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압니까?"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입을 떡 벌렸다. 지금 거울을 보면 정말 웃긴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페이샤는 얼핏 보기엔 침착해 보였으나, 돌 탁자를 꽉 잡고 있 는 손에서 그녀의 동요가 보였다.
"내 질문부터 답하도록. 안테이 아를 어떻게 아는 거지?"
페이샤의 긴 손가락이 히스테리 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안테이 아를 모르는 레오가 어떤 상황인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 아보는 가운데, 나는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퍼스트 네임으로 부른다는 건 꽤 친분이 깊다는 건데.'
검푸른 까마귀 길드의 길드장
'푸른 날개'의 아샤와 은빛 늑대 수인족이자 아타라 국왕의 유모였 던 레이샤, 그에 이어 족장 페이 샤라니.
대체 안테이아의 인연의 줄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건지 짐작 이 되지 않았다. 웬 사막 왕국의 상단주라는 사람이 불쑥 등장해 그녀와 연이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가명 '오드리'에서 그녀의
실명을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게 정상이다. 나는 헛웃음처럼 내뱉 었다.
"안테이아 헬라는 제 어머니 이 름입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당 황할 사람은 페이샤가 아니라 나 였다.
"......미치겠군."
페이샤가 이마를 짚었다. 만난
뒤로부터 노련한 포커페이스로 흔 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주위 원로들의 웅성거림이 겉잡 을 수 없이 커지고 나와 레오 모 두 어쩔 줄 모르던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 붙잡았다.
"보자마자 닮았다고 생각하긴 했건만, 정말이군."
인간 나이로 여든은 거뜬히 먹 었을 것 같은 노년의 여성이 날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들어서자마
자 한마디도 안 하고 나만 바라보 던 원로였다.
"그 눈매며 분위기는...... 그래. 안테이아의 딸이 분명하구나."
주름 진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 다. 그녀의 표정에 물들어 있는 건 슬픔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주인공들이 흔히 겪는 클리셰를 내가 겪을 줄은 몰랐는데.'
대단한 부모님을 둔 주인공들이 한 번쯤 겪는 상황 아니던가. 아 버지 쪽이라면 몰라도 어머니로 인해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은 몰 랐다.
나를 두고 열띤 대화를 나누는 원로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 자루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까, 페이샤가 주위를 정리했다.
"안테이아와 우리 사이의 이야 기를 모르는 모양이지."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착잡함이
일다 사라졌다. 나는 목울대를 울 렁였다.
안테이아는 레이샤와 친구였던 데다, 학창 시절에 수인족을 향한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상소문까지 썼다고 하니 관련이 있는 것도 무 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게 긍정적인 쪽인지 아닌지 지금으로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원수의 딸! 여기서 죽어라, 하 고 달려들면 어쩌지.'
수많은 가능성 아래에서 시뮬레 이션을 돌려 볼 때, 페이샤가 입 술을 열었다.
"안테이아는 우리의 은인이다."
페이샤의 보랏빛 눈동자가 깊어 졌다.
"2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그 리 쾌적한 환경이 아니었다. 우리 가 선택한 건 숨기 가장 좋은 장 소였지 살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 으니까. 이곳을 살 수는 있는 곳
으로 만드는 것만 해도 오랜 시간 이 걸렸다."
이 숲이 은빛 늑대 수인족이 오 기 전까지 황폐하고 척박했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일부러 그런 곳에 숨어든 그들 이 이곳을 자신들의 터전으로 만 들기 위해 대단히 노력했을 것임 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외부와의 소통 이었지. 다들 이곳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했기에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거든. 내가 직접 나가 필요 한 물자를 구해 오기도 했지만 그 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를 떠올린 건지 페이샤의 얼굴에 옅은 그림자가 졌다. 그녀 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그때 외부와의 다리를 놓아 준 게 안테이아다."
아무래도, 내 어머니는 내 생각 보다 많은 일들을 한 듯했다.
"레이샤를 통해 소개받은 아이
지. 처음엔 인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나를 설득 하더구나. 조금 더 나아질 수 있 다고. 틈을 보았다면 닫으려고만 하지 말고 열고 빛을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나는 그녀가 썼던 상소문을 떠 올렸다. 실수로 생긴 틈을 덮으려 고만 하지 말고 마주하라는 말.
그녀는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결국 안테이아의 제안
에 수긍했고, 그 아이를 이곳에 들였지. 그리고 이곳을 여기까지 발전시켰다. 우리의 근거지 곳곳 에 걸려 있는 수많은 보호 마법 수식 중 반은 그 아이가 만든 것 이야. 지금의 젊은이들이야 안테 이아를 모르지만 지금의 원로들은 모두 그 아이가 베푼 은혜를 기억 한다. 그 아이는 보상조차 원하지 않았어. 그냥 돕길 바랐지."
'여주인공의 어머니'라는 쉽고 간편한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역 사와 서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 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웅들을
잊고 살까.
'나조차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이곳 사람들 말고 누가 당신을 기억해 줄까.'
누군가 주무르듯 묘한 느낌이 이는 심장을 통제할 방도가 없었 다. 나는 입 안에 감도는 쓴 침을 삼켜 냈다.
"안테이아 헬라는 우리의 영원 한 은인이다. 그리고 은인의 딸 또한 은인이다. 이걸 부정할 사람 은 없겠지."
진중한 얼굴을 한 페이샤가 주 위를 둘러보았다. 참전해 달라고 했던 당시엔 욕을 퍼붓던 원로들 이 지금은 고요했다. 모두가 고개 를 끄덕였다.
