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발코니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 기까지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가는 길에 마 주치는 사람마다 내 표정을 보고 기겁해서 피하던 것만 떠올랐다.
" 미친놈......•"
털썩.
나는 이번으로 백여든 번쯤 입
에 담은 단어를 한 번 더 중얼거 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지그문 트가 순간이동으로 떠나던 순간 내 정신도 함께 이동한 건지, 영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스킨십에 별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다. 내 주위 사람들이 하나 같이 스킨십에 헤퍼 익숙하기도 했고-그 무뚝뚝한 라이너조차 손 등에 입맞춤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천성 자체가 무덤덤하기도 했 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여전히 당황하긴 했겠지만 이렇게 까지 충격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와의 키스는 아 예 영혼이 빨리는 것 같았다. 물 론 '키스'같이 멜랑꼴리한 단어를 붙이기보단 입술 공격이라 명명하 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어찌 되었 건 그가 할 거라곤 꿈에서도 상상 못 했던 짓이긴 했다.
은은한 달빛 아래 피가 번진 얼 굴로 웃던 그는, 마치.......
'정신 차려.'
퍽
오른쪽 뺨을 주먹으로 갈겼다. 몽둥이에 얻어맞은 듯 둔탁한 고 통이 닥치며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장면이 강제로 멈췄다.
'젠장, 이러고 있는 게 너무 자 존심 상해......!'
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른 사람이 이런 짓을 했다면 내게 호감이 있는 건가 잠시라도
고민했겠으나, 지그문트라면 의심 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내게 입 술을 겹치던 순간부터 깜빡임도 없이 부릅뜨고 있던 보랏빛 눈동 자를 기억했다.
그 안에 담긴 건 결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란 단어조차 얄팍 하게 느껴지는 짙은 광기였다. 내 두개골을 쪼개고 뇌수를 헤쳐서라 도 자신을 박아 넣어 주겠다는 집 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 말엔
기억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 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지그문트는 그를 기억해 줄 사 람이 나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당장 죽더라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할 텐데. 그 태도가 날 혼란 스럽게 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게 그 자식이 의도한 거겠지.'
나는 지그문트의 의도대로 착실 하게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분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뭐라도 쥐어 패고 싶었으나 화 풀이를 하겠답시고 벽이라도 쳤다 간 옆방의 모습을 구경하게 될 게 뻔했으므로 무릎만 꽉 쥔 채 속에 서 분을 삭이고 있었을까.
똑똑.
창문에서 인기척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중 창문에서 노크 소리라니. 내 방은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
었기에 괴담의 초입으로 쓰일 만 한 소재였으나, 다행히도 다가온 인기척의 주인은 내가 익히 잘 아 는 사람이었다.
촤악.
나는 창문 앞으로 걸어가 커튼 을 걷었다.
' 열어줘.'
그곳엔 씨익 웃는 레오가 거꾸 로 매달린 채, 입김으로 만든 도 화지에 날카로운 필기체로 글씨를
적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소란하 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 다. 어려선 골치만 아프게 하는 망아지인 줄 알았건만-물론 지금 도 대단히 망아지스럽다- 이젠 그에게 힐링을 받고 있으니 참 기 묘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기꺼이 창문 을 열어 주었다.
탁
레오가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안 정적으로 착지했다. 순백의 머리 카락이 허공에서 가볍게 나부꼈 다.
"자. 나한테 할 말 없으신가요, 아가씨?"
성큼 다가와 상체를 훅 숙인 레 오가 연둣빛 눈동자를 빛냈다.
애처럼 해맑은 얼굴로 거꾸로 매달려 있길래 기분이 좋은 줄 알 았건만, 가까이서 보니 미세하게 약이 오른 기색이었다.
"어...... 너 오늘 정말 끝장나게 멋있다."
"난 늘 멋있었고. 또."
"혹시 어젯밤에 잠결에 세수하 다 세면대 부순 거 봤어? 미안."
"욕실에 지뢰 심고 그 위에서 탭댄스 춰도 네가 다치지만 않는 다면 상관없어. 그거 말고."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건만, 사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힐끗 눈치를 보자, 헛웃음을 뱉은 레오가 제 앞머리를 쓸어 넘 겼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무심한 여 자한테 감겨서는......
