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 흐아앙......
"눈물도 안 나오면서 쥐어짜 내지 마."
레오가 인상을 왈칵 구긴 채로 일 침을 놓았다. 알몸에 망토만 걸친 괴 상한 차림의 남자는 레오의 검 끝에 위협당하며 길 안내를 하고 있었다.
"페이샤 님이 용서하지......
"애 그놈의 페이샤 대체 그 양반
이 누군데?"
"허억, 그놈이라니, 그놈이라니! 어 떻게 그분께 그런 멸칭을!"
동굴을 반쯤 지난 시점에서 남자가 격분하며 휙 뒤를 돌았다. 망토가 펄 럭이며 잘 짜인 근육이 들어찬 새하 얀 나신을 목격한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제발 그러지 말길 바랬다.
"페이샤 님은 너희 같은 인간들은 범접할 수도 없는 위대한 분이시다! 우리 늑대 수인족의 영웅이자 지도
자! 늑대 수인족의 상징과도 같은 분 이시란 말이대"
소리 높여 말하는 남자는 자신의 신에 대해 말하는 광신도 같았다. 이 후에도 찬양같이 늘어지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던 나는, 문득 스친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설마 백여 년 전 수인 대학살에서 은빛 늑대 수인족을 이곳으로 이끈 사람이 그 페이샤라는 사람입니까?"
"뭐! 페이샤 님을 알아?"
급속도로 들뜬 남자가 내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부담스럽게 반짝 이는 보랏빛 눈에 움찔했을까, 남자 가 물고기를 낚은 어부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분이다! 위기에 빠진 우리 를 구원하신 분! 수인 대학살 당시 혼비백산으로 흩어지려던 은빛 늑대 수인족을 단결시켜 주셨지! 그래서 나는 그분을......!"
만난 지 한 시간도 채 안 됐는데 남자의 헛소리를 백색소음으로 삼는 것에 익숙해졌다. 나는 신나서 주절 거리는 남자를 뒤로한 채 생각에 빠
졌다.
'그 지도자가 아직도 살아 있구나.'
수인족이 인간보다 오래 산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놀랍진 않았 다.
특히나 은빛 늑대 수인족은 기록된 최대 수명이 500년인, 장수하는 종족 이었다. 그 우두머리가 대학살 당시 노인만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 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분은 아직도 당신들의 우두머리
입니까?"
"......그래서 페이샤 님이......! 응? 아, 물론이지! 그분만큼 적합한 지도 자는 없으니까•"
"그럼 그분한테 안내해 줘야겠습니 다."
어느새 통로 같은 동굴을 벗어나 푸른 초원 위였다. 드넓은 들판과 거 친 정글, 울창한 숲. 그 모든 것이 섞인 지형은 신비로웠다.
짐승의 토굴인 듯, 사람 사는 오두 막인 듯 애매한 형태로 지어진 집들 은 꽤 포근해보 였다.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예쁜 정경이었다.
"그분이랑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 다. 부탁드립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을 굳이 해치고 싶지 않았다. 대화로 끝내고 싶었다.
협박할 거 다 해 놓고 우스우리라 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흐, 흥. 내가 그런 걸 알려줄 줄 알고."
남자가 자꾸 힐끗힐끗 나와 레오의 눈치를 봤다.
남자는 초원에 들어선 뒤로부터 뭐 마려운 개처럼 달싹거리고 있었다. 새하얗고 잘난 얼굴은 참 표정 관리 를 못했다.
"그리고 이건 몰랐겠지!"
덜컥.
앞으로 내디딘 발에 무언가가 걸려 들었다.
촤아악!
바로 옆에 서 있던, 끝이 보이지 않 을 만큼 거대한 나무 위에서 쇠사슬 로 된 그물이 쏟아져 내렸다.
"하하하! 바보 같은 인간들! 일부러 이쪽으로 끌고 온 건데! 여기 함정이 있다는 건......!"
쌔액!
나는 빠르게 오러를 발현해 위에서 아래로 검을 그었다.
촤악.
떨어지던 그물이 검은 오러에 깔끔 하게 두 동강 난 채로 각각 레오와 내 옆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잠시 침 묵이 일었다.
"......당해 드릴 걸 그랬나요?"
솔직히, 마을을 향해 곧게 난 길이 아닌 구석 쪽으로 인도할 때부터 수 상한 티가 팍팍 났다.
함정이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기에
곧바로 대처했으나, 세상이 무너진 듯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 를 보니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시늉이라도 해 줄 걸 그랬나 싶었다.
"어, 어떻게......!"
"쟤 혹시 네가 소드 마스터라는 걸 모르는 거 아니야?"
"소, 소드 마스터?"
