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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8화 (228/254)

228화

내가 묵을 숙소는 쾌적함을 넘 어 호화스러웠다.

레오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 선 나는 내부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넓고 좋네."

"그렇지?"

"네 궁에 위치해 있고."

"맞아."

"네 방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방 이고."

"으 "

흐 •

"웃냐? 뭘 잘했다고 웃어?"

" 매정하긴."

나는 이슬 묻은 꽃봉오리처럼 수줍은 미소를 지은 레오의 뒤통 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레오는 얻 어맞고도 뭐가 좋은지 낄낄 소리 내어 웃었다.

"너랑 내가 각별한 사이라고 신 문사에 제보도 하지 그러냐?"

"그럴까? 신문 1면에 엄청 크

게. 제목도 자극적이어야겠지?"

휘적휘적 방에 들어선 레오가 거대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자기 방이라도 되는 양 뻔뻔스러운 태 도였다.

'자기 궁을 숙소로 줄 줄은 몰랐 는데.'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타라 왕궁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곤 하지만, 그 안엔 수많은 종류의 궁들이 있었다. 시종들이

머무르는 궁부터 무도회 같은 거 대한 행사들을 진행하는 궁까지.

그 수많은 궁들 중 가장 중요시 되며 어느 곳보다 많은 신경을 써 서 관리하는 곳은 당연히 가장 깊 은 곳에 위치한 이곳, 레오의 궁 이었다.

나를 제외한 솔라티네의 지원군 은 남쪽 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원군 전원에게 궁을 내준 것만 으로도 대단한 대접.

그중에서도 나는 아예 따로 자

기 궁에 숙소를 내준 건 선을 아 슬아슬하게 넘나드는 호의였다.

'국왕이 손님에게 자기 궁을 내 준다는 건 막역지우라는 뜻이거 나...... 세컨드란 소리지.'

이건 가십거리에 목마른 사교계 에 옜다 마셔라 하고 샴페인을 터 트려 주는 짓이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사람들 이 떠드는 소리엔 신경 하나 안 쓰더니."

내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던 레 오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원한다면 네 이름을 입에 올리 는 모든 이들의 머리를 은쟁반에 담아서 선물할 수도 있어."

붉은 입술이 그리는 웃음은 어 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담겨 있어 더욱 오싹했다. 나는 질겁하 며 고개를 저었다.

"됐거든. 너 때문에 그러는 거잖 아. 사람들이 너에 대해 함부로 떠들까 봐."

" 내가?"

레오는 다리를 쭉 뻗은 채 침대 맡에 등을 기댔다. 침대 위에서 묘하게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색 정적이었다.

"그럴 수 있는 이들은 즉위할 때 다 죽여 버렸을 텐데."

"미안. 내가 가끔 네가 폭군이라 는 걸 잊는다."

진실성 가득한 그 말에 나는 곧 바로 납득했다.

'자신의 왕궁을 내줄 만큼 지원 군에게 국빈 대접을 해 준다는 뜻 으로 포장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오기 전에 속성으로 공부한 바,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나는 이쯤에서 납득하기로 했다.

레오에게 피해만 없다면, 나에 대해서는 뒤에서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었다.

"언제까지 거기서 굴러다닐 거 야. 그만 가."

나는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레오를 흘겨보며 침대에 털썩 걸 터 앉았다.

북부의 습격이 있은 뒤, 혹여 또 다른 습격이 있을까 봐 미친 듯이 경계하며 한숨도 자지 않으며 이 동해 왔다. 급박하게 올 땐 몰랐 건만, 막상 숙소를 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으흥. 같이 잘까?"

"염병 떨지 말고."

"진짜 너무하네."

엎드려 누운 채로 꽃받침을 한 레오를 단호하게 내치니 그는 투 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 는 신발만 툭툭 벗고 침대에 널브 러지듯 누웠다.

"바로 잘 거야?"

"그래."

내 옆에 선 레오가 상체를 굽히 더니 이마에 달라붙은 내 머리카 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의 손은 실온에 놓아두었던 냉차처럼 적당 히 시원해 기분이 좋았다.

