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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29화 (229/254)

229화

"무슨 생각을 하셨든 오해입니 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댄 율리안의 머리통을 밀치며 고개를 격렬히 내저었다. 카시아가 왜 여기 있는 지 의문이었으나, 오해를 해도 단 단히 한 것 같은 카시아에게 해명 하는 게 우선이었다.

"훈련관님, 아니, 지휘관님께서

남성 편력이 강하시다는 건 오늘 알았습니다."

" 아닙니다!"

떫은 표정을 하고 있는 카시아 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언성이 높 아졌다. 나는 이를 뿌득 갈며 율 리안과 세레논을 돌아보았다.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 까 어떻게 좀 해 봐!'

두 사람 다툼에 끼어서 이게 무 슨 봉변인가 싶었다.

내 눈빛을 받고 눈을 끔뻑인 율 리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지휘관님은 연인 같은 게 아니에 요."

'그렇지!'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저렇게 확실히 말해 주었으니 오해는 풀 릴 터였다.

코웃음을 친 율리안은 아이처럼 내 팔을 제 품에 꽉 안았다.

"제가 일방적으로 지휘관님께 종속되어 있는 거라고요!"

"진정 미쳤습니까?"

나는 육성으로 비명을 토해 낼 뻔했다. 내가 경멸스러운 눈빛을 담아 율리안을 흘겨보고 있었을 까, 세레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래. 이 자리에서 똑바로 해 두도록 하지. 나는 이분과 연인 같은 것이 아니다."

세레논은 내 제자가 된 이후로 나와 염문에 시달린 만큼, 지겨운 걸 끊어 내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만큼은 미친 율리안과 다 르게 확실히 이 상황을 정리해 줄 거라 믿으며 한 줄기 희망을 가졌 다.

"나와 스승님은 연인이라는 얄 팍하고 끊어지기 쉬운 관계가 아 니라, 영혼으로 이어져 절대 떨어 질 수 없는 진득하고 끈적한 사이 라는 걸 확실히 기억해 두도록."

"젠장, 더 이상하잖습니까!"

세상의 정의는 죽었다.

카시아는 이제 레몬 과육을 입 안 가득 욱여넣은 사람처럼 얼굴 을 구기고 있었다.

"그다지 궁금한 정보는 아니었 습니다만...... 네. 끝장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공녀와 대신관, 황자 앞에서도 여전히 당당하고 직설적인 카시아 는 무엄한 소리를 중얼거리곤 자 리를 뜨려 했다. 이 상황에 조금 도 끼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우선 내 말을 들어 보세요."

"본래 영웅호걸은 색을 밝힌다 고 들었습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 니 저는 빼고 해 주십시오."

" 아니라니까!"

나는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휘관님과 황자 저 하께선 사제 관계, 지휘관님과 대 신관님은 친구 관계일 뿐이라는

거죠."

"당연합니다."

"솔직히 말하셔도 소문 내지 않 을 수 있습니다만......

"제발 믿어 보세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제 턱을 매 만지던 카시아는 내 간청에 어깨 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 전히 마뜩잖은 기색이었지만.

"그나저나 카시아 경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겁니까?"

나는 나무 그늘 아래 바위에 앉

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진정한 뒤에야 물었다. 겨울이 여물어 가 며 줄곧 하늘이 칙칙했는데 오랜 만에 해가 환하게 떠 기분을 풀리 게 만들었다.

"황궁 기사단에서 아탁라에 갈 병력을 지원받길래 신청하고 1군 으로 왔습니다."

"그랬군요. 병사들의 명단을 채 다 확인하지 못해 몰랐습니다. 특 별히 온 이유가 있습니까?"

카시아의 청명한 푸른 눈이 한 차례 굴렀다. 날 힐끗 곁눈질한

그녀는 무심하게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습 니다. 딱히 지휘관님 때문인 건 절대 아닙니다."

'나 때문이구나.'

시행착오 끝에 카시아의 거친 말을 사금 치듯 걸러 원 뜻을 알 아들을 수 있게 된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이젠 솔직하지 못한 카시 아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요?"

다른 바위 위에 양반다리로 앉 아 주머니에서 꺼낸 건포도 빵을 우물우물 먹어 치우던 율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무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세레논이 나와 카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대는 황궁 1기사단의 정식 기사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네."

"검은 머리에 푸른 눈...... 스승 님께 매일 덤벼든다던 소문의 무 식한 기사가 그대인 모양이군."

세레논의 정확한 관철에 카시아 는 조금 수줍은 기색으로 뒷머리 를 긁적였다. 무식하다는 소리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카시 아도 정상은 아니었다.

'참 묘한 조합이네.'