소드 마스터와 소드 익스퍼트를 잡 기엔 너무 조잡한 함정인데도 우리가 걸리지 않은 것에 놀라는 남자를 어 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레으가' 날 돌아보았다.
'미르'의 이름은 대륙 전역 구석구 석에 퍼져 있다. 이건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객관적인 정보였다.
검은 오러만 봐도 웬만한 사람이라 면 알아차리니 남자의 태도에 반신반 의하면서도 설마 모를까 싶었지만, 남자는 정말 몰랐던 건지 눈을 동그 랗게 떴다.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설마 우리 은빛 늑대 수인족을 몰살하려 고
"지금까지 제 말을 뭘로 들은 겁니
까?"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얼굴을 찡그 렸다. 남자는 우릴 조금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너희같이 위험한 사람들을 그냥 들여보내 줄 수는 없다!"
부스럭.
머리 위로 팔랑, 나뭇잎이 떨어졌 다. 선선히 부는 바람 때문이라고 생 각할 법한 평범한 변화였으나,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포위해 주세요"
타다닥!
남자가 날카롭게 소리치는 것과 동 시에, 나무 위에서 대여섯 개의 인영 이 속속히 떨어져 레오와 나를 감쌌 다
스윽.
"무기를 버려라."
내 앞에 착지한 장신의 여성은 내
가 순간 놓칠 만큼 빠른 속도로 내 목에 긴 발톱을 들이밀었다.
중년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입가에 길게 난 흉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귀와 꼬리는 물론 손까지 수인화가 된 여자는 인간과 맹수 사이에 걸쳐 있어 이색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녀와 나 사이에 시선이 오갰다. 여자는 험악함과는 동떨어진 태평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분위기만으로 사람을 짓눌렀다.
무심코 크게 숨을 들이쉬던 나는
익숙한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 어떡할까.'
무료하게 눈을 굴리던 레오가 내게 전언을 보냈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싸울 생각 없습니다."
쨍그랑.
손을 펴 머리 위로 올림과 동시에 들고 있던 검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검을 한 몸처럼 여겨 왔으니 정말 웬만해선 검을 놓지 않았으나, 현재 로서 우리는 함부로 침입한 무뢰배 입장이었다. 적어도 무기는 놔야 대 화할 기회가 생길 거라는 걸 알았다.
"솔라티네 제국과 아타라 왕국을 대표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가 보랏빛 눈동자를 느리게 번 뜩였다. 날 뚫어 버릴 듯 응시하는,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은 섬뜩하고 강렬했다.
"우선 연행해."
피식 웃은 여자가 여유롭게 손짓했 다.
레오와 나는 연행되어 수인족 마을 로 들어섰다. 구속구로 묶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냥 포위한 채로만 이동 하는 걸 보아 묶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우릴 보고 웅성거리는 수인들을 지
나 마을 중심에 도착했다.
"들어와."
중년의 여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 녀 앞엔 또 다른 동굴이 있었다.
나는 늑대답게 동굴 참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다.
동굴 안은 음습하거나 축축한 느낌 없이 말끔했다. 가운데엔 거대한 돌 탁자가 있고 전체적으로 쾌적했기에 그저 조금 자연 친화적일 뿐인 회의 장 같았다.
"앉아라."
여자가 턱 끝으로 돌 탁자 앞 의자 두 개를 가리켰다.
곧바로 감옥 같은 곳에 구금될 각 오를 하고 있었건만, 생각•보다 대우 가 훨씬 좋았다. 나와 레오는 순순히 착석했다.
"레논."
"네, 넵!"
여자가 중저음으로 나직하게 이름
을 뱉자 알몸에 망토만 입고 있던 우 리를 안내한 남자가 얼굴이 은은히 붉어진 채로 바짝 긴장하며 자세를 똑바로 했다. 이름이 레논인 모양이 었다.
"가서 족장님 모셔 오도록. 오는 길 에 옷도 좀 입고•"
"네? 하, 하지만......
레논이 보랏빛 눈을 데구르르 굴렸 다. 그가 무어라 답하려던 찰나, 여 자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는다. 모셔
와."
눈을 끔뻑이던 레논이 아, 하고 짧 게 탄식을 뱉었다. 그가 새차게 고개 를 끄덕였다.
"네. 족장님! 모셔오겠습니다!"
그가 망토를 휘날리며 총알처럼 달 려갔다. 그 순간 보인 새하얀 뒤태는 못 본 것으로 하기로 했다.
"자네가 그 검은 재앙이군."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내 옆 책상에
기댔다. 물음도 아니고 이미 확신하 고 있는 어투였다.
