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환영 인사가 아니라 작별 인사 일 텐데."
고저 없는 목소리로 뇌까린 나 는 그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 다. 무시할 수 있는 악력이 아닐 텐데도 지그문트는 고요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신음 한번 내지 않는 그도, 이 상황도, 모든 것이 지독했다.
"이런 허울뿐인 짓은 그만하지. 어차피 못 죽인다는 거 안다."
짧게 기침을 뱉은 지그문트가 제 목을 쥔 내 손목을 툭툭 두드 렸다. 나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고 시건방지게 입꼬리를 비틀 었다.
"왜. 아직 카라쇼 곁에 가고 싶 진 않나 보지?"
지그문트가 쓰레기처럼 군다면 나도 똑같이 굴어 줄 수 있었다.
그가 하는데 내가 못 할 리 없었 다.
내가 내뱉고도 스스로 상처 받 아 심장이 욱신거렸으나, 다행히 웃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그문 트의 눈빛이 탁해졌다.
"스승님 외로워하실까 봐 다른 제자를 곁에 보내 드리다니 대단 한 효심이군그래."
"별말씀을. 카라쇼 죽는 순간도 곁에서 못 지킨 네 효심만 할까."
"스승님을 직접 죽인 네게 비할 바는 아니지."
서늘하게 날을 간 말들을 주고 받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허공에 수놓인 지그문트의 망토를 자꾸만 흔들었 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 은 마음을, 그 산만함에 시선이 팔렸다 변명하며 망토에 시선을 고정했을까.
"그래. 스승님께 보내 주지 그러 나."
지그문트가 내 턱을 붙잡고, 살
짝 틀어졌던 내 시선을 그 자신에 게 고정시켰다. 보랏빛 눈동자가 요요하게 번뜩였다.
"죽여 보란 소리다."
그의 목을 쥔 내 손. 그의 뒤는 낭떠러지. 지그문트를 죽이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 소원이라면 죽여 주지."
쿵.
노기 섞인 웃음을 뱉은 나는 지
그문트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큰 소리와 함께 그가 나동그라 지고,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흩뿌려졌다. 지그 문트는 그때까지도 저항하지 않았 다.
나는 그의 위에 올라탄 채 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첫 재회가 생각나는군. 그땐, 콜록. 검을 겨눴던가."
여유롭게 고개를 젖힌 지그문트
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굴렸다. 잔기침을 뱉으면서도 태평한 태도 였다.
"유감스럽지만 그때도 지금도 두렵진 않다."
휘황한 달빛만이 밝히는 발코니 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 고 낭만적이었다. 나는 입 안 살 을 짓씹었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닥쳐."
덜덜 떨리는 손에 더욱 힘을 주 었다. 손 아래로 팔딱거리는 핏줄 이 느껴졌다.
인간은 허무할 만큼 약해서, 여 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대륙에 손꼽히는 강자인 그일지라도 맥없 이 죽어 버릴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은 내 온몸을 던져야 할 만큼 어려웠건만 죽이 는 일은 이리도 쉬웠다. 모순적이 고 불공평했다.
"너는, 나를, 죽이지 못해. 왜냐
하면......
질리도록 들어온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지그문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서히 죽어 가는 얼굴 이 내 검에 찔려 죽어 가던 스승 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차가운 밤바람조차 식힐 수 없 을 만큼 많은 양의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속이 역류했다.
"내가 널 죽이지 못하니까."
희게 질린 채 초승달처럼 얇아
진 입술은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 듯 나직한 음성을 내뱉었다.
스르륵.
콜록, 내 손에 힘이 빠짐과 동시 에 지그문트가 발작적으로 기침을 내뱉었다. 바늘로 푹 찔러도 피 한 방을 나오지 않을 줄 알았건 만, 그도 사람인지 고통스러워 보 였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지그문트가 내게 죽일 각오로 달려들지 않는 이유는 나를 조롱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언젠 가 날 조롱하는 것도 질리면 생기 없는 얼굴로 내 목에 칼을 박아 넣으려 들 거라고 생각했건만.