그 목소리엔 한탄이 담겨 있었 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 말곤 실수한 게 없을 텐 데......
"제일 중요한 걸 잊으셨을 텐데 요."
레오가 어린애를 설득하듯 과장 스럽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내 두 볼을 꾹 잡고 늘렸다. 허울
없는 그의 스킨십에 헛웃음을 뱉 었을까, 그가 눈꼬리를 희미하게 휘었다.
"나를 잊었어. 나를."
그 한마디에 잊고 있었던 그와 의 대화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 다.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같이 춤춰 준다고 했지.'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모를 개자식의 입질이 너무 강렬해 잊 고 있었다.
파트너 해 준다고 실컷 말해 놓 고 혼자 사라져 버리다니. 내가 생각해도 쓰레기 같아 경악하고 있는데, 불퉁한 표정을 지은 레오 가 내 볼을 아프게 눌렀다.
"기껏 잡은 기횐데 어디로 사라 져선 다른 사람 냄새만 묻히고 오 고."
그가 검지로 천천히 내 아랫입 술을 쓸었다. 지그문트로 인해 상 처가 난 곳이었다. 새하얀 손끝에 묻어난 핏자국을 알 수 없는 표정
으로 내려다보던 레오가 빙글 웃 었다.
"개한테 물리기까지 했네."
상처를 살포시 누르는 손길에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그...... 미안하다. 떠돌이 개랑 좀 놀아 주느라."
"아하. 떠돌이 개랑 노느라 바빴 다?"
"......그렇게 됐다."
스파이와 접선하려고 침입한 북 부의 지도자에게 입술 공격을 받 아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변 명을 꾸며 냈다. 내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이라, 코웃음을 치 며 사납게 응시하는 레오의 시선 을 슬그머니 피했다.
"그 개가 마수 데베라였나? 아 니면 케르베로스? 와. 네가 공격 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개가 세상에 존재할 줄 몰랐네. 목줄로 묶어서 데려오지 그랬어. 집 지키 는 개로 키우게. 아니지, 주인을 무는 개는 필요 없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든 레 오가 내 입술을 벅벅 닦았다. 상 당히 집요한 손길이었다. 그러곤 푹 한숨을 쉬더니 손수건을 제 주 머니에 구겨 넣었다.
"슈슈."
낮게 내 이름을 속삭인 레오가 내 어깨에 툭 얼굴을 기대었다.
"내가 네 열 번째든 백 번째든 괜찮지만 그걸 내게 보여 줄 필요 는 없어."
어깨에 가려지기 전, 얼핏 본 그 의 두 눈은 폭발적인 분노가 넘실 거리고 있었다.
"......섭섭해?"
조금 머뭇거리던 나는 레오의 양 뺨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표정 관리가 안 된 채로 나와 눈이 마 주쳐 잠시 당황하는 듯싶던 그는 이내 강아지처럼 새하얗고 부드러 운 머리칼을 내 이마에 비비적거 렸다.
"응. 섭섭해, 누나."
'아주 잘 이용해 먹는구나.'
호칭을 제 필요에 따라 멋대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기 가 찰 지경이었다. 개도 웃고 갈 수작이라는 걸 알았으나, 그럼에 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춤출까?"
나는 창문 앞으로 레오를 이끌 었다.
연회도 끝났을 늦은 밤. 방치곤 아주 넓은 편이었으나, 사교회장 과 비교하면 비좁았다.
휘황한 샹들리에 대신 고즈넉한 달빛만이 조명이 되고, 레오는 옷 을 갈아입어 가벼운 와이셔츠 차 림이 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단둘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나는 씨익 웃으며 레오에게 손 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알렉산드 로 아타라."
레오와 함께라면 은밀한 달밤의 춤사위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형광 연 둣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 시했다. 몽롱한 기운과 환희가 깃 든 그의 눈빛은 이상한 나라를 마 주한 소년 같았다.
