상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팔을 벌리고 레오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와락.

내가 부드럽게 안은 것이 무색하게 레오는 내가 품에 들어가자마자 가두 듯 꽉 안았다. 그의 군청색 제복에 코를 박게 된 나는 몰아닥치는 레몬

향에 질식할 것 같있다.

"••••••뭐야."

내 몸을 안고 잠시 침묵하던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분위기는 삽시간 에 가라앉았다.

몇 번 허공에서 크게 숨을 들이쉬 던 레오는 내 목덜미에 살며시 얼굴 을 묻었다. 그의 콧잔등이 살갗에 살 짝 스치는 정도라 겉으로 봤을 때 이 상하진 않겠으나, 감각이 예민한 내 겐 그기'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생 생하게 느껴졌다.

"너......

고개를 든 레오와 눈이 마주쳤다.

"피 냄새 나."

연둣빛 눈동자가 시리게 번들거렸 다.

북부와 전투를 치른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큰 상처는 없어도 잔상처 까지 피할 순 없었다.

아타라의 손님으로 온 만큼 왕궁에

들어서기 전에 물수건으로 몸을 닦고 머리를 감았으나, 물을 받아 목욕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다. 몸에 피 냄새가 빠지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아타라 측엔 북부 습격 사건 을 보고하지 않았으니 모르겠지.'

먼 길 무사히 왔다고 생각한 친구 몸에서 피 냄새가 나면 나라도 당황 했을 것이다. 나는 담담하게 웃으며 레오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자세한 보고는 조금 뒤에 하겠습

다. 우선 짐을 풀고. 아니. 나부터 봐."

단호하게 잘라 낸 레오7} 내 어깨 를 살며시 붙잡은 채로 주위를 가볍 게 둘러보았다. 그는 붉은 입술을 말 아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일말의 감 정도 없이 냉랭하고 건조했다.

"모두들 긴 여정 동안 수고 많았겠 지. 조속히 해체하고 쉬도록. 하지만 지휘관이란 막중한 직무를 가진 이가 보고도 하기 전에 쉴 수는 없는 노릇 이니...... 크리시스 지휘관은 조금만 더 힘써 주었으면 좋겠네."

하나같이 맞는 말로 말끔하게 상황 을 정리한 레오가 시종들에게 고갯짓 했다.

"지원군을 숙소로 안내해라."

"네."

"거기 넌 크리시스 지휘관의 짐을 옮겨 놓도록."

" 알겠습니다!"

기합이 바짝 든 시종들이 일사불란 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부관 조나단이 내 게로 성큼 다가와 귓가로 고개를 숙

였다.

"쉬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잠을 못 주무셨지 않습니까."

"심각한 수준은 아니야 먼저 들어 가."

부관다운 걱정이었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물렸다. 그는 내가 걸리는 듯 몇 번 나를 돌아보았으나 얼마 지 나지 않아 안내를 받으며 숙소로 사 라졌다.

"그대들도 물러가 보도록. 지휘관과 는 단둘이 대화하도록 하겠다."

"네? 하지만

명령을 들은 시종들이 당황한 기색 이 역력한 채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보 았다. 그와 나는 대외적으로 처음 만 나는 사이이니 그럴 법도 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레오의 눈매가 더욱 서늘해졌다.

"'하지만'이라. 그대들에게 그런 것 도 있던가?"

주위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은 권위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이 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시종들은 고개를 숙 이곤 전광석화로 사라졌다. 공포로 가득 찬 그들의 두 눈은 흡사 쌍검을 든 대악마를 보는 듯했다.

나는 텅 빈 복도를 보며 눈을 끔뻑 이다, 레오를 돌아보았다.

"망나니처럼 사나 보지?"

"공포를 적절히 이용하는 것뿐이야. 날 뭘로 보는 거야."

단둘이 남아 예의를 내던지고 풀어 진 내 말투에도 그는 자연스럽게 대 꾸했다. 나를 집요하게 내려다보던 레오가 얼굴을 구겼다.

"너, 어디 다친 거야."

"안 다쳤는데......

"피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안 다쳤 다고?"

"내 피 냄새 아니야."

"네 피 냄새 맞잖아. 그것도 구분 못할 줄 알아?"

아리송해진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

렸다. 배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닌 이 상 전투가 끝나고 몸 상태를 확인하 지 않는지라 사실상 자잘한 상처들의 존재엔 아예 무지했다.

'후각 더럽게 예민하네.'

나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레오에 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는 이전부터 유독 예민한 후각을 가지고 있었는 데, 소드 익스퍼트가' 된 이후로는 아 예 개코가 된 것 같았다.

"안겨."

레오는 한숨을 푹푹 쉬며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대단히 어이가 없어졌

"미안하지만 내 다리 두 쪽 다 멀 쩡해. 공중제비 돌면서 허공 답보하 는 거 보여 주리r

"꽤 귀여운 재롱이겠지만 다음에. 얼른 안겨."

"아니, 왜 굳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사 람이 무너지는 건 이미 본 적 있어."

레오가 담담히 읊조리는 말의 주인 공은 이미 알고 있었다.

' 레이샤.'

누구보다 단단했던 여자는 그 앞에 서 무너졌다.

"네가 강한 것과 걱정하는 것은 별 개야. 사람은 너무 쉽게 부서져."

나와 눈을 맞춘 그의 두 눈이 깊어 졌다.

"걱정돼서 그래."

레오의 진심 어린 말은 늘 나를 약

하게 만들었다.

"......너도 참 사서 고생이다."

나는 혀를 차면서도 더 이상 거부 하지 않았다.

이제 걱정을 매끄럽게 받아 내는 방법을 배웠다. 아직도 조금 어색하 지만, 전처럼 어쩔 줄 몰라 하진 않 았다.

