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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0화 (240/254)

240화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 밤은 연회다!"

페이샤의 시원스러운 한마디를 시작으로 늑대들이 사방에서 귀청 이 떨어지도록 길게 울기 시작했 다.

아우우우-

소집을 명령하는 뿔 나팔 같은

소리에 사방에서 늑대들이 달려 나왔다.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 짝이는 새하얀 털들의 무리가 이 밤을 백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늦은 시간에 무리하실 필요 없습 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잠든 지 한참 지났을, 저녁을 넘어 새벽에 가까 운 시간이었다. 조금 떨떠름하게 페이샤를 돌아보자 그녀가 의미심 장하게 웃었다.

"모르는가? 늑대는 야행성이다."

우르르 몰려온 늑대들의 눈동자 는 하나같이 보랏빛을 띠고 있었 다. 가장 고귀한 그 색이 달빛을 받아 호수 위 윤슬처럼 반짝이고, 야행성 동물답게 어둠 속에서 확 장된 동공은 신비로웠다.

"우리의 하루는 지금부터 시작 이다. 늑대들의 밤은 인간들의 밤 보다 훨씬 밝지."

페이샤가 몸을 돌리더니 우리를 향해 경계를 내보이는 늑대들을

마주했다.

"갑작스러운 인간의 등장에 다 들 많이 당황했겠지. 인간이 싫은 이들도 있으리라는 걸 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솟은 뾰족한 귀가 뻣뻣하게 서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땅을 한 번 크게 쳤다. 그 녀의 날카로운 손끝이 나를 가리 켰다.

"하지만 이 인간은 우리의 은인 안테이아의 딸이자 내 손님이다. 나를 대하듯 이들을 대하도록."

꼬리를 한 바퀴 살랑거린 페이 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연회를 시작해라!"

아우우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대지를 울 렸다.

기나긴 밤의 시작이었다.

"......정말 먹어도 되는 겁니 까?"

"한 번 먹으면 죽어서도 이 맛 을 잊지 못할 거다."

'먹고 죽기 때문이 아닐까......?'

페이샤의 확신어린 대답에도 나는 나무 그릇에 담긴 무언가를 쉬이 입에 대지 못했다. 귀한 손 님을 맞을 때만 만드는 음식이라 며 그녀가 건넨 건 흡사 늪인 양 질척거리는 새까만 액체였다.

"뭐, 우리가 독이라도 탔을 성싶

으냐? 먹어 보래도."

낄낄 웃은 페이샤가 손짓으로 맛볼 것을 종용했다.

나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않고 그릇에 입술을 댔다. 냄새는 제법 달콤했지만, 생김새는 과연 인간 이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의심이 들게 했다.

'그래도 만들어 준 성의가 있으 니 먹어야겠지.'

우르르 몰려와 모닥불 위에 거

대한 솥을 올린 늑대들이 이상하 게 생긴 버섯부터 나조차도 모르 는 약초까지 집어넣고 한 시간 가 량을 푹 끓여서 나온 게 바로 이 액체였다.

먹다 게워 내는 한이 있어도 날 기대 섞인 눈으로 힐끗거리는 늑 대들 앞에서 못 먹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꿀꺽.

나는 눈을 딱 감고 액체를 한 모금 삼켰다.

' 어?'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맛있지? 이게 우리의 전통 술 '넥타르'다."

벌써 그릇을 다섯 잔째 비운 페 이샤가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 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꿀술 같기 도 하고 묘하군요."

단번에 그릇을 비운 나는 입맛 을 다셨다. 목울대로 넘어가는 맛 은 내가 여태껏 먹어본 어떤 액체 보다 더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소 드 마스터가 된 이후엔 어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건만 이건 한 번에 몸이 후끈해질 만큼 효과가 좋았다.

"더 마셔라, 더."

페이샤가 내 그릇에 흘러넘치도 록 넥타르를 부어 주었고, 나는 그녀가 주는 대로 넥타르를 홀짝 홀짝 받아먹었다. 함부로 긴장을

풀면 안 된다지만 전쟁이 터진 뒤 로 계속 신경이 곤두서있던 참이 라 조금의 휴식은 필요할 것 같았 다.

"레논. 거기서 꿈틀거리지 말고 이리 와라."

그리고 가장 높은 바위 위에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열 번째 잔을 비운 페이샤는,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레논에게 손짓했다.

'옷 입었네.'

늑대에서 갑작스레 알몸의 남성 으로 변신해 나와 레오에게 충격 을 안겨 준 레논은 지금은 다행히 옷을 갖춰 입은 상태였다.

호출에 화들짝 놀란 그가 쭈뼛 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페이샤의 물음에 입술을 달싹거 리던 레논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 다.

"그...... 미안하다. 안테이아 님 의 딸인 줄은 정말 몰랐어. 그분 의 딸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함부 로 굴지는 않았을 텐데."

"제 어머니를 아십니까?"

내가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조금 무거운 표정이 된 레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년을 넘긴 늑대들이라면 모 두 그분을 알 거야. 12년 전 마지 막으로 그분이 이곳에 오셨을 때 마법을 가르쳐 주셨지."

안테이아가 이곳에 남긴 흔적은 꽤 큰 것 같았다.

"12년 전......입니까?"

나는 턱을 매만지며 햇수를 가 늠했다.

안테이아가 죽은 건 내가 7살이 었을 무렵. 내가 올해로 19살이 니, 12년 전이 마지막 방문이라면 그녀는 자신이 죽은 해에도 이곳 을 방문했다는 소리였다.

"가면 갈수록 병색이 짙어지시

긴 했는데...... 그때가 마지막 방 문일 줄은 몰랐지."

