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 사했다. 페이샤가 곰방대를 물고 연기를 들이켰다.
"바깥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안다. 빨리 돌아가야겠지. 환 영 절차는 모두 생략하자고. 지금 이 상황을 침략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만으로 고마워하도록."
그녀는 은은히 미소 짓고 있었 으나 목소리엔 조금의 온기도 없 었다.
우리를 보던 수인들의 표정을 떠올리면 곧바로 찢어발기려 달려 들지 않은 게 용한 것이니 순순히 수긍했다.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잠깐."
저벅저벅.
말문을 열려고 할 때, 페이샤가 손을 들어 막았다. 나는 등 뒤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 리에 고개를 돌렸다.
"은빛 늑대 수인족은 모든 일에 대한 결정을 원로 회의로 하는 것 이 전통이라서 말이다."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 이 크게 펌프질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경우 는 혼치 않았다.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중 노년의 수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이 강자였다. 개개인의 능력치 평 균으로는 최강이라 불리는 종족다 웠다.
레오가 습관처럼 검 손잡이를 꽉 잡고, 나는 입 안 살을 살짝 깨물었다.
원로 선정 기준이 강함의 척도 인가 싶을 정도였다. 만약 이들과 의 전투가 일어난다면 참 골치 아 플 것 같았다.
"이제 얘기하지그래."
들어온 이들이 착석한 가운데, 가장 상석에 앉은 페이샤가 여유 롭게 턱을 괴었다.
'뭐부터 말할래.'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레오가 날 돌아보았다. 나는 짧게 앓는 소리 를 냈다.
우리가 가져온 건 두 가지 안건 이었다. 레오의 유모인 레이샤와 은빛 늑대 수인족의 전쟁 참전 여
부
그와 나 사이에 많은 의미가 담 긴 시선이 오갔다.
'레이샤 애기부터 해.'
아무래도 곧바로 전쟁에 참전해 달라고 하는 건 경계만 더 불러일 으킬 것 같았다. 레이샤와의 친분 을 드러내며 벽부터 허무는 게 우 선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레오가 페이샤와 얼굴을 마주했다.
"당신, 레이샤를 아나?"
"......레이샤."
일대가 크게 술렁거렸다.
"바깥으로 나갔던 그 레이샤 말 인가?"
"저 인간들이 어떻게......
원로들은 커진 눈으로 우리를 곁눈질하며 수군거렸다. 그 가운 데 혼자만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미묘한 낯으로 앉아 있던 페이샤 가 탁자를 크게 내리쳤다.
"조용."
그 한마디에 소란이 꾹 끊겼다. 이곳에서 페이샤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제 턱을 매만진 그녀가 레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확실히. 딱 그 나이쯤 될 만하 군."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페이샤만 무언
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시 리게 웃었다.
"레이샤의 피를 먹고 자란 동쪽 의 국왕이여, 행복했는가?"
꽉.
"안 돼, 레오. 참아."
나는 검을 뽑으려는 레오를 막 으며 속삭였다.
이성의 끈이 뚝 끊겨 동공이 비 정상적으로 확장된 눈으로 페이샤
를 응시하는 레오의 손은 희미하 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 슴이 쓰라렸으나,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법이었 다.
나는 자꾸만 달싹이는 그의 손 을 힘으로 짓누르며 페이샤를 돌 아보았다.
"저희는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입가에 길게 그어진 흉터가 비
뚜름해지도록 웃은 페이샤가 고개 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레오가 으 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인간 친구와의 약속 하나 때문 에 종족과 함께 사는 것을 포기해 버린 미련한 아이였지. 위험할 거 라고 몇 번이고 경고했지만 결국 가더니...... 너 때문에 죽었다지?"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레오의 역린을 건드리다 못해 후벼 파는 발언들이었다.
쾅
레오의 몸에서 마나가 폭주하듯 터져 나오는 순간, 난 그의 머리 를 거세게 짓눌러 테이블 위에 내 리박으며 그를 제압했다.
찢어진 그의 이마에서 붉은 피 가 주르륵 흘렀다. 눈에서 초점이 사라진 레오가 작살에 찔린 물고 기처럼 몸을 뒤틀었다.
"이거 놔."
"미안. 제발 참아 줘."
나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은빛 늑대 수인족 전원과의 전투에서는 승산 을 확신할 수 없었다. 레오의 분 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대화를 하겠다는 겁니까, 말겠 다는 겁니까. 대화할 생각 없으면 그냥 말하세요. 전투를 바라는 겁 니까?"
아무리 은빛 늑대 수인족이 강 하다고 해도 지도자인 페이샤가 불필요한 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선택을 할 리 없었다. 그걸 믿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자 곰방대에서 재를 툭툭 털어 낸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도 못 하겠군."
"농담이 지나치셨습니다."
페이샤의 쭉 찢어진 동공이 날 물끄러미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이제야 조 금 진정한 레오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페이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전에 은빛 늑대 수인족을 만나 본 적이 있나?"
"네? 갑자기 무슨......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게."
"......없습니다만."
"기억을 못 하는 거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미심장한 어투였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을까, 그녀가 아무것도 아 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용건을 들어 보지."
대화의 흐름은 그녀의 뜻대로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휘말리고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껄끄러움을 꾹 누 르고 레오를 돌아보았다.
" 빌어먹을......
그가 욕을 짓씹으며 이마에 흘 러내린 피를 닦아 냈다.