달빛에 비쳐서일까, 나를 죽일 수 없다고 고백할 때의 두 눈은 꼭 진실을 말할 때처럼 반짝였다.
"너와 나는 서로를 파괴하기 위 해서 존재하지만, 이상하지."
거친 손끝이 내 뺨을 쓸어내렸
다. 나는 그의 손길도, 시선도 피 할 수가 없었다.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 채로 범람하는 그의 감정을 받아 냈다.
"그렇기에 서로로 완성돼."
지그문트가 내뱉는 말은 분할 만큼 정곡이었다.
"......왜 이곳까지 기어 들어온 거지?"
나는 떨리는 호흡을 계속하며 겨우 감정을 억누르곤 그를 차가
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여전 히 내 밑에 깔린 채, 지그문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네가 예상한 대로일 거 다."
"아가리 나불대지 말고 바른대 로 불어."
지그문트의 멱살을 치켜올렸다. 그의 머리가 힘없이 기울어지며 손자국이 남은 새하얀 목덜미가 얼핏 드러났다.
그는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알잖아. 이곳에 내 사람이 있다는 거."
스파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스파이와 내통하기 위해 아타라에 침입하는 위험천만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내가 그걸 답해 줄 거라고 생 각하고 묻는 건가."
" 아니."
퍽
나는 지그문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전엔 그 반반한 얼굴이 아까워 얼굴은 피해 공격하곤 했 으나, 이젠 곤죽이 되든 찌그러진 깡통이 되든 상관없었다.
그가 낮게 신음을 뱉는 가운데, 나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심문을 핑계로 한 대 치고 싶 었을 뿐이다."
이건 차마 죽일 수 없는, 불멸하 는 정적에 대한 화풀이였다.
지그문트가 한숨처럼 웃음을 뱉 었다. 그의 잔잔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주먹다짐이 아니라 밀회라 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툭.
그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멱 살을 잡은 내 손 위에 뻔뻔하게 턱을 얹었다.
"얼굴을 치다니 의외군. 내 얼굴 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쾅
내팽개쳐진 지그문트의 몸이 티 테이블과 부딪쳤다.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사람들 이 몰려올 거란 염려는 들지 않았 다. 보통 발코니에서의 만남은 연 인들의 시간을 뜻하니 함부로 들 어오지 않을 터였다.
"사람은 피를 흘리면 배로 아름
다워진다고 하지. 내 친히 더 아 름답게 만들어 준 거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로 그의 머 리카락 새에 손가락을 비집어 넣 고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 리고 엉망이 된 지그문트를 응시 했다.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하면 좋으 련만, 다친 얼굴을 봐도 기쁘지 않았다. 생각처럼 화가 풀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속을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폭력은 그 어느 때에도 해결책 이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이 정도로 만족하 나? 기분이 좋아졌어?"
눈을 느리게 깜빡인 지그문트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조금 전 주먹질로 인해 그의 얼굴엔 코 피가 번져 있었다.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무단히 애썼 다.
지그문트는 내 기분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을 텐
데도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낯이었 다.
"넌 단 한 번도 날 기분 좋게 한 적 없어."
나는 결국 힘없이 그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분한 마음에 발 악하듯 달려들길 이전부터 여러 번이었으나 끝은 동일하게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단 한 번도 없다니."
"네 존재가 내게 즐거움을 준
적이 있을 것 같나."
지그문트는 얼굴에 철판을 용접 한 것이 분명했다.
"됐다. 네놈이랑 무슨 얘길 하겠 냐."
대치하는 것도 질린 내가 그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난 아직 안 끝났다만."
훅.
지그문트가 여태까지 저항하지 않은 건 장난이었음을 증명하듯 강한 힘으로 날 끌어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고 그의 위에 엎어질 뻔 한 나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겨 우 몸을 지탱하고 섰다.
"무슨•..."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괴롭기 만 한가?"