"그럼 굿나잇 키스 정도는 허락 해 줄 거지?"

그가 날 내려다보며 악동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해 보던지."

" 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레오가 내게로 몸을 굽혔다.

그리고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수고했어."

낮은 속삭임과 함께, 나는 무언 가에 끌려가듯 푹 잠들었다.

나는 그대로 뻗어서 한 번도 깨 지 않고 아침까지 잤다. 오랜만에 개운하게 일어나 시종들의 도움으 로 가벼운 식사를 마쳤을까, 부관 조나단이 날 찾았다.

"평안하셨습니까."

"그래. 좋은 아침이군."

형식적인 인사로 말문을 열어 딱딱한 보고를 이어 가던 조나단 이 검은 눈을 위로 굴렸다가 날 힐끗 바라보았다. 짧은 시간 동안 관찰한 바, 저건 그가 내 눈치를 볼 때 하는 행동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좋 네."

나는 홍차가 든 찻잔을 내려놓 으며 먼저 말문을 터 주었다. 잠

시 침묵하던 그가 느리게 입을 열 었다.

"아타라 국왕과 아는 사이십니 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날 대하던 레오의 태도부터 자신의 궁을 숙 소로 내준 것까지, 정황을 보면 초면이라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 었다.

"그래. 오랜 친우지."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숨길 필

요는 없었다. 조나단의 표정이 묘 해졌다.

"친우가 맞습니까?"

"뭐?"

"제가 많이 의지하는 형님이 있 습니다."

'아는 형님이라.'

나는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도 조나단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 했다. 그는 내 앞에서 공적인 이 야기를 제외하곤 입을 여는 법이 없었기에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시피 했다.

"그 형님이 지휘관님을 바라볼 때도, 꼭 그런 눈빛을......

생각에 잠겨 혼자 중얼거리던 조나단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 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 오."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건 말을 하 다 마는 것인데.'

나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조금 찝찝했지만, 몇 마디 들은 것만으 론 내용을 유추할 수 없는 데다 더 따져 묻기도 그랬으니 넘어가 기로 했다.

"오늘 밤은 환영 연회가 있으며, 내일은 아타라와 함께하는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엔 회의에서 결정된, 가장 유력한 북부의 침입 예정 지역으 로 이동합니다."

조나단의 보고는 늘 명료했다. 그의 유능함을 증명해 주는 시간 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더 들어야 할 게 있나 싶어 의 아해하는 표정으로 조나단을 바라 보니, 그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날 때 세레논 황자님을 만나 뵈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 다."

"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꿀잠 자느라 그를 만나 인사하 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분명 지휘관 이 되었다는 걸 말할 기회가 있었 음에도 일언반구도 없으셨던 무정 한 스승님 아니십니까?"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비죽거리 는 세레논의 시선을 피했다. 세레

논은 뒤끝이 제법 강했다.

"......깜짝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그리울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 까."

"그런 것치고는 아타라에 도착 하신 당일에 끝까지 절 찾지 않으 시더군요. 스승님이 함께 오신다 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질책을 와다다 쏟아냈다. 나 는 말로 얻어맞는 기분을 느끼며 쭈그렁 밤탱이가 되어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죄송합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시 죠."

서프라이즈를 의도했다 해도 도 착한 뒤엔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그대로 푹 잠들어 이튿날인 오늘 에서야 얼굴을 비췄으니 할 말이 없었다.

조금 풀린 낯으로 한숨을 쉰 세 레논이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X 스니 으 "

- O O 1-

"여어, 공녀님! 아니, 이제 지휘 관님이라고 불러야 하지!"

방정맞은 목소리가 세레논의 말 허리를 툭 끊었다. 세레논의 얼굴 이 종이에 힘을 준 듯 구겨졌다.

"지휘관님의 설탕과자 왔어요!"

온기를 머금은 신성력이 훅 가 까워졌다. 세레논의 뒤쪽으로 짧 은 은발을 흩날리며 히죽거리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율리 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내가 그에게 인사하려던 찰나, 미세하게 가시 돋은 목소리가 한 발 빠르게 울려 퍼졌다.

"그간 평안했나, 율리안 대신 관."

