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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31화 (231/254)

231 화

과연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나 라로 꼽히는 아타라답게 연회는 매우 성대했으나, 그걸 즐길 틈은 없었다. 나는 몰려든 귀족들 사이 에서 고군분투했다.

"크리시스 공작가는 제국에서 대대로 군을 맡아 통솔했다죠?"

"그렇게 됐습니다."

"그 나이에 소드 마스터라니, 정 말 대단하세요."

"별말씀을요......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기계적으 로 답했다. 욕을 얻어먹는 것보단 낫다지만 내게 있어서 견디기 힘 든 건 매한가지였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가 뭐가 재밌는지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를 통해 솔라티네 제국 사교계에 연 줄을 대어 보려는 것 같지만, 나 는 사교계와 거리가 멀었으니 특 별히 해 줄 말도 없었다.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도하며 석상처럼 서 있을 때, 귀족 중 하 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국왕 폐하와는 전부터 연이 있으셨던 것인가요?"

분산되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곧바로 내게 집중되었다. 다들 직 접적으로 물어보진 않았으나 궁금 했던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한숨 을 뱉었다.

'언제 질문하나 했다.'

레오가 내게 자신의 궁을 내주 었단 소문은 이미 사방으로 퍼졌 다. 거기다 지금 나와 그의 복장 은 누가 봐도 맞춘 것이니 논란은 더욱 가중되었을 터였다.

"오랜 친우입니다."

"세상에, 언제부터......?"

"어린 폐하께서 제국으로 피신 오셨을 때부터 연이 있었습니다."

비밀로 해야 될 이유는 없으니 솔직히 대답했다. 내 말에 놀라워 하던 귀족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 리다 또다시 나를 들볶아 대기 시

작했다.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마음 같아선 허공을 밟아 도망 쳐 발코니에서 술이나 마시고 싶 었지만, 제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책임감 때문에 꾸역꾸역 버텼다.

'나도 크리시스의 미친 개 같은 별명을 얻어 둘걸 그랬나.'

나는 부러운 마음을 담아 왕좌 에 앉은 레오를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국왕인 레오에게 사람 들이 가장 많이 몰려야 맞건만, 왕좌 5m 전방은 황량했다. 누가 왕좌 앞에서 칼춤이라도 춘 게 아 닌가 싶을 정도였다.

늘어져라 앉아서 샴페인이 든 잔을 혼드는 레오는 여유롭다 못 해 무료해 보였다. 과연 폭군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사람다웠다.

'너한테 가야 할 질문들이 다 나 한테 오고 있는데 하품이 나오 냐?'

내 상황과 너무 대비되어 질투 심이 생길 지경이었으나 심호흡으 로 침착함을 되찾고 시선을 돌렸 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레오가 곧 장 이곳으로 올 것이고, 그럼 상 황이 더욱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이자가 지원군의 지휘관이라 고?"

상념이 오가던 순간, 낮고 거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적

당히 누그러트려 놓은 신경이 곤 두섰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고개 를 돌렸다.

"새파란 애송이군."

그곳엔 산적같이 흉포한 인상의, 곰만 한 중년의 남자가 나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내 주위를 둘러싸 고 있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물러 섰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있

었다.

'강하네.'

그에게선 소드 익스퍼트의 기운 이 느껴졌는데, 나 또한 상대가 쉽지 않을 만큼의 강자였다. 눈가 와 입가, 뺨에 난 험악한 흉터가 장식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는 넌 누구지?"

나는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곤 여 상스레 물었다. 주위의 수군거림 은 더욱더 커져갔다.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남자 에게 내가 어려 보이는 것이야 당 연했으므로 그의 도발적인 말에 큰 감흥은 없었으나, 그가 말을 놓으니 나도 놓을 뿐이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남자가 짙은 갈색 눈동자로 날 매섭게 바라보 았다.

"아타라의 변경백 빌헬름 오스 테온이다."

변경백이라면 국경과 맞닿은 곳

에 봉토를 가진 영주였다. 공식적 으론 백작 위 후작 아래의 작위이 나, 까다로운 지역을 지키고 있는 공을 인정받아 실제로는 후작에 버금가는 실권을 쥐고 있었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빌헬름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원군의 지휘관, 카슈미르 크 리시스다."