"레논이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모 르던데. 당신은 바로 알아보시는군 요"
"평생을 이 숲속에서만 산 아이라 바깥세상에 어둡지. 알 필요성도 못 느끼고. 하지만 나같이 바깥세상에서 살아 본 적 있는 늙은이들은 어느 정 도 세상 돌아가는 꼴에 귀 기울이고 살거든."
그녀가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새하얀 이빨은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은빛 늑대 수인족이 이곳으로 도망 쳐 온 뒤 바깥세상과 연을 완전히 끊 으며 그들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아 예 없다시피 했기에 내게는 모두 새 로운 정보였다.
"은빛 늑대 수인족은 폐쇄적으로 사는 모양입니다."
"우릴 죽이려 드는 원숭이들과 소 통하며 지낼 필요는 없으니까."
여자가 신랄하게 답했다. 인간에 대 한 멸시가 기저에 깔린 채였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지나치듯 본 수인들은 모두 강렬한 적의를 담아 나와 레오를 노려보곤 했다. 인간이 부조리한 짓으로 이곳에 내몰리듯 정 착한 이들이니 당연했다.
여자는 그들만큼 우리에게 적의가 있진 않았지만, 호의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태도엔 약간의 흥 미와 본능적인 멸시가 함께 섞여 있 었다.
"그리고 자네는 동쪽 왕국의 국왕 이고."
여자의 시선이 레오에게로 옮겨갔 다. 고개를 숙인 채 무료하게 발장난 이나 하던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의 형광 연둣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도 아나? 미르의 검은 오러야 워낙 유명하니 바로 알아봤다 치지 만."
"나는 늙은이들 사이에서도 귀가 밝은 편이지."
여자가 제 턱을 매만지며 나와 레 오를 번갈아 보았다. 그녀가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이거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
조롱인지 감탄인지 애매모호한 투 였다.
"족장님 모셔 왔습니다!"
여자의 탐색이 끝난 것 같아 내가 탐색한 결과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찰나, 등 뒤로 레논의 쩌렁쩌렁한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레오를 덮을 만큼 거대한 그 림자가 졌다. 휙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2m는 족히 넘을 법한 거구의
남자였다.
탁, 탁.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는 우리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호위대로 보이는 수인 둘이 남자 양옆을 지키고 섰다. 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좋은 풍채에 위협적인 인상. 수인족 의 족장을 상상했을 때 곧바로 떠오 를 법한 이미지의 남자였다.
"어째서 이곳으로 쳐들어왔지?"
짐승의 울음처럼 낮고 섬뜩한 목소 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나는 질문에 답하려는 레오를 제지하고 남자와 똑 바로 눈을 맞추었다.
"당신이 페이샤입니까?"
남자의 손끝이 흠칫했다. 그의 보랏 빛 동공에 비친 내 분홍빛 눈동자는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쾅, 남자가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 다
"내가 페이샤가 아니면 누가 페이
샤지? 내가 바로 이 은빛 늑대 수인 족의 족장 페이샤다"
우렁찬 목소리가 동굴에서 메아리 쳐 울렸다.
사람들이 혼히 상상할 수인들의 대 장다운 모습이었으나, 나는 헛웃음을 뱉었다.
모든 것이 이성으로 정의되진 않았 다. 생각으론 이해할 순 없지만 영혼 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사람들이 혼히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 이고, 내가 가장 타고난 부분이었다.
"당신, 페이샤 아닙니다."
이 터무니없는 확신은 그곳에서 기 인되었다.
내 혼들림 없는 확언에 남자의 동 공이 희미하게 혼들렸다. 나는 고개 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 당신이죠?"
줄곧 나를 시험하듯 바라보던 보랏 빛 눈동자와 내 두 눈이 맞아 들어갔 다
여자가 입꼬리를 쭉 찢었다.
"과연. 감이 좋군."
여자의 고개 까닥임 한 번에 자신 을 족장이라 주장하던 남자가 정중하 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앉은 자리 에서 일어나 물러섰다.
탁, 탁자 위로 뛰어올라 휘적휘적 남자가 앉아 있던 곳으로 걸어간 여 자는 그곳에 털썩 앉았다.
"그래. 장난은 이쯤 할까."
여자가 옆으로 손을 뻗자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수인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에 곰방대를 쥐여 주었다.
타인에게 불까지 받는 그 태도는 오만하게 느껴지기 십상이었으나, 그 녀에겐 걸맞아 보였다.
거대한 풍채도, 위협적인 얼굴이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없어도 이미 지 배자였다.
"정답이다, 미르."
기다란 곰방대를 제 입가로 가져가 빨아들인 여자가 길게 숨을 뱉었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함께 매캐한 담배 향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동굴 틈새 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내가 은빛 늑대 수인족의 족장 페 이시다."
달빛 아래 페이샤가 날 향해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