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알았으니까 천천히 말해 봐. 무 슨 일인데."
나는 레오의 손을 마주 잡으며 그를 달랬다.
초조해하는 레오는 생소했다. 그 는 조금 뻔뻔하고, 능글거리며, 여유로운 모습이 어울렸다.
"곧 지원군이 어디로 갈지 결정
되면 넌 그곳으로 떠날 거야. 그 렇지."
"그러겠지. 내가 지휘관이니까."
당연한 질문에 갸웃하면서도 순 순히 답해 주었다. 길게 숨을 뱉 은 레오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 다.
"그럼 기회가 사라져. 그 이후는 예측할 수 없잖아. 언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고."
그렇긴 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 동하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
를뿐더러, 레오는 왕성에 남아 있 어야 할 테니 지금처럼 가까이 지 낼 수도 없었다.
은빛 늑대 수인족을 만나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했다.
"하지만...... 어딘지는 알아?"
조금 막막해진 나는 턱을 매만 지며 레오에게 물었다.
정확한 명칭은 '은빛 늑대 수인 족'. 하지만 어디서 보느냐에 따 라 색깔이 달라지는 신비로운 털
때문에 '달빛 늑대 수인족'이나 '잿빛 늑대 수인족'이라고 불리기 도 했다.
백여 년 전 수인 대학살 사건으 로 대륙에 존재하던 대부분의 수 인들이 멸종했다. 간신히 살아남 은 수인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와중, 유일 하게 종족의 형태로 남은 단 하나 의 수인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두머리의 지혜로 간신히 명맥 을 유지한 은빛 늑대들은 대륙 북 서쪽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
만 정보는 거기까지일 뿐, 그들이 정확히 어디서 서식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없었다.
숲은 광활했고, 아주 위험했으 며, 그들의 보안은 철저했으니, 여태까지도 정확한 위치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거기서 국왕인 레오랑 지휘관인 내가 몇 주를 헤매고 있으면 굉장 히 곤란하니까.'
레오와 내가 마음먹고 두 팔 걷 어붙인 뒤 찾기 시작하면 정말 찾
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너무 소모적인 데다, 아타라 의 국왕 자리와 지원군의 지휘관 자리가 몇 주나 공석으로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많이 걸려도 사흘 안엔 끝내야 겠지.'
이 전시 상황에 자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최대 사흘이었다.
"레이샤가 은빛 늑대 수인이라 는 걸 알게 된 뒤로 계속 조사했
어. 내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꼭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싶었으 니까. 사실 이전까지는 별 소득이 없었는데......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잇는 레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생소해, 재촉 한번 없이 지켜보았다.
"오늘 아침에 정보가 들어왔어. 서식지를 찾았대."
그의 연둣빛 눈동자가 결연하게 반짝였다.
"정보는 확실한 거야?"
"오가는 은빛 늑대 수인을 직접 봤다고 하니 확실한 것 같아."
"그럼 가야지."
레이샤 때문에 찾아가려는 레오 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협력을 받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은빛 늑대 수인족이 전쟁을 돕 는다면 승기를 잡기가 훨씬 수월 해질지도 몰라.'
인간과 짐승의 피가 섞여 초월 적인 힘을 가진 수인들. 그리고 그 수인들 중에 가장 강한 일족이 라 불리던 은빛 늑대 수인족.
단일 개체로 봤을 땐 드래곤을 제외하고 종족들 중 최고라고 불 리는 그들의 강함은 탐이 났다. 도움을 받고 싶었다.
"그래, 가야 하는데......
레오가 시선을 떨구었다. 꽉 맞 잡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두렵구나."
내 나직한 중얼거림에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까 지 약해 보이는 모습은 오랜만이 었다.
"만약 레이샤의 가족들을 만나 면 어쩌지."
소중한 이의 유족을 찾는 마음 이라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무 어라 말을 붙이는 것도 조심스러 워 한참 망설이던 나는 레오의 어
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때도 같이 있어 주마."
대신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 도 없겠으나, 적어도 그 순간 함 께해 줄 순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레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 미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래. 가자."
은빛 늑대 수인족. 그들을 만나 러 갈 시간이었다.
"나랑 네가 왕성에 없다는 소문 이 퍼지면 적들이 그 틈을 노리겠 지. 그래서 최측근들에게만 알리 고 은밀하게 다녀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좋아."
"넌 특별히 알려야 하는 사람이
있어?"
"음, 없는 것 같은데."
세레논과 율리안, 카시아가 걸리 긴 했으나, 말이 새어 나갈 틈은 최대한 만들지 않는 게 나았다. 그들에겐 돌아와 심심한 사과를 건네기로 결심하며 대충 싼 짐을 모두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었 다.
빠르게 결정하긴 했지만, 사실 꽤 깊이 고민했다.
레오야 워낙 궁을 비우는 일이
잦아 모두들 익숙하다고 하나, 내 가 국왕 같은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 다.
내 몸이 두 개도 아니니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했다-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니 라 오직 내 자의로 결정해야 했 고, 나는 결국 은빛 늑대 수인족 을 포섭하는 것이 현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파견을 간 상태였다면 모 르겠으나 현재 지원군은 궁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내가 지휘관이긴 하나,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며칠 자리를 비 우는 것은 크게 위험할 정도가 아 니었다.
"부관에게만 말하고 가면 돼."
"그...... 불에 그을린 것 같은 새까만 남자?"
나는 조나단을 향한 레오의 신 랄한 호칭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그래. 그 사람."
"좀 불길해 보이던데."
레오가 꺼림칙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내 대리인이야."