나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살이 적절하게 새어 들어오는 큰 나무 그늘 밑엔 세레논, 카시 아, 그리고 율리안이 함께 있었 다.

공통분모라곤 아타라 지원군이 라는 것뿐. 서로 친분이 깊지도 않고 신분도 제각각인데 자연스럽 게 모여 있는 모습이 색다르고 흥 미로웠다.

"타국에 출정을 온 것이 처음이 라 긴장했는데 세 사람이 함께라 안심입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세 사람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각각 달랐다. 비타민 A, B, C를 종류별로 챙겨 온 것 같아 만족스

러운 웃음이 절로 퍼져 나왔다.

"저야 신전에서 치열한 경쟁 끝 에 발탁된 지휘관님 전용 귀염둥 이죠. 아픈 곳이 있다면 안심하세 요! 율리안이 있으니까요!"

엣헴 하고 점잔을 뺀 율리안이 상큼하게 윙크하며 검지로 제 볼 을 쿡 찔렀다.

"왜 그렇게 사시는 겁니까?"

"돌아가면 병원은 꼭 한 번 가 보게. 좋은 곳으로 소개해 주겠 네. 내 진심으로 그대를 염려해

하는 권고야."

평소에도 신분 차에 따른 예의 따위 개나 준 카시아는 그를 보며 진심으로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 었고, 세레논은 구역질이 올라오 는 것처럼 얼굴을 구긴 채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옛적에 수치심을 철판과 바꿔 먹은 율리안은 조금도 타격 을 받지 않았다.

"다들 오늘 밤 연회엔 참석할 겁니까? 저는 필수 참석인데요."

나는 애써 주제를 바꿨다. 손에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하던 율리안 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것도 없으니 가려고요. 맛있 는 거 많겠죠?"

"저도 가려고 합니다. 첫 연회이 니 격식을 차리는 의미로 참석해 주는 것이 좋겠죠."

아는 사람 없이 덩그러니 있어 야 할 줄 알았건만, 그나마 다행 이었다.

카시아는 눈을 깜빡이다 시큰둥 하게 땅을 바라보았다.

"전 평민이라 못 갑니다."

"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환영 연회에 지원군 전원을 수 용하는 건 무리였으니 귀족 신분 만 참여가 가능했다. 카시아는 가 지 못하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 어 보였으나, 괜스레 내가 섭섭해 졌다.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됐습니다."

"그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카시아 경만 괜찮다면 제 동행인 으로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제안에 카시아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단칼에 거절당하는 것을 예상했으나, 의 외로 카시아는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독 가시 세운 고슴도치 같던 전보단 훨씬 나아진 모습이 었다.

"동행인으로 간다면 제 행동이 지휘관님에게 누가 될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전 예법 같은 건 하 나도 모르고 연회에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사사로운 걸 걱정하다니, 카시아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날 걱정하는 것 같 아 기분이 부드러워졌다.

쌀쌀한 바람이 동녘에서 불어와 나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허

공에 흐트러트렸다.

"내가 경과 함께 가고 싶은데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 관없습니다. 내게 중요한 건 이름 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카시 아 경입니다. 그러니 싫지 않다면 같이 가겠습니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깜빡.

장막처럼 길게 드리운 검은 속 눈썹이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날

멍하니 응시하던 카시아는, 이내 목덜미까지 새빨개져서 황급히 내 게서 물러났다.

"제, 제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겁 니까! 그런 식으로 유혹한다고 해 서 내가 넙죽 귀족이 좋아졌다고 말할 것 같습니까?"

"내가 뭘

"제법 얼굴을 쓸 줄 아는 모양 이지만 이미 4번의 폭포 수련을 거치고 5개의 정신 컨트롤 기술 을 습득한 제게 그런 건 통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뭔 가 잘 통했다는 건 알겠네.'

나는 사과와 다를 바 없이 붉어 진 얼굴로 한 채 마귀를 쫓는 신 부처럼 역정을 내는 카시아를 보 며 혼자 이해를 마쳤다.

"엘 그놈이 왜 감겼는지 알겠네. 불쌍한 놈......•"

율리안의 뜻 모를 혼잣말을 무 시한 나는 카시아에게 물었다.

"그래서 함께 가 주실 겁니까?"

화를 내다 말고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새하얀 뺨엔 복숭앗빛 물 이 들어있었다.

"......딱히 지휘관님이 가자고 해서 가는 건 아닙니다. 아타라 문화가 궁금하니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그럼요. 물론 그렇겠죠."

카시아를 놀리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이 잠깐 들었으나, 그랬다간 연회고 뭐고 이 자리를 박차고 떠 나 버릴 것 같았기에 기꺼이 수긍

해 주었다.