인사를 건네는 세레논의 말투엔 명백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

"이게 누구야."

샐쭉하게 휜 눈매 아래 엷게 드 러난 연보랏빛 눈동자가 번뜩였 다. 온순하던 율리안의 기운이 급 속도로 서늘해졌다.

보니 더욱 반갑네요, 저

능글능글 너스레를 떤 율리안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세레논은 인사를 받으면서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둘이 사이가 안 좋았나?'

예상치 못한 조합을 의아한 눈 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을까, 평소 보다 몇 배는 싹퉁바가지 없게 헤 실거린 율리안이 나와 세레논 사 이를 자연스럽게 치고 들어왔다.

"지휘관님께는 무슨 일로?"

"제자가 스승님을 만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던가."

"하지만 우리 지휘관님은 워낙 에 바쁘신 분이니까요. 볼일 끝나 셨으면 가 보시는 게 좋을 듯한 데."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한 기 싸움

이 오갔다.

황자와 대신관인 두 사람의 실 질적 권력은 거의 동일했다-율리 안이 존대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가 예를 중시하는 신전의 일원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치 열했다.

'나는 핑계고 그냥 둘이 싸우고 싶은가 본데.'

'나 때문에 싸우지 말아요, 둘 다......!' 같은 식상한 대사를 치 기엔 두 사람의 목적이 내가 아닌

게 확연히 보였다.

상어 싸움에 낀 고래가 되어 버 린 나는 서로에게 달려들기 일보 직전인 두 사람을 짜게 식은 눈으 로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스승님과 친분 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사교계의 정보통 어쩌고 하더 니 다 헛소문이었나 보죠? 저랑 지휘관님이 어떤 사이인지 아직 모르세요?"

코웃음 친 율리안이 날 휙 돌아 보았다.

나는 두 사람 싸움에 날 끼워 넣지 말라는 뜻을 담은 간절한 눈 빛을 보냈으나, 율리안은 눈치도 귀신같은 주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로 다가왔다.

"스승님, 설마......? 그렇지만 저 인간은 분명 아리아 공녀를......

세레논이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오해를 한 건 지 곧바로 알아챈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으나, 율리안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저는 지휘관님이 제일 아끼는 설탕과자죠?"

화사하게 웃는 채로 턱에 손을 대어 꽃받침을 한 율리안은 큰 몸 을 구겨 내 어깨에 머리를 폭 기 댔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영롱하 게 반짝거렸다.

"드디어 미쳐 버린 겁니까?"

입을 떡 벌린 채 율리안을 내려

다보던 나는 율리안에게 작게 속 삭였다. 그는 애교 많은 고양이처 럼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행동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 리로 대답했다.

"저 인간 앞에서 자존심 좀 세 워 주십쇼. 제발요. 저 지기 싫어 요."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가 축 처질 만큼 간절한 모양이었다. 내 가 조금 망설이고 있었을까, 입술 을 꾹 깨문 세레논이 주먹으로 자 신의 가슴팍을 퍽 쳤다.

"제가, 제가 저 사람보다 더 깜 찍할 수 있습니다!"

나는 파격적인 발언에 귀를 의 심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세레논의 희뿌연 푸른 눈은 버림받은 개처 럼 애처로웠다.

'제발 나 빼고 싸워 주면 안 돼?'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개와 고양이의 합사를 실패한 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에게 스펀지에 물 빨리듯 기를 빼앗기고 있었을까.

쨍그랑.

"뭔••••••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잠깐, 이 사람이 여기에 왜?'

뒤늦게 기운을 감지한 나는 화

들짝 놀라서 고개를 휙 돌렸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 반응에 율리안과 세레논도 덩달아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잘린 검은 단발머리. 청명한 스카이블루의 벽안. 춥고 척박한 북쪽 탑에 사는 마녀라고 해도 믿을 법한 서늘하고 무심한 인상.

황궁 기사단의 기사, 카시아였 다.

"......제가 치정 싸움을 방해했 습니까?"

물병을 놓친 그녀는 떫은 감을 억지로 입 안에 욱여넣게 된 사람 처럼 껄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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