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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30화 (230/254)

230화

"슈슈 넌 제복을 입겠지."

"그래. 드레스 코드는?"

들뜬 걸음으로-제 딴엔 진정하 려 한 것 같지만, 내 눈엔 붕붕거 리는 꼬리가 보였다- 날 이끌며 자신의 궁에 도착한 레오가 내 방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여전 히 자기 방 대하듯 뻔뻔한 태도였 다.

"연녹색."

방문을 닫은 레오가 연녹색 눈 동자를 빛내며 씨익 웃었다.

"너무 신난 거 아니냐?"

"드디어 댄스 파트너를 들였다 고. 처음인 걸 감안해서 선처해 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레오를 놀리듯 건드리자, 레오가 태연하게 답했다. 나는 눈을 깜빡

였다.

"......처음으로? 너 여태껏 춤 안 춰 봤어?"

연회에서 파트너와 함께 사교댄 스를 추는 것은 온 대륙의 전통이 다.

레오는 다른 사람도 아닌 국왕, 게다가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도 아니고 한참 혼기 때의 청년이다. 큰 연회 때마다 대표로 춤을 춰야 한다는 건 명백하다.

"내가 춤을 왜 춰. 네가 없는 데."

과장이었으리라 혼자 납득하려 는데, 레오는 뭐가 문젠지 모르는 무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 다.

'얘 진짜 제멋대로 살았구나.'

레오의 불도저 같은 마이웨이 라이프는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경탄을 금치 못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살면서 왕의 궁을 침소로 얻게 된 것으로 모자라 첫 춤까지 가져 가는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루 만에 왕을 사로 잡은 희대의 팜므파탈 같은 잡소 리들을 하겠지만...... 제국까지만 안 퍼지면 좋겠다......

이 소문이 제국까지 퍼졌다간 쏟아지는 연락으로 통신 마도구가 폭발할지도 몰랐다. 나는 업무 관 련 연락을 받는 통신 마도구만 빼 놓고 다른 것들은 잠시 꺼 두기로 결심했다.

"다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모든 것을 해탈한 채로, 허 락을 기다리는 레오에게 훠이훠이 손짓했다.

그래, 네가 즐거워하니 됐다.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레오는 뛰듯 걸어가 내 옷장 문을 벌컥 열었다. 아예 옷까지 골라 줄 작 정인 것 같았다.

대충 입었다고 욕을 먹지는 않 을 만큼 준비했지만 딱 그 수준일

텐데, 그는 검을 만들 강철을 고 르는 대장장이처럼 신중하게 제복 들을 살펴보았다.

"국왕에게 옷시중도 받아 보고, 내 인생 성공했네. 영광이다."

"알면 어슬렁거리지 말고 저기 앉아서 쉬기나 해."

"네, 네."

껄렁하게 대답한 나는 소파에 누워 다리를 팔걸이에 걸쳤다.

레오는 제복에서 눈을 떼지 않 은 채로 시종을 불러 차라도 마시

라고 권했으나, 그가 옷시중 드는 모습을 생중계시키고 싶지 않았던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리 와."

내가 벽지에서 고양이 귀 모양 을 찾고 있었을까, 레오가 나를 불렀다. 나는 자리에서 휙 일어나 단숨에 그의 앞에 섰다.

"그나마 이게 오늘 내가 입을 옷이랑 비슷하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은빛이 은

은하게 일렁이는 제복이었다.

"이번 연회엔 이거 입어 줄 거 지?"

"뭐, 상관은 없는데...... 드레스 코드는 연녹색이라며."

나는 제복을 빙빙 돌려 보며 관 찰했으나 연녹색은 눈곱만큼도 보 이지 않았다.

나뭇잎이라도 주워다 머리에 달 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자 신의 제복 라펠에서 입을 벌린 사 자 모양의 금빛 브로치를 툭 떼어

낸 레오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 렸다.

"내 오러가 무슨 색인지 알지?"

"그야 당연히......

화악.

강대한 마나가 코앞에서 밀집되 었고, 내 신경은 본능적으로 그곳 에 쏠렸다.

" 연녹색"

파지 직.

브로치를 쥔 레오의 손 틈새로 연녹색 오러가 전류처럼 터져 나 왔다.

나는 레오가 뭘 한 건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러는 무형의 기운이지만 존재 감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사물 을 파괴할 의도가 없이 일정량 이 상 퍼부었을 땐 그 사물에 오러의 색이 덧입혀지기도 했다.

내가 미르로 활동하며 줄곧 사

용해 온 단도의 검날이 지금에 이 르러선 완전히 새까매진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짠. 이러면 드레스 코드 티는 나겠지."

레오가 마법이라도 보여 주듯 손을 펼치며 내게 브로치를 내밀 었다. 금빛 브로치는 어느새 선명 한 연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른 제복 라펠에 브로치를 달더니 제복을 내 몸에 대보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

다.

"너한테서 내 기운이 풍기겠네."

오러의 색이 물들 정도로 퍼부 었으니 오러 주인의 기운이 영역 표시처럼 주변에 퍼지는 것도 당 연한 일이다. 나는 레오 특유의 기운을 느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기운이 불쾌했다면 곧바로 내 기운으로 밀어냈겠지만, 브로 치 하나로 드레스 코드를 맞추고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 내 버려 두기로 했다.