" 아니까......

"야. 근데."

레오의 말허리를 뚝 끊어 먹고 주 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리 신경 을 곤두세워도 나와 그 외의 인기척 은 느껴지지 않았다.

' 그렇다면......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거 목마 태워 주면 안 돼?"

"••••••뭐?"

나는 히죽 웃었다.

이왕 옮겨지는 거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착했다, 화상아."

발걸음을 멈춘 레오가 나를 의료실 침대 위에 내려 주었다. 의료실에 누 군가 있었다면 그의 어깨에서 후다닥 내려왔을 텐데, 다행히 점심 시간이 겹쳐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휘적 거렸다.

"높은 곳 경치 좋더라. 이런 걸 여 태껏 너 혼자 봤단 말이0卜 좋았냐?"

소드 마스터가 되어 허공을 답보하 며 하늘을 날아다니다시피 해도 여전 히 목마는 재밌었다.

내 장난스러운 투정에 레오는 헛웃 음을 내뱉었다.

"그럼. 널 계속 어깨에 싣고 다녀 줄까? 난 좋은데. 자신 있으면 타고 다녀 보든지."

"아니. 미안. 꼭두각시 아타라 국왕

의 인형사라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

영양가 없는 티카타카가 이어지•己 레오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 았다. 나는 저절로 레오를 내려다보 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

살짝 몸을 일으킨 그는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짚더니 내 목덜미에서부터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며 내려가기 시 작했다.

"네가••... 개나?"

"벗겨서 확인할 순 없잖아."

나는 어이없음과 미묘한 감정을 반 씩 담은 눈빛으로 내 몸을 핥을 듯 샅샅이 피 냄새를 확인하는 레오를 내려다보았다.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고 왔으니 악 취는 나지 않겠지만 저렇게 대놓고 맡는 모습을 보자니 걱정이 들었다.

"악취는 안 나지?"

"응?"

내 오른쪽 팔을 들고 손목에 코끝 을 대던 레오가 피식 웃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 나."

"꼬순내라도 나냐?"

"바보야. 네 냄새 낸다고"

우리는 동시에 키득거렸다. 그와 나 는 미묘함과 장난스러움 사이에서 줄 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내 왼쪽 발목을 잡아■든 레오가 허 벅지에서부터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나는 이 상황이 우스우면서도 정의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바지 걷어 봐."

미간을 꿈틀거린 레오가 내게 손짓 했다. 나는 바짓단을 걷어붙였다.

"어."

"......이 꼴이 났는데 치료를 안 했 다고?"

그리고 드러난 상처에 탄식했다. 왼 쪽 종아리 뒤쪽에는 마른 피로 버적 거리는 상처가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

레오는 차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떻게 이걸 몰랐지.'

나는 새삼 내가 통증에 대단히 무 감각하다는 걸 깨달融다. 전투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치료가 되 지 않은 것을 보아 처음 났을 땐 꽤 깊은 상처였을 터인데.

나는 상처가 났을 때도, 옷을 갈아 입을 때도, 심지어 몸을 닦을 때까지 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투 후 마수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탓에 온몸이 따 가웠던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감각이 예민하다 자부한 게 무색해 지는 순간이었다.

"왜...... 여기 상처가 있을••...까?"

나는 야차 같은 표정을 한 레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꼬리를 날카롭게 세운 그는 분이 섞인 손길로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 다

"이걸 못 알아챌 정도면 통증을 느 끼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오••...

"지금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싶었 지?"

정곡에 찔린 나는 고개를 슬쩍 돌 렸다.

용병으로 바쁘게 살 땐 통증에 귀 기울일 틈이 없었다.

크리시스가 되며 많은 것이 달라졌 으나, 아플 때마다 즉각적으로 반응 하는 건 아직도 어려웠다. 신음을 참 고 참다가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묵 묵히 급한 상처만 치료하는 것에 익

숙했다.

"넌 예전에 나랑 살 때도 그랬지. 내 상처는 곧잘 치료해 주면서 네가 팔 다쳤을 땐 괜찮다는 헛소리를 하 더라."

"뭐...... 그땐 그냥 긁힌 거였잖아."

"긁혀? 네 팔이 날아갔었다."

레오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면서도 야무지게 붕대를 감아 주었다.

조심스럽게 내 다리를 이리저리 돌 려 본 그는 아름다운 연둣빛 눈동자 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뎌지지 마. 아프면 아프다고 말 해. 네 앞에선 몇 번이고 더 무릎 꿇 을 수 있으니까."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내 앞에 서 무릎 꿇은 상태에서도 침대에 앉 아 있는 나와 키가 엇비슷한 레오를 보고 있자면 그가 정말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있었다.

"정말 많이 컸구나."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끝으 로 그의 턱 밑을 느리게 긁었다. 천 둥벌거숭이에서 언제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컸는지 의문이었으 나 싫지 않았다.

"......하."

레오는 나와 정반대로 얼굴을 굳힌 채 헛웃음을 뱉었다. 내 다리를 툭 놓은 그의 눈이 번뜩였다.

"맞아."

순식간에 몸을 일으킨 레오가 그의 턱을 간지럽히던 내 손을 가볍게 붙 잡고 날 덮치듯 상체를 숙였다.

내가 놀라서 몸을 기울였을까, 그가 내 쇄골 부근을 부드럽게 밀며 완전 히 침대에 눕혔다.

스르륵.

긴 머리카락이 침대 위로 넓게 펴 졌다. 나는 내 몸 위로 큰 그림자를 만드는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아슬아슬한 얼굴을 한 레오가 날 내려다보며 생글 웃었다.

"나 많이 컸어, 누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르게 눈빛은 맹수와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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