그녀는 까칠하게 고개를 홱 돌 리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인기척에 휙 고 개를 돌렸다.

"친구가 많은 것 같다만, 그래도 첫 춤은 내게 주겠지?"

다시 한번 불어온 바람에 겨울

에도 파릇파릇한 신비로운 나무의 나뭇잎이 휘날리고, 그 사이로 백 사자의 갈기를 닮은 새하얀 머리 칼과 진녹색 망토가 나부꼈다. 그 한 장면이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나는 잠시 넋을 놓고 바 라보았다.

자연스러운 색채들 가운데 홀로 인위적이었다. 짙은 청록색 나뭇 잎과 비슷한 계열이나, 그와는 완 전히 다른 연둣빛 눈동자는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세레 논이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율리안, 카시아가 따라 예를 갖추 는 가운데 내 반응이 제일 늦었 다.

오만하게도 인사에 답하지 않은 채 성큼 다가온 레오는 내 앞에 우뚝 섰다.

"그럴 거지? 넌 나랑 제일 친하 잖아."

그는 요사스럽게 눈꼬리를 휘었

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우선 인사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지인들이라 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레오에 게 허울 없이 대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내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그대 를 보는 게 나쁘지만은 않아. 존 대도 꽤 자극적이란 말이지. 이상 취향인가?"

제 턱을 매만지며 나를 내려다 보던 레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 로 속삭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 지만 내 귀엔 명확히 꽂혔다.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파격적인 발언에 조금 움찔했으 나, 평정심을 다잡고 못 들은 척 대응했다. 눈을 피하는 나를 보며 레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운명이 이끌었나. 산책하는데 발걸음이 이곳으로 향하더군."

이곳은 지원군들이 머무는 궁 앞 야외이니 산책하다 다다랐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그 대상이 호위 한 명 없 이 온 국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 다.

영문을 모르는 세 사람의 시선 이 등 뒤로 따갑게 쏟아지는 가운 데,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온 레오 가 훅 상체를 숙였다.

"그래서 첫 춤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담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췄던 나는, 이내 몸에 긴장을 풀며 피식 웃었다.

"너 말고 누구한테 주겠냐. 너밖 에 없지."

찰나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염 려가 들었지만, 이제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어차피 내가 앞으로도 보고 대 화를 나눌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아니라 너이니 너만 괜찮

다면 염문 따위 상관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이 타국 땅에서 내게 가장 중요 한 사람은 레오였다.

"그럼 기쁘게 받아 가지. 네 '새' 친구들과 대화가 끝났다면 이만 돌아갈까? 드레스 코드라도 가볍게 맞추고 싶어서."

만족스럽게 웃은 레오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새로운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는 그는 꼭 그가 세 사람보다 더 오랜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먼저 가도 되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뒤에 세 사람을 돌아보려던 찰 나, 레오가 다른 손으로 내 뺨을 살며시 붙잡았다. 약지와 새끼손 가락이 드러나는 검은 반장갑을 낀 그의 손에선 미끈한 천의 감촉 이 느껴졌다.

"나를 봐. 나를 보고 결정해."

시선을 돌리는 걸 용납지 않겠 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 묘한 소 유욕으로 불타오르는 두 눈을 물 끄러미 응시하던 나는 낮게 웃음 을 흘렸다.

'아직도 어린애 같다니까.'

레오는 성숙과 미성숙 중간에 서 있었다. 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기로 했다.

"그러죠.

나와 레오의 손이 단단히 맞물 렸다. 그는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아프지 않는 정도의 선에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레오는 보이지 않는 꼬리를 빙빙 돌리며 나를 이 끌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연회 때 뵙죠."

나는 살짝 몸을 돌려 목례했다. 그 후 곧바로 나를 이끄는 레오로 인해 대답은 듣지 못했으나, 붙잡 는 사람은 없었다.

"어떡하냐...... 엘보다 더 화려 하게 생긴 것 같은데. 스읍...... 그래도 엘한텐 처연미가 있어. 가 증스러움으론 절대 안 꿀린다고."

"형님께 외모 관리 좀 열심히 하시라고 전보를 쳐야겠군...... 그 래도 같은 나라 국민이니 가산점 이 좀 들어가지 않을까? 아니야, 오히려 먼 나라 사람이니 더 매력 적일지도......

"둘 다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 는 겁니까? 저런 뺀질거리는 사 람한테 지휘관님을 넘긴다는 가정 자체가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딱 봐도 여기저기 꼬리 치고 다닐

상이라고요."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 세 사람이 중얼거린 말은 카슈미 르 크리시스가 평생 모를 내용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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