내가 없을 때 날 대신할 존재였 다. 단호한 내 대답에 잠시 날 응 시하던 레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네 말에 거스를 수 있겠 어? 네 뜻대로 해."
나는 주머니에서 통신 마도구를 꺼냈다.
사실 직접 만나서 말해 줄 생각 은 없었다. 말이 길어지면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기도 애매했으니까.
[한 이틀 나갔다 오게 됐다. 상 황은 길게 설명하기 어렵고. 급한 일은 곧바로 내게 보고 하도록. 잘 부탁하지.]
내가 쓰면서도 상당히 뻔뻔하다
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을 애써 접곤 검집을 허리에 매달았다.
"가자."
레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다시 미지를 향해 가는 길.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으나, 함 께할 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게 레오라서 더더욱.
"그래."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 았다.
숲 바로 앞까지는 순간이동 아 티팩트를 사용해 이동했다. 은빛 늑대 수인족의 근거지까지 바로 이동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숲 에는 마법 사용을 제한하는 결계 가 있었다.
마도공학이 극도로 발달한 아타 라인 만큼 마음먹으면 그 결계를
뚫을 수 있겠으나, 결계가 뚫리는 순간 그들은 곧바로 눈치채고 우 릴 경계하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도보로 이동하는 편이 나았다.
탁, 탁, 탁.
나와 레오는 허공을 향해 뻗은 나뭇가지를 밟으며 나뭇가지를 밟 으며 날 듯이 빠르게 이동했다.
위치를 아는 레오가 앞장섰다. 우거진 숲을 달리는 그의 뒷모습
은 무척이나 든든해 보였다.
"여기서 30분만 더 가면 늑대 수인족 근거지가 나올 거야. 이 늦은 밤에 쳐들어가기도 애매하 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자."
레오가 걸음을 멈춘 곳은 야영 터로 적당했다. 들짐승의 혼적이 없는 평지를 고른 것에서 경험이 느껴졌다.
평생 왕궁에서 자란 왕자님이라 이런 것은 잘 모를 줄 알았건만, 형제들한테 도망치며 꽤 험한 삶
을 산 것 같아 안쓰러웠다.
"용병으로 살 때 생각나네. 그땐 야영이 일상이었는데."
능숙하게 텐트를 치며 중얼거렸 다. 용병 일을 하지 않은지 꽤 됐 지만, 텐트를 치는 정도는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레오가 낮게 웃 었다.
"너 용병 일 하러 나가서 오랫 동안 안 돌아올 때마다 오두막에 혼자 남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다 너 먹여 살리려고 일했던 거야."
"내가 아니라 네 동생 때문이었 겠지."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 냐? 다 겸사겸사하는 거지."
우리는 장난스레 말을 주고받으 며 불을 피웠다.
텐트는 두 개로, 그와 나 각자 넓고 쾌적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꽤 숙련된 솜씨로 스프를 끓이던 레오가 내 텐트를 힐끗 바라보았 다.
"밤에 무서워지면 찾아가도 돼?"
"난리 났다. 그 나이에도 혼자 못 자냐?"
"넌 그 나이가 돼도 알아먹질 못해?"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포 근하고 친근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긴장이 풀렸다.
식사를 마쳤을 즈음엔 해가 완 전히 져 있었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 후 각자의 텐트로 들어갔다. 보초는 필요치 않았다. 그도 나도 다가오는 기척 에 곧바로 잠이 깰 만큼 감각이 예민했으니刀 h
'은빛 늑대 수인족은 어떠려나.'
잠자리에 누운 나는 걱정과 기 대를 품은 채 눈을 감았다.
평소 지내던 방에 비하면 남루 하기 짝이 없는 숙소였으나, 인생 의 대부분을 이렇게 지내왔던 만 큼 무척이나 익숙했다.
의식이 점점 멀어지던 그때.
'......편하게 잠자긴 글렀군.'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번 쩍 떴다.
바깥에 피워 둔 모닥불만이 조 명이 되어 주는 어두운 밤. 사방 이 텐트로 꽉 막혀 있어도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을 간지럽히는 경고를, 가까 워지는 짐승의 냄새를.
옆에 두었던 검을 소리 없이 잡 아 들었다. 맞은편 텐트의 인기척 에 집중해 보니 레오 또한 깬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기척이 가까 워지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번뜩.
텐트의 얇은 천 밖으로, 달빛을 받은 보랏빛 눈동자가 형광물질처 럼 반짝였다.
찌지직!
쾅
날카로운 무언가에 텐트가 찢어 지는 동시에, 나는 튀어 올라 검 을 뽑아 들었다. 내가 있었던 곳 을 커다란 발이 내리찍었다. 땅이 움푹 파이는 기세가 살벌했다.
크르릉
짐승의 울부짖음이 낮게 울려 퍼졌다.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털. 늑대와 닮았으나 보 통 늑대보다 1.5배쯤 더 큰 덩치.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신비로 운 보랏빛 눈동자.
은빛 늑대 수인 네 마리가 나와 레오의 텐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야, 일어났냐?"
"애초에 자지도 않았어."
텐트 밖으로 비적비적 나온 레 오가 나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곤
최대한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대화로 하자고 하면 들어 주시 겠습니까?"
크앙!
늑대 하나가 크게 울부짖었다. 역시 전투 없이 끝날 가망성은 없 어 보였다. 예상했던 부분이기에 실망하지는 않았으나, 전투는 언 제고 골치 아팠기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럼 몸의 대화부터 해 보죠."
늑대들의 털이 곤두서는 가운데, 나는 검날에 검은 오러를 덧쓰!우 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슈미르 크 리시스입니다."
크아아앙!
내 인사를 시작으로 늑대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