"뭐?"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숨 결이 세밀하게 맞닿는 거리에서
지그문트의 두 눈만이 내 시야를 가득 사로잡았다. 내가 조금 움찔 했을까, 그 찰나에 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내가 싫어?"
그는 이전부터 끈질기게 그를 친구로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러 나 이제 친구라는 관계는 이미 먼 강을 건넜음을 아는지, 돌아온 질 문은 하향되어 있었다.
나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다 다 물기를 반복했다.
'싫다고 해야 하는데.'
누군가 끈적한 늪지대 풀을 내 입술에 발라 두기라도 한 양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전부터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싫진 않은 모양이야."
재수 없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지그문트가 내 턱을 잡아당겼다.
그와 이마가 닿고, 또 콧잔등이 닿았다. 능히 피할 수 있을 만큼 차분한 속도였으나 불쾌함보단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물끄러미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그문트가 나와 입술을 겹쳤다.
두뇌 회전이 멈췄다. 현실감이 아득히 사라지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칠진 않으나 건조한 그의 입 술은 놀랍게도 온기를 품고 있었 다. 그라면 입술도 석고상처럼 차 가울 줄 알았는데.
급격히 깎여 나가는 정신을 간 신히 지탱할 때.
"뭐, 윽••••••!"
콰직.
지그문트가 내 아랫입술을 짓씹
었다. 피비린내가 훅 올라오고 온 몸의 털이 쭈뼛 섰다.
우린 키스보단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일이 더 어울리는 관계 였다. 지그문트와 입술을 겹치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 었다.
너무 생경해서인지 누군가 내 척추를 깃털로 훑고 가는 것 같았 다.
맹수의 입질 같은 움직임이 이 어질 때,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
다.
소름 끼치는 빛을 내는 두 눈은 한 번 깜빡이지도 않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연인을 보는 눈빛 같은 게 아니 었다. 어떻게든 나를 뒤혼들고자 하는 열망이 넘실거리는 눈이었 다.
내 흠집을 후벼 파서라도 그 자 신을 박아 넣겠다는 의지.
그건 광기였다.
축축한 살덩이가 살갗 위로 느 껴졌다. 나는 잡히지도 않는 대리 석 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뭉근한 움직임이 이어지다 그가 내 턱을 꾹 눌러 입을 벌려 침입 하려 할 때.
콱. 나는 지그문트의 혀끝이 너 덜너덜하도록 깨무는 것과 동시에 그를 밀쳐 냈다.
"이 미친 새끼가......!"
"어때. 내가 더 싫어졌나?"
경악으로 새파랗게 질려서 더듬 거리는데, 지그문트는 입술 새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우아하게 닦곤 방긋 웃었다. 나와는 정반대 로 대단히 만족스러워 보여 발코 니 아래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내가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져 서, 결국은 날 죽이러 오길 진심 으로 바라고 있다."
속삭임은 독배 안에 섞인 단물
처럼 역하고 달콤했다. 내가 호흡 조차 멈춘 채 얼어붙어 있는 동 안, 그가 천천히 내 뺨을 쓸었다.
그의 손은 파충류의 겉피처럼 서늘해, 꼭 뱀이 내 뺨 위에 올라 탄 것만 같았다.
"다음에 만날 땐 날 더욱 경멸 하고 있기를 기대하마."
화악!
눈을 찌르는 큰 빛이 터져 나왔 다. 순간이동이 발동되었음을 깨
달았으나, 그를 붙잡을 여력도 없 었다. 그의 온몸이 투명해져 갔 다.
"그리고 키스 더럽게 못하는군."
그 목소리를 끝으로, 지그문트의 존재는 이 근방에서 완전히 사라 졌다.
그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던 나는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입 안에 도는 비린내 나는 붉은 피가 그의 피인지 내 피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닦 아 내곤 몸을 숙였다.
"미친 새끼......
머릿속이 새하얘 그 말밖에 뱉 을 수 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