빌헬름은 강한 악력으로 내 손 을 붙잡고 혼들었다. 솥뚜껑만 한 그의 손은 가뭄으로 갈라진 대지

를 떠올리게 할 만큼 거칠었기에 그의 험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용건이 있나?"

"지휘관이 왔다기에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다른 귀족들의 곱상한 발음과는 다르게 거친 사투리가 섞인 그의 발음은 쇳소리 같았다.

빌헬름이 날것 그대로의 눈빛으 로 나를 무섭게 노려보는 와중, 나는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카라쇼 스승님.'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따뜻한 햇살과 비슷한 빛깔로 반 짝이는 짙은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은 카라쇼의 머리카 락이 하얗게 세기 전의 색깔과 비 슷했다.

잠시 향수에 빠져 있었을까, 빌 헬름이 혀를 찼다.

"강하다고 하여 다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늘, 제국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경악 섞인 시선들이 빌헬름에게 로 쏟아졌다. 나는 헛웃음을 뱉으 며 근처 탁자에 잔을 두었다.

"방금 그 발언은 아타라와 제국

의 외교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 아나?"

"지휘관이랍시고 이런 애송이를

보낸 가."

것부터가 외교 문제 아닌

"내 유능함은 둘째치고 제국이 지원군을 보낸 것 자체가 호의인 데. 아타라는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나?"

"호의? 이렇게 계산 가득한 호 의가 있던가? 아타라의 방벽이 무너지면 그 다음으로 위험한 것 은 제국일 텐데. 아타라를 방패막 이로 삼아 보겠다는 속셈 아닌 가."

진갈색 눈동자가 맹렬하게 타올 랐다. 그의 크고 거친 손이 꽉 주 먹 쥐어졌다.

"내 평생을 북부와 맞닿은 지역 에서 검은 피를 보며 살아 왔지만 전장에 서면 여전히 두렵다. 전쟁 은 너 같은 애송이가 견뎌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짐승처럼 눈을 번뜩이는 빌헬름 은 분노한 늑대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 면서 한 손을 제복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반들반들한 조약돌 같은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대는 살아 온 세월에 자부심 이 넘치는 것 같군."

"자부심과 의무감만으로 버텨 온 세월이다."

빌헬름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정제된 살기가 새어 나갔다. 약 간의 오한이 들 정도의 기운. 검 은 연기가 옅게 흘러나오며 넘실 거리는 가운데에서, 나는 비죽 입 꼬리를 비틀었다.

"나 또한 평생 검은 피를 보고 살았다."

그의 평생과 내 평생의 연차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건 생

명의 무게는 동일했다.

내 기운에 눈썹을 꿈틀거린 빌 헬름이 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 다. 습관처럼 한 행동인 것 같았 다. 그와 나 사이에 싸늘한 대치 가 이어지고 있었을까.

"빌헬름 오스테온 변경백. 이 이 상의 무례는 용서치 않겠습니다."

내 앞을 막고 선 사람은 부관 조나단이었다.

"에이머리 경?"

나는 조금 놀란 채 곧바로 기운 을 거둬들였다. 조나단은 내 부관 이니 당연히 연회에 참가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일에 끼어들 줄은 몰랐다.

그가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건 나였다.

"넌 또 뭐냐. 나와라."

"지휘관님의 부관으로서 좌시하 긴 어렵습니다."

조나단은 눈을 부라리는 빌헬름

앞에서도 무심했다. 그의 숨 막히 는 잔잔함은 내가 상대할 땐 막막 했으나, 내 편이 되니 이렇게 든 든할 수가 없었다.

"물러서라는 건 검에서 손까지 떼라는 뜻입니다. 지휘관님을 향 한 무례는 저희 지원군 전체를 향 한 무례라는 걸 자각하셔야 할 겁 니다."

빌헬름을 탐색해 볼 생각으로 적당히 유한 태도를 취했던 나와 다르게, 조나단은 지금 당장 헬리 오스라도 호출할 듯 단호했다. 그

기세에 나조차도 눈을 끔뻑였을 까, 혀를 찬 빌헬름이 검 손잡이 를 쥐고 있던 손을 들어올렸다. 공격할 뜻이 없다는 의사였다.