"......욕심이 많은 건 나라고 생 각했는데 이제 보니 너네. 넌 얼 마나 더 나를 잠식해야 만족할
까."
손을 맞잡아 오는 악력은 강했 다. 그가 날 가볍게 끌어당겼다.
"네가 상냥하게 리드해 줘. 난 처음이잖아."
짓궂게 웃은 레오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리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첫 춤을 이렇게 보잘것없이 보 내도 돼? 감미로운 왈츠도 없는 데."
"뭐가 보잘것없어. 네가 있는 데."
그의 목소리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괜찮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댄스홀이니까. 리듬은 네 호흡으 로 충분하겠지. 너만 있다면 어디 에 다다르든 상관없어."
그는 절절하고 로맨틱한 말을 담백하게 내뱉었다. 나는 혀가 아 릴 듯한 달콤함에 장난스레 혀를 내두르며 그의 어깨뼈 부근을 살
며시 붙잡았다.
"내 리드나 잘 따라와. 끝내주는 첫 춤을 경험시켜 줄 테니까."
나와의 춤을 기다려 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간소한 달밤의 춤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뿐이리 라.
나는 머릿속으로 왈츠의 곡조를 재생시키며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오, 제법 잘 따라오네."
"배웠으니까.
처음임을 배려해 아주 느릿하게 시작한 것이 우습게도 레오는 굉 장히 능숙해 보였다. 내가 감탄하 자, 그가 짓궂게 눈을 반짝였다.
"왜. 멋있어서 반하겠어?"
M 으 ,,
흐 *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순히 수 긍했다.
삐끗. 그 순간 레오의 스텝이 꼬 여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잠깐, 야!"
나는 다급하게 그의 허리를 안 아 들었다. 둘이 다리가 엉켜 넘 어지는 험한 꼴은 간신히 피했으 나, 부둥켜안고 있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칭찬하자마자 실수야? 칭찬도 못 하겠네."
나는 장난스레 꾸짖곤 다시 그 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처음이니까 실수할 수 도 있지."
레오는 부끄러운 건지 굳어 있 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천천 히 고개를 들었다.
"뭘 어떻게 하면 더 반할 것 같 은데."
" 응?"
"춤 잘 춘다고 반할 것 같고. 그 리고 또. 네 앞에서 적폐 귀족들 을 대대적으로 숙청이라도 하면 완전히 반할까?"
"뭐? 너...... 틈만 나면 숙청하
면서 폭군처럼 구는 거 아니지?"
나는 진심으로 레오가 걱정되었 다.
그로 인해 죽어 나갈 이들도 걱 정되었지만, 무엇보다는 그가 살 인에 완전히 무뎌질까 봐, 또 그 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고립될까 봐 염려되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떻게 하면 나한테 반할 것 같 아?"
아예 춤까지 멈춘 레오가 내 양 어깨를 잡으며 제 얼굴을 들이밀 었다.
원래도 퇴폐적인 느낌이 강한 인상이건만, 씻은 지 얼마 안 된 건지 투명한 피부는 붉게 달아올 랐고 살결에선 레몬 향이 진동했 다.
나는 조금 움찔하다 최대한 태 연하게 입을 열었다.
"음...... 네가 조금 더 행복해지 면."
"••••••행복?"
레오가 두 눈을 깜빡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레 이샤의 동상을 바라보았다.
"응. 너로서 온전히 서서 더는 악몽을 꾸지 않을 때."
진심을 다해 함박웃음을 짓는 레오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그려 보았다.
사실 잘 상상이 가진 않았다. 씁 쓰름한 입 안의 침을 삼킨 나는,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리곤 부 드럽게 웃었다.
"그땐 정말 반할지도 모르지. 진 심을 다해 웃을 수 있는 사람에겐 그 자체로 매력이 있잖아."
장난스러운 말투로 속삭였다. 잠 시 침묵하던 레오는 눈을 휘었다.
"나는 너로 인해서만 행복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결혼을 해야겠 네."
결혼이라.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
가 떠오른 나는 짧게 웃었다. 그 리고 그의 이마를 검지로 꾹 밀었 다.
"조금 더 커서 오도록 해."
아름다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