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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7화 (227/254)

227화

오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내 시야를 가득 채운 인영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불도 밝히지 않은 탓에, 이곳에 빛 이라곤 의무실 창문을 여과하는 오렌 지 빛 햇살뿐이었다.

등 뒤로 햇살을 받으며 짙게 그림 자 진 레오의 얼굴은 빛과 어둠으로 세심하게 빚은 조각 같았다.

'절대 누나라고 안 부르겠다더 니••...

애 취급하지 말라며 곧 죽어도 이 름으로 부르던 때는 어린애처럼 느껴 졌건만.

그의 의지로 태연하게 누나라 호칭 하는 지금은 역설적으로 성숙해 보였 다.

나는 힐끗 시선을 돌려 내 손목을 강하지 않게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 다. 내가 두 손으로 잡아야 겨우 잡

을 수 있는 크기였다.

"......크면서 힘들진 않았어?"

내 한 손에 매끄럽게 들어오던 작 고 고운 손과 지금의 크고 거친 손은 간극이 컸다. 그와 나 사이의 공백을 떠올리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힘들었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 을까. 나는 내 손으로 재앙을 불러들 였고, 피와 유황으로 숨이 막혔지. 불행은 나의 신이었어."

레오는 비탈길과도 같은 각도로 입

꼬리를 비틀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오른 레오를 구제하지 못할 괴물로 치부했으나, 나는 그렇 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내 소중한 사람이 죽었 어. 나를 지키겠다고? 나는...... 싫어. 더는 잃으면 아픈 사람을 만들고 싶 지 않아.'

내가 본 레오는 찌르면 피가 흐르 는 사람이었다.

그의 도덕 기준은 평범함과는 상당 히 떨어져 있긴 했으나, 인간성이 말 살된 수준은 아니었다.

피투성이 길을 걸으며, 그는 그 나 름대로 괴로워했을 터였다.

살인을 하고 나서는 그 전으로 돌 아갈 수 없다. 전과 후가 낮과 밤처 럼 나뉘었다. 그게 누군가의 호흡을 빼앗은 죗값이었다.

"왕좌를 탈환한 뒤로부터 현실의 그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 지. 하지만 꿈에서는 아니더라."

레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밤바다 속 해파리처럼 선명한 형광빛 이 도는 연두색 눈동자가 아릿하게 반짝였다.

"과거의 망령들이 나를 괴롭힐 때 마다 나는 신이 아니라 네 이름을 불 렀어. 나를 버린 신에게 자비를 비느 니 인간의 가호를 간구했•己 넌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었거든."

레오는 내 손목을 집지 않은 손으 로 천천히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 었다. 투박하지만 상냥했다.

"나는 널 향한 감정으로 성장통을 겪고, 네가 해 준 말들을 양분으로 자랐어. 그 긴 시간 동안 보고 싶었 어, 슈슈."

레오의 웃음은 햇살보다 더 눈이 부셨다.

"......그런 주제에 즉위할 때까지 한 번을 안 찾아왔어? 늦었다고•"

간질거리는 솜뭉치가 온몸을 누비 는 느낌에 조금 꾸물거리다 너스레를 떨며 레오의 가슴팍을 밀고 자연스럽

게 몸을 일으켰다. 이상한 기분이 전 두엽에서 빙빙 돌다 심장으로 쿵 떨 어졌다.

"어쩔 수 없었어. 왕좌에 오르지 못 한 초라한 모습으로 널 찾아갈 순 없 잖아."

끝말은 속삭이듯 작았으나, 내 귀엔 확실히 들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 다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 어."

"내가 상관 있어. 네겐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단호하게 잘라낸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보고는 내일 듣는 걸로 하고. 숙소 로 데려다줄게."

왜 내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은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소중한 친구라서?

그렇게 정리할 수 있는 마음일까. 나는 의문을 천천히 고찰하며 레오의 손을 맞잡았다.

"그래. 네가 안내해 줘."

이곳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 람은 레오뿐이었다.

레오는 숙소로 가는 길에 왕궁을 소개시켜 주었다.

아타라의 왕궁은 화려한 것들엔 익

숙해졌다고 생각하던 나도 시선을 빼 앗길 만큼 휘황찬란했다.

그때까지 손은 꼭 잡고 놓지 않은 채였다.

가끔 시종이나 관료로 보이는 이들 이 지나갈 땐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슬쩍 손을 뺐지만, 지나간 뒤엔 레오 가 칼같이 다시 손을 잡았다. 그게 귀엽게 느껴졌던 나는 순순히 잡혀 주었다.

그러다 어느 곳에 시선이 닿았을 때, 나는 덜컥 발걸음을 멈췄다.

"왜.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어? 보 석 떼어 줘?"

"아니, 저거......

마찬가지로 멈춘 레오가 내 손끝이 가리킨 곳을 시선으로 좇더니 입매를 굳혔다.

왕궁의 분수대 앞엔 사람을 본딴 조각상이 있었다. 왕궁을 장식한 수 많은 장식품들 중 가장 큰 사이즈였 다

조각상은 고귀한 대리석으로 머리

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표현 되어 금방이라도 후 입김을 내뱉으며 움직일 것 같았다.

나는 조각상 아래 작품명이 적힌 금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분이 네 유모야?"

[레이샤]

그곳엔 내가 아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생경하게 조각상을 바라보았

다. <요정의 밤>에서 레이시익 외묘 묘사는 한 줄도 없었으니, 나는 이제 야 레이샤의 생전 외양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창백하게 표현 한 피부의 질감. 세심하게 빚은 콧대 위로 비스듬히, 길게 남은 흉터. 늑 대 수인답다 싶은 서늘하고 강직한 인상. 두 눈에 박힌 포도색 자수정까 지.