"그래. 이거면 돼?"

"아니. 어디서 중간에서 내빼려 고. 내 첫 춤까지 가져가 주셔야 지."

나는 잠시 눈을 굴리며 상념에

빠졌다.

귀족들에게 있어 첫 춤이란 큰 의미다. 제국에서 데뷔탕트 파트 너와 염문이 생기듯, 아타라 또한 다르지 않을 터였다.

'좀...... 첫 키스를 가져가는 느

낌 아닐까? 내 첫 춤을 가져간 엘한테 첫 키스를 줬다고 생각하 는 건 아니지만...... 아니, 엘은 진짜로 가져갔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민망한 기 억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그 순간 내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길 바라며 생각을 빠르게 지워 냈다.

"네 생애 첫 춤 상대는 나로 괜 찮은 거야?"

나는 턱을 매만지며 레오를 올 려다보았다. 보석 같은 연녹색 눈

으로 날 응시하던 레오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 말고 누구한테 주는데? 너 밖에 없어."

그는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 려주며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네게 생애 첫 춤을 줄 수 없어도 괜찮아?"

저울의 균형이 맞지 않는 거래 다. 내가 레오였다면 불공평하다

고 느꼈을 것 같았다.

내 질문을 들은 레오는 시원하 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관없어. 나랑 추는 건 처음이 잖아?"

맹목적인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 다.

문득,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나를 좇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저 맹목에 보답할 수 있

나.'

그 생각으로 마음이 소란해질 때, 잡음들을 차단하듯 레오가 말 을 이었다.

"네 최초와 최고와 유일을 원해. 하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어. 나는 네가 주는 것이라면 쓰다 버린 구 두도 기꺼이 받을 테니비수를 입에 넣어 줘도 달게 삼키겠지."

내 손을 이끈 레오가 내 손바닥 위에 입술을 내렸다. 굳은살과 흉 터로 가득한 내 손은 부드러운 입

술에 닿았을 때 거칠었을 텐데도 그는 고개를 물리지 않았다.

집요하게 이어지는 시선 속에서 나는 익숙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네게 갈급해."

갈망.

몇 번이고 봐 왔던 감정이다. 늘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하지만 내가 봐 온 많은 갈망 중에서도 레오의 갈망은 독특했다.

"기억해? 난 어려서부터 잡식성 이었어. 입에 들어오면 죽었든 썩 었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삼키고 보았지. 왕이 됐는데도 여전히 그 래. 너에 관한 것이면 뭐든 삼키 고 싶어."

새액, 부드러운 무언가를 까칠한 사포로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 목에 축축하고 물컹한 감촉이 느 껴졌다.

등의 솜털이 쭈뼛하게 섰다.

그 짐승 같은 행위는 내리깐 채

형형하게 번들거리는 두 눈과 겹 쳐져 꼭 사냥감의 맛을 보는 맹수 같았다.

"그러니 두 번째 춤이든, 열 번 째 사랑 고백이든, 서른 번째 키 스든 내게 줘."

그가 틀었던 고개를 천천히 돌 리며 나와 마주했다.

아, 그래. 그의 갈망은 본질부터 달랐다.

"소화는 내가 해."

그는 내가 주는 것이 독이 될지 라도 기꺼이 삼킬 용의가 있어 보 였다. 좋은 살코기는 모두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고 말라비틀어진 뼛조각 하나만을 던져 준대도 탐 욕스럽게 집어삼키리라.

그의 탐욕은 무엇도 가리지 않 았다.

그 뒤로 금세 분위기를 가벼이 한 레오가 낄낄거리며 나갔지만

나는 시녀들이 연회 준비를 도울 때까지 계속 멍했던 것 같다.

나는 희미한 향유 향이 풍기는- 후각이 예민해 내 몸에서 인위적 인 향기가 너무 짙게 나면 불편했 기에 내 목욕물엔 늘 미세한 양의 향유만 들어갔다- 수면을 손끝으 로 휘젓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젖 혔다.

나는 레오에게 있어 처음으로 사귄 친구이자 그가 채 탈피하지 못한 미성숙의 도피처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어리광 같은 소유욕과

집착을 받아 주었다.

'뭐든 달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가 늠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레이샤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그와 비슷하게 레오 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지금은 그를 알 수 없었다.

그의 검은 동공은 블랙홀 같았 고, 동공의 경계를 긋는 원은 우 로보로스의 원 같았다. 깊고 아득 한 탐욕이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회까지 30분 남았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 었다. 나는 깊은 생각 끝에 정신 을 차리고 욕조 안에서 나왔다.

전쟁을 위해 움직이면서 내 편 리를 위해 공작가의 시종들까지 이끌고 오는 건 영 끌리지 않아 모두 두고 왔다. 때문에 이곳에서 내 시중을 들어 주는 이들은 모두

아타라 왕궁의 시녀들.

익숙한 이들이 아닌 데다, 아타 라에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을 들 은 뒤라 가까이 두기가 찝찝해 목 욕물만 준비해 달라고 하고 모두 물린 참이었다.