"늑대들은 결코 원한을 잊지 않 는다. 하지만 은혜는 더더욱 잊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에게 원한이 있었으 나, 내 어머니에겐 은혜가 있었 다.
인간이자 안테이아의 딸인 내 참전 부탁은 그들에게 모순일 터 였다.
"......잠깐 밖에 나가 있도록. 회 의할 시간이 필요하다. 귀빈으로 모셔라."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꾹 감은 페이샤가 명령했다.
"내 어머니랑 네 어머니, 레이샤 까지가 모두 친구였다는 거지?
인연 참 기묘하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뒤쪽 나무 에 등을 기댄 레오가 헛웃음을 뱉 었다. 회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털 어놓은 참이었다.
"이마, 괜찮아?"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었다. 새하얀 머리카 락이 사라락 넘어가고 드러난 이 마엔 찧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나 때문이었다.
죄책감에 물든 내가 무어라 말 하려던 찰나, 그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하려 했지? 됐어. 하지 마."
레오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선선 히 불어온 밤바람이 그의 머리카 락을 혼들었다.
"그때 덤벼들었다면 지금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었겠지. 네가
막는 게 맞았어. 막아 줘서 고마 워."
담백한 목소리였으나 담백함이 거짓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조심스럽게 그 의 상처를 쓸었다. 레오가 희미하 게 움찔거렸다.
"아프진 않아?"
"으음, 좀 아픈 것 같은데."
얼굴을 들이민 그가 짓궂게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네가 숨을 불어주면 나을 것 같기도......•"
"멀쩡하네. 발이나 닦고 자라."
" 아."
가벼운 태도가 밉살스러워 미간 을 꾹 미니 레오가 장난스레 신음 을 뱉으며 물러났다.
나는 나무에 툭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 다. 광활하게 펼쳐진 밤하늘이 아 름다웠다.
"어머니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될
줄 몰랐는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와 아리아를 버리고 방치한 몹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고통 을 토로할 곳조차 없던 어린 시절 에 숨구멍이 필요해 그녀를 원망 했다.
"아무리 봐도 어머니 덕분에 잘 된 것 같지."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를 미 워한 나 자신이 나쁜 사람인 것만
같아 마음이 복잡했다.
"나 사실 오랫동안 어머니를 미 워했거든. 그러면 안 됐나 봐."
나는 쓰게 미소 지은 채 레오를 돌아보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날 응시하던 레오가 헛웃음을 내뱉었 다.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좋은 분 이셨던 것 같지만 너한테 좋은 부 모는 아니었던 거잖아. 가만 보면 너는 사람을 통상적인 선과 악으 로만 나누려는 것 같아."
레오의 신랄한 목소리 하나하나 가 심장에 꽂혀 들었다. 못마땅하 단 표정을 지은 그가 말을 이었 다.
"모두에게 악인이지만 네겐 선 인일 수도, 모두에게 선인이지만 네겐 악인일 수도 있잖아. 나도 세상에선 쓰레기 새끼라 불리지만 너한테 미움받지만 않으면 상관없 어. 그리고 넌 날 미워하지 않잖 아."
연둣빛 눈동자가 은은한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반짝였다.
"인간은 완벽하게 선과 악을 가 를 수 없어. 그 사이에 오해와 사 견, 감정이 깃들기 마련이지. 네 세상에선 늘 네가 옳아, 슈슈. 네 주관을 따라."
'내가 옳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내게 건네 준 작은 확신. 미미한 불씨.
그리 무거운 무게도 아니고 가 볍게 던진 한마디였음에도, 나는
울림을 받았다.
"여전히 그분이 밉다면 미워해. 모든 걸 용서하고 품을 필요는 없 어."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건만, 그는 꼭 부족한 사람으로 남아 있 어도 된다고 다독여 주는 것 같았 다.
"밉지는...... 않아."
"으 "
흐 •
"그런데, 사랑이 느껴지지도 않 아. 그냥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
져. 아무리 그분에 대해 들어도 내가 기억하는 건 거의 없으니 까."
"그렇구나."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의 나열을 레오는 묵묵히 들어 주었다. 그의 큰 손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모든 것이 명료할 수는 없는 법이지.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 둬."
엉킨 감정의 실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나는 눈을 감았다.
난 어쩌면 그 말을 기다리고 있 었을지도 몰랐다.
"오래 기다렸나?"
그 손길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 었을까, 기척과 함께 페이샤가 동 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뒤로 원로들이 따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참전 여부를 결정했다."
손에 땀이 배었다. 생각보다 긴 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호흡을 쉰 페이샤가 말을 이 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들을 좋아 하지 않는다. 그건 만장일치더군. 우릴 멸종시키려 든 인간들을 목 숨 걸고 돕고 싶지 않다. 간다고 했을 때 가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확신도 없고."
부정적인 말들의 나열이었다. 묵
묵히 수긍하고 있었을까, 페이샤 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 는다. 안테이아, 그 아이에게 우 리 종족이 빚을 졌으니 도움이 필 요하다면 언제든 나서겠다고 맹세 했지. 게다가 전쟁이 우리를 빗겨 나갈 수 없다는 네 말도 확연한 진실이다. 이곳이 영원히 안전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결연한 두 눈엔 혼들림이 없었 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자란 고목처럼 단단하고 곧았다.
그녀가 읏었다.
"그래서, 출전하길 원하는 자들 만 출전하기로 했다."
달빛을 받은 얼굴은 아스라하면 서도 선명했다.
"나는 출전할 것이다."
페이샤, 은빛 늑대 수인족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협력을 약속받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