"......어차피 진짜 합을 나눌 생 각은 없었다."

내게 검을 휘둘렀다간 빌헬름이 아무리 입지가 넓은 귀족이라도 무사하긴 힘들 것이다. 휙 몸을 돌린 그는 살짝 나를 돌아보았다.

"그대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 야. 그대가 지휘관에 알맞은 사람

이라는 걸 증명해야 할 걸세."

빌헬름의 태도에선 냉기가 감돌 았다. 나는 여전히 손끝에 닿아 있는 매끄러운 것을 꽉 쥐며 방긋 웃어 주었다.

"그대 또한 증명해 줄 거라 기 대하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 이 있는지 말이야."

'네가 워낙 사람에게 약하니 말 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 닌지 탐지해 주는 마도구다.'

이곳에 오기 전 칼과 아리아가 내게 선물한, 일명 '사람 탐지기'. 시제품이라 한 번만 사용할 수 있 다고 해서 고민하다 연회에 올 때 켜고 온 참이었다.

지이잉一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사람 앞에 서만 울린다는 탐지기가 명확히 울리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미덥지 못한 꼴 을 보였군. 도와줘서 고맙다."

탐지기가 진동이 멈춘 뒤에도 잠시 쥐고 있다, 조나단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도움 없이 헤쳐 나오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 으나 예기치 못한 호의에 고마움 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 다."

속눈썹을 팔랑인 그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구덩이 같은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속내를 비추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의 얼굴입니다. 어 디서도 무너지지 말아 주십시오."

깔끔하고 담백한 목소리엔 일말 의 사감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상냥하게 느껴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나는 그대들의 지휘관이 니."

그 무게를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빌헬름과의 사건 이후로 내게 다가오던 귀족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잠시 풀었던 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날 꺼리는 것 같았다.

나는 예의상 몇 분 더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가 그림자처럼 살 금살금 연회장을 나왔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후, 길게 숨을 내뱉곤 목을 죄던 타이를 풀어 헤쳤다. 몇 번이고

겪었지만 연회는 익숙해지질 않았 다.

처음으로 보는 궁이기에 지리를 몰라 잠시 방황했으나, 이내 발코 니를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만석이네.'

사람이 있다는 뜻으로 커튼을 치고 그 위에 붉은 리본을 묶어 둔 발코니가 과반수였다. 레오를 기다리며 바깥바람이나 쐬고 있었 을까 싶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뒤돌아서 돌아가려는 그때.

'잠깐.'

문득 공기 중에 실려 온 익숙한 기운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의혹은 초조함이 되고, 초조함은 확신이 되며, 확신은 경악이 되었 다. 나는 다시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아니, 왜? 어째서?'

절대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인 물이었다.

이 정도 뛰는 것쯤 전혀 힘들지 않은데도 손에 배기 시작한 땀은 긴장을 뜻하는지, 경악을 뜻하는 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다.

촤아악!

나는 맨 끝 발코니의 커튼을 망 설임 없이 열어젖혔다.

"너...... 이 미친 새끼."

그리고 두 눈에 담긴 광경에 욕 을 짓씹어 뱉었다.

" 아."

아직 겨울이라기엔 따뜻한 계절 이건만, 그는 시간을 빠르게 감았 다.

꼭 모든 것을 겨울로 불러들였 다.

성큼성큼 다가가,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난간에 아 슬아슬하게 걸터앉아 있던 인영의 상반신과 검은 망토가 허공으로 쏟아졌다.

대체 무슨 용기인지 그때까지도 난간을 잡지 않던 그가 천천히 자 신의 목을 쥔 내 손목을 붙잡았 다.

"안녕, 슈슈."

고막을 긁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도 감미롭고, 또 익숙했다. 나는 이를 드러내며 멱살을 더욱 꽉 붙 잡았다. 붉은 입술이 기울고, 그 의 잇새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기 없이 투명한 보랏빛 수면 에 내가 담겼다.

"여전히 환영 인사가 격하군."

달빛 아래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스라이 빛나고 있는 그는 지 그문트 하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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