레오의 영웅은 서늘한 대리석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 내 유모야."

낮은 목소리로 답한 레오는 천천히 조각상 앞에 섰다.

감정 없는 레이샤의 얼굴을 올려다 보는 그의 표정은 회의와 향수, 그리 고 괴로움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녀는 복수해 달라고 했지. 한낱 왕자의 유모가 아니라 왕의 기틀을 닦았던 신하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

레이샤는 레오에게 살아갈 동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강하게 충동질한 것일 테지만, 어린 레오에겐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레이 샤는 아직도 레오에게 트라우마 그 자체였다.

"이제 왕이 됐어. 그녀의 요청을 얼 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이 조각상을 아타라 전국에 세우고 역사서에 그녀 의 이름을 기록해 모두가 기억하도록 하면 만족스러워할까?"

레오는 두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금판에 새겨진 레이샤의 이름을 더듬 었다.

연둣빛 눈동자엔 상처로 금 간 파 편들이 빛을 쪼개며 산산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땐 날 자랑스러워할까."

갈라진 목소리는 오랜 가뭄으로 메 마른 토양 같았다. 레오는 몸도 생각 도 훌쩍 자랐지만, 정신은 여전히 사 랑과 인정에 목마른 아이였다.

결핍이었다.

"레오."

"걱정 마. 그냥 해 본 소리니까."

"이 조각상 보는 거 괴롭지 않아?"

레오에게 레이샤는 트라우마 그 자 체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것을 궁 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 둔 그의 심정을, 나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레오가 날 돌아보았다. 새하얀 속눈 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한 차례 우 아하게 팔락였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레이샤를 잊지 않는 게 더 중요해."

나는 집착적으로 중얼거리는 레오 에게서 또다시 다른 인영을 겹쳐 보 았다.

'앗아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드시 짋 어진다...... 앗아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드시 짋어진다...... 앗아가는 생명 의 무게를......

레오는 카라쇼를 잃었을 때의 나를 닮아 있었다.

"고행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망자는 보지도 못할 텐데."

레오가 눈을 번뜩였다. 그는 레이샤 가 자신의 역린임을 가감 없이 드러 내고 있었다.

"그럼 이거 말고 뭘 할 수 있는데." "한 번 더 생각해 봐. 레이샤는 네 가 괴로워하는 걸 원할 사람이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알긴 뭘 알겠냐. 그냥 내 마음대로 말하는 거지."

날카로워진 레오에게 뻔뻔함으로 응수했다. 어이가 없는지 순간 경계 를 허물고 헛웃음을 뱉는 그를 보며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 스승님을 죽이고 나서 내가 괴 로울수록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하며 미친놈처럼 사지에 뛰어든 적이 있었 거든."

"......뭐?"

"결론적으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어.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己 스 승님의 죽음은 슬펐고, 내 꿈에 찾아 오는 스승님은 날 결코 용서해 주지

않으셨지. 몸만 뒤지도록 고생한 거 지."

카라쇼를 보내고 한동안 집에서 폐 인처럼 살았다. 아리아의 만류로 겨 우 다시 일을 시작한 나는, 한동안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임무들만 처리 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그것이 내 속죄가 될 거라고 생각 했건만, 안타깝게도 나아지는 건 없 었다.

"네 유모님껜 미안하지만 나는 네 가 더 중요해. 괴로운 걸 억지로 버

티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태껏 말한 적 없는 내 과거를 듣 고 혼란스러운지 얼굴을 구기는 레오 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간은 만병통치약은 아니나 진정 제 정도는 되었다. 나도 이제야 그에 게 별일 아닌 듯 말할 수 있었다.

레오가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 이 나이가 되도록 극복하지

못한 게 한심해."

"그런 게 어딨나? 넌 일반인이 우

리 같은 오러 사용자들처럼 감기를 기합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1주일씩이 나 끙끙 앓으면 한심하게 생각해?"

사람마다 극복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은 제각각이다. 빠르다고 하여 아프 지 않은 것도, 느리다고 하여 나약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레오가 겪 은 아픔은 그가 감당하고 있는 것이 용할 정도로 컸다.

나는 그의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늦어도 상관없어. 억지로 마주하고

기억하려 하지 마. 마음의 준비가 됐 을 때 마주해도 늦지 않아. 망자는 떠나지 않잖아.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실걸."

그것이 망자의 상냥함이다. 참을성 없고 생동적인 산 자들과 다르게 그 자리에서 끈질기게 기다려 주었다. 무덤에 발이 달리지 않은 것도 그 때 문 아니겠는가.

죽은 자는 변하지도 않고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곳에, 그 시간에, 그 순간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유 일한 위안이자 가장 큰 비극이었다.

"조각상은 잠시 덮어 둬. 준비가 끝 나면 다시 만나서 인사드려."

나는 카이사르의 인자한 붉은 눈을 떠올리며 한숨처럼 웃었다.

"어떤 것들은 어린 날의 홍역처럼 한바탕 앓고 나서야 넘어갈 수 있대. 충분히 앓고 나서 마주해 봐."

사랑과 친절은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다는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내가 카이사르의 무조건적인 애정 덕 분에 누군가를 조금 더 어른스럽게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레오가 고개를 떨구었다. 넓은 어깨 가 그 순간만큼은 수많은 짐에 눌려 좁아 보였다.

하얀 뺨을 타고 떨어지는 투명한 물줄기를 못 본 것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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