나는 몰려오는 미안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놓았다. 아무래 도 저 상처가 흉터 없이 아물 때 까지, 레오의 이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플 것 같았다.
"레이샤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 서 왔다."
레오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찢어 버릴 듯 흉흉한 기세였으나 다행 히 두 눈에 초점은 돌아온 상태였 다.
동굴 안에 원로들이 서로를 돌
아보았다. 페이샤의 보랏빛 눈동 자가 번뜩였다.
"만나서 뭘 어쩌려고?"
"사과하려고."
레오의 두 눈에 상념이 깃들다, 이내 사라졌다. 눈빛이 사나울 만 큼 또렷해졌다.
"당신 말대로 나 때문에 레이샤 가 죽었으니까, 직접 만나서 사과 하고 싶어."
일생일대의 고해성사처럼, 피 토
하듯 내뱉는 유언처럼 실토했다.
"......인간 주제에 각오가 가상 하군."
페이샤가 실소를 흘렸다. 기저에 깔린 인간 비하는 변함이 없었으 나 그리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 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허공으로 눈을 굴렸다.
"레이샤에겐 가족이 없다. 그 아 이의 부모는 바깥세상에서 필요한
정보와 물자를 구해 오는 일을 하 다 인간의 손에 죽었지. 끝까지 추격해 이유를 물으니 수인족의 가죽이 비싸게 팔릴 것 같아서였 다지."
보랏빛 눈동자가 증오를 담아 짙어졌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떤 종족에 속했다 는 것만으로는 무언가를 판가름할 수 없다지만, 가해 종족이 피해 종족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혼자인 레이샤를 손수 키운 게 나다. 총명한 아이라 차기 지도자 로 삼을 생각도 했었지. 바깥 세 상에 관심을 가지더니 훌쩍 떠나 버리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그리 일찍 죽을 줄은 몰랐지."
무섭도록 단단하던 인상이 찰나 에 일그러졌다. 그 순간만큼은 강 인한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 같았다.
"추억 팔이는 이쯤 하고."
곧바로 돌아온 페이샤가 입꼬리
를 쭉 찢어 미소 지었다. 두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레이샤에겐 가족이 없다. 이걸 알았으니 용건은 끝났나?"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 나는 레 오를 곁눈질했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 각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 지 물어봤자 도움이 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용건이 하나 더 있습니 다."
양심에 털이 나지 않은 이상 이 상황에서 이 말을 하긴 어려웠으 나, 그럼에도 해야 했다. 이건 전 쟁의 승패까지 좌우할 수 있는 부 분일지도 몰랐다.
곰방대를 내려놓은 페이샤가 눈 썹을 들썩였다.
" 말해라."
"지금 바깥에서 전쟁이 일어났 다는 건 아실 겁니다."
원로들 사이에서 가볍게 소란이 일었다. 나이 든 이들은 바깥세상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는 페 이샤의 말대로 다들 알고는 있는 것 같았다.
페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북부인들이 전쟁을 일으 켰다지. 다른 종족을 몰살한 것도 모자라 자기들끼리도 싸우고 난리 더군. 인간들은 참 웃기지."
미세한 조롱 어린 어투에 반박
할 말은 없었다.
다른 종족들은 자연과 함께 조 화롭게 살아가는 반면, 인간만이 자연을 해치고 공존이 아닌 공멸 을 택했다.
'그럼에도 지키겠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또한 인간 이니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미련한 종족을 살리기 위 해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떨어지는 물방울 밑에 놓
여 있는 스펀지처럼 점점 더 무거 워져만 가는 마음을 안고 어렵사 리 입을 열었다.
"북부인들은 마수를 통해 전쟁 을 치르려 합니다. 마수들이 마기 를 내뿜는다는 건 아시겠죠. 그들 의 피가 땅을 오염시킨다는 것도 요."
북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도 안건이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발생된 마수 의 시체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도 이후 문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전쟁의 범위가 생각보다 커져 서 이 숲까지 마수들이 침범한다 면? 북부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제국을 넘어 이 숲까지 넘보기 시 작한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땅의 오염이 번지기 시작하면요."
땅은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있 다. 만약 북부가 승리한다면 제국 은 오염된 땅을 채 정화시키지 못 할 것이다. 그럼 그 마기는 번지 고 또 번져 이 숲까지 침범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리 이곳이라도 전쟁에서 완전히 안전할 순 없습니다. 아시 잖습니까."
언제까지고 배타적으로 남아 있 을 순 없다. 그들 또한 대륙의 일 부이니.
떠들썩해지는 주위를 손짓 한 번으로 침묵시킨 페이샤가 턱을 괴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지."
나는 길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했다.
"우리를 도와 전쟁에 참전해 주 십 시오."
그 한마디를 끝으로, 동굴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저런 뻔뻔한! 100여 년 전 참 극은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지!"
"그때 우리가 인간들에게 얼마 나 수모를 당했는데!"
"싫을 땐 학살해 놓고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들의 분노는 오랜 세월 동안 바래지 않 고 차곡차곡 쌓였으며 그만큼 짙 고 무거웠다.
그런 이들에게 참전을 요청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역겨 운 행동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바 닥만 바라보고 있을 때.
"너."
위압적인 목소리가 소란을 뚫고
곧바로 내 청각을 사로잡았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페이샤가 입술을 열었다.
"안테이아 헬라를 아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