물기를 대충 닦고 제복을 꿰어 입었다. 늘 최소한의 단장만 추구 했기에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머 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곤 거울 속 의 나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럭저럭 봐 줄 만한 꼴이었다. 시녀들의 손길이 있었다면 더욱 맵시가 살았겠지만, 욕 얻어먹지 않을 정도로만 챙겨 입으면 된다 는 주의였으니 미련은 없었다.

똑똑.

"나야. 들어가도 돼?"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내 마음 을 어지럽게 만든 주인공의 기척 이 문 밖에서 느껴졌다.

"들어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수락했다.

레오와 내가 정식 파트너였다면 그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이 당연 했으나, 우리의 약속은 어디까지 나 사적인 댄스 파트너였다. 안 그래도 가장 바쁠 레오가 연회 직 전에 나를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너라면 옷시중을 안 받았을 것 같아서. 맞지?"

레오는 성큼 내 방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갑작스럽지만 정곡이었 다. 공작가에서도 시중을 받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뜨 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데. 문제 있나?"

"아탁라의 정식 연회에선 제복 을 입는 방법이 까다롭거든. 내가 한때 배우다 때려치울까 싶었을 정도로. 시중을 받았다면 시녀들 이 알아서들 맞춰서 입혀 줬겠지 만...... 넌 내 손길이 필요하잖아. 맞지?"

짓궂게 미소 지은 레오가 내 앞 에 섰다. 나는 새삼스레 그의 모 습에 감탄했다.

백색 곱슬머리는 완벽하게 정돈 되어 있었고, 요정들의 실크로 만 든 듯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여 러 색깔로 일렁이는 은색 제복은 그의 몸에 딱 맞춰 각 잡혀 있었 다. 신이 빚은 얼굴은 별가루를 잔뜩 쏟아부은 듯 반짝거렸다.

나는 그의 재킷 라펠에 꽂힌 연 녹색 브로치를 유심히 바라보았

다.

은색 제복만으로는 우연히 겹쳤 나 싶을 텐데, 똑같이 연녹색 브 로치를 차고 있으니 빼도 박도 못 하고 맞춘 것이었다.

" 생각이 바뀌었는데. 지금이

라도 후줄근한 와이셔츠로 갈아입 고 갈래? 아니면 구질구질한 튜 닉 같은 건 어때. 이건 나랑 둘이 있을 때 입고."

"혹시 오다가 넘어지면서 전두 엽 손상됐어?"

내가 그를 관찰하고 있을 때 그 도 나를 관찰하는 건지 한참 따가 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후 내뱉는 말은 헛소리할 때가 되었겠거니 하고 넘겨 버렸다.

"••••••이三"

"그래서. 아타라 식으로는 어떻 게 입는 건데."

나는 초점을 잃고 멍해 보이는 레오의 이마를 주먹으로 가볍게 갈기고 고개를 쳐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레오는, 이내 저 혼자 고개를 휘젓더니 전보다는 침착하 게 내 와이셔츠로 손을 뻗었다.

"와이셔츠의 첫 번째 버튼은 잠 그되 두 번째 버튼은 열어야 해. 셔츠는 깔끔하되 약간의 구김이 있어야 하고, 소매의 버튼은 모두 열어야 하지."

레오의 큰 손이 나를 부드럽게 훑었다.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악마 소환 식을 치르는지 토 나올 정도로 자

질구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조용 히 설명하며 내 옷매무새 하나하 나를 고쳐 주는 레오는 싫지 않았 기에 군말하지 않았다.

"견장의 술은 겨드랑이 아래까 지 내려오면 안 되고, 바지 주머 니엔 뭔가 있으면 안 돼. 바지는 딱 맞게. 바지 밑단은 아주 조금 접어야 하지."

온몸을 체크해 준 레오는 마침 내 한쪽 무릎을 꿇고 내 발목을 붙잡아 들었다. 누구보다 더 아름 답게 제복을 차려입은 채로 내게

굽히고 바짓단을 정리해 주는 그 는 역설적이었다.

"감히 네 옷차림이 틀렸다고 떠 들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래도 네가 완벽해 보이길 바라.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게."

레오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꼬리 를 끌어 올렸다. 나는 장갑을 낀 손을 나도 모르게 꽉 쥐었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내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연회 직 전이 됐는데도 보이지 않는 국왕 을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였다. 단 번에 인상을 구긴 레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뒤에 봐."

레오는 문으로 나가지 않고 창 틀에 훌쩍 올라탔다. 그의 방은 내 방에서 바로 위층이었으니 바 로 올라가려는 듯했다. 그가 창문 을 열어젖히자 초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넘실 불어 왔다.

"AZ、"

TTTT-

레오가 떠나기 전에 나를 불렀 다.

"기다리고 있어. 내가 네게 춤을 청하러 갈게."

그의 초록색 망토와 내 방의 검 붉은색 커튼이 펄럭이고, 새하얀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모든 것이 신비로워 보이는 저녁 하늘을 배 경으로 그가 화려하게 미소 지었 다.

절대 잊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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