'병색이, 짙었다고. 그럼 건강 악화로 돌아가셨던 건가?'

기억을 헤집고 헤집어 어머니의 사인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떠오 르는 것은 없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저는 기억이 안 날까요."

7살이면 그렇게 어릴 때는 아닌 데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

다. 그저 어머니라면 '나와 아리 아를 버린 원망스러운 사람'으로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은빛 늑대 수인족을 이전에 본 적 없는 게 확실한가?"

페이샤는 이마를 짚은 채 과거 를 떠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이내 저어 버렸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

다. 8살 이전의 기억은 모두 희미 합니다. 그 전에 만난 적이 있다 면 만났음에도 제가 기억하지 못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수인족과의 만 남이 있었다 해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인생의 큰 부분 하나가 구멍이 뚫려 버린 느낌. 묘하게 시무룩해 져 있었을까, 무언가를 곰곰이 생 각하던 페이샤가 입술을 열었다.

"추정이다만, 네게 늑대들의 주 술이 걸려 있는 것 같다."

"제게서 말입니까?"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페이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되어 빛바랜 양피지처럼 희미한 느낌이다. 네 오러의 기운 이 워낙 독특하니 그것과 헷갈린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넘 겨 버리기엔 또 확실해서 말이다. 내 추정이 맞다면 네가 아주 어렸 을 적에 발동된 주술일 거다."

페이샤가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우리의 전통 주술은 매우 강력 하다. 하지만 영혼을 담보로 발동 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법보다 배는 위험하지. 그래서 우리는 위 험한 주술을 배우기보단 신체 단 련에 힘쓴다. 그런데 주술에 관심 을 가지다 못해...... 인간의 마법 까지 배워 오겠다며 이곳을 나간 아이가 있었지."

"설마 그게......

나는 목울대를 울렁여 마른침을 삼켰다. 페이샤가 한숨처럼 내뱉

었다.

"그래. 레이샤다."

상황은 내가 상상도 못 한 측면 으로 흐르고 있었다.

"19년을 통틀어 이 숲 밖으로 나간 이는 나와 레이샤밖에 없다. 당연히 나는 아니니......•"

"전에 제가 레이샤를 만난 적이 있고, 그때 레이샤가 제게 주술을 걸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요."

얼핏 보면 터무니없지만 불가능

하진 않았다.

이곳에 오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고 생각했건만, 새로운 의문 을 얻는 순간이었다. 페이샤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럼 모든 게 분명해지지. 그 아인 주술을 발동한 뒤 혼적을 남 기는 법이 없었으니까. 이렇게나 혼적이 희미한 것도 이해가 간 다."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레이샤와 만나는 것까진...... 그 래. 어머니가 레이샤와 친구이니 만날 기회가 있었을 수 있지. 하 지만 7살 이하의 아이에게 리스 크가 큰 주술까지 걸 일이 뭐가 있지?'

레이샤는 내게 무슨 주술을 걸 었을까. 아무리 되짚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 리를 부여잡았다. 끙끙 앓고 있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페이샤가 내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었다. 이 무 심한 행동이 그녀의 위로임을 느 낄 수 있었다.

"내일 바로 출발할 건가?"

"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까요. 일어나는 대로 갈 것 같습니다."

"가기 전에 사람 한 명만 만나 고 가는 게 어떤가."

페이샤가 고개를 들어 달을 올 려다보았다. 휘황한 달이 은은한 빛을 내며 그녀의 윤기 도는 꼬리 를 은빛으로 빛나게 했다.

"은빛 늑대 수인족의 마지막 주 술사를 소개시켜 주지. 영혼을 대

가로 하는 주술을 너무 많이 사용 해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 고 있는 늙은이지만 보는 눈은 여 전할 거다. 그녀라면 네 상태를 똑바로 봐 주겠지."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샐쭉한 보랏빛 눈동자는 올곧았다.

"어때, 알고 싶으냐?"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 순간 아리아와 어머니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던 때가 떠올랐다.

아리아는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고, 그저 원망하고 싶다고.

아리아는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열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다. 모르 는 게 약이 될 때가 많음을 알았 다.

그래, 어쩌면 이번 일도 판도라 의 상자일지 모른다. 아니, 판도 라의 상자일 거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나는 웃음을 흘렸다.

"네. 알고 싶습니다."

나야 늘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 던가. 기어코 판도라의 상자를 열 어젖혀 스스로 화를 부르는.

그럼에도 난 상자들을 열어 온 세월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게 내 방식이었다.

"......좋다. 내일 자리를 마련해 주지."

페이샤가 낮게 웃었다. 나를 바 라보는 그녀의 눈은 한순간 손녀 를 보는 할머니 같았다.

"그리고 저 녀석은 어떻게 좀 해 봐라."

금방 기색을 지운 페이샤가 내 옆을 가리켰다.

툭.

내 어깨에 무언가가 닿았다. 사 르륵 나부끼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보며 눈을 끔뻑이던 나는 이내 입

을 벌렸다.

"••••••레오?"

쓰러지듯 내게 기댄 레오가 이 리저리 혼들리며 휘청거리고 있었 다.

"너 몇 잔 마셨냐?"

나는 불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탈탈 혼들었다.

깜빡.

새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드러난 연둣빛 눈동자는 묘하게 몽롱했 고, 창백하던 그의 두 뺨엔 꽃물 이 들어 있었다.

"헤."

얼굴에 웃음이 흐드러지게 피어 나고, 배시시 웃음 지으며 내뱉는 숨결 새로 달큼한 넥타르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자식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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