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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1화 (241/254)

241 화

"정신...... 정신 차려 봐."

" 三 "

헤실헤실 웃음을 터트린 레오가 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평소엔 싸하고 날카로워 보이던 낯이 지 금은 완전히 풀려 순한 양 같았 다.

그는 내 팔에 나무늘보처럼 달 라붙어 왔다.

"좋아......

"뭐가...... 미쳐 돌아가는 이 상 황이......?"

"아니."

그의 덩치에 비하면 내 팔은 가 느다란 나뭇가지에 불과할 텐데도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은 대단히 낯설었 다. 기다란 속눈썹을 팔락인 그가 꿀술 향취 섞인 숨결로 속삭였다.

"네가 좋아.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슈슈."

'이 자식...... 주사가 애정 표현 인가?'

나는 이마를 짚었다.

레오와 술을 마신 게 이번이 처 음이니 알 턱이 없다. 평소 보이 지 않던 풀린 분위기를 내보이며 아름다운 얼굴로 애먼 사람 심장 떨어트릴 고백의 말을 속삭이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걔 괜찮아? 혼자 한 동이를 비 웠어. 넥타르는 인간들의 술과는

차원이 다르게 독한데."

레논이 혀를 내두르며 텅 비어 버린 자기 몸만 한 동이를 탈탈 털었다. 동이에선 액체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마를 탁 쳤다.

"......여기 숙취 해소제 같은 거 있습니까?"

"있긴 있는데 늑대용이라 인간 한텐 독성이 좀 있을걸."

총체적 난국이었다.

매달려서 실실거리는 레오를 보 고 있자니 속이 타 넥타르를 한 모금 들이켰을까, 레논이 말간 얼 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걔는 네 첩이야?"

"콜록!"

넥타르를 레오 얼굴에 미스트처 럼 뿜을 뻔했다. 난 뱉을 뻔한 걸 간신히 참은 대신 사레에 들려 밭 은기침을 내뱉으며 어이가 사라진 채로 레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합니까?"

"너 소드 마스터라며. 능력 있는 늑대들은 처첩을 여럿 들이니까."

"인간은 일처일부가 보통입니 다...... 그리고 얜 국왕이니, 첩을 들여도 얘가 들일 가능성이 높겠 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쟤 보다 강하잖아. 그러니 쟤가 네 첩이지. 아, 혹시 정실이야?"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늑대 들의 문화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태어나서 바깥 세상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했다는 게 사실인지 그는 인간의 문화에 완전히 무지 했다.

"나는 페이샤 님의 첩이 되는 게 꿈이라고."

수줍게 페이샤를 곁눈질한 레논 이 내게 속닥거렸다. 속닥거리는 것치곤 목소리가 컸으니 페이샤도 들었을 것 같건만, 페이샤는 이미 알고 있는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잔을 비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하여튼 레오와 저는 그런 관계 가 아닙니다."

" 헤에."

딱 잘라 부정했음에도 레논은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히죽 입꼬 리를 끌어올려 웃는 얼굴이 밉상 이라 미간을 좁혔을까,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강해졌다.

"왜 말 안 해 줘?"

"뭐?"

"네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술기운으로 늘어지는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새하얀 피부 위로 야살스레 붉어진 레오의 눈 가가 활짝 휘었다.

"너도 나 좋아한다고 해줘야지."

그의 등 뒤로 여우 꼬리가 살랑 이는 듯한 환각이 일었다.

'얜...... 어디서 함부로 술 마시 면 안 되겠다.'

애초에 소드 익스퍼트가 술에 취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긴 하지

만, 두 번 취했다간 세상 사람들 을 모두 유혹하게 생겼다. 나는 묘하게 홧홧해지는 귀를 만지작거 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이 취했다, 레오."

"안 취했는데. 아타라 역사서라 도 외워 볼까? 완벽히 멀쩡해."

"그래그래."

꿀술 냄새 나는 목소리가 내뱉 는 건 하나같이 술 취한 이들의 단골 멘트였다. 건성건성 답한 나 는 그의 팔을 내 어깨에 둘러 레 오를 부축했다.

"어디에 묵으면 됩니까?"

"붉은 기둥이 세워진 동굴. 손님 용 숙소이니 부족한 건 없을 거 다. 둘이 쓰기에 좁지도 않을 거 고. 안테이아 이후 쓴 사람이 없 어서 먼지는 좀 쌓였겠지만."

우릴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들 보듯 흥미롭게 관전하던 페이샤가 동굴 하나를 가리켰다. 한숨을 푹 쉬고 레오를 이끄려 할 때였다.

"싫어. 말해 주기 전엔 안 갈 래."

투정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발걸 음이 덜컥 멈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휘청거리던 레오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 를 바라보자, 잔뜩 풀린 눈을 한 레오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좋아한다고 해 주면 안 돼?"

아직도 입 안을 감도는 넥타르 의 진득한 단맛보다도 더 달콤한 목소리였다.

"우와. 첩 아니라면서."

"시끄럽습니다."

"이제 한마디 했는데."

실실 웃는 레논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애 취급을 싫어하는 그는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 다. 평소와 간격이 컸기에 파급력 도 더욱 컸다.

'좋다는 말은 늘 쉬웠는데.'

내겐 대부분의 인간이 호와 불 호 중 호의 영역에 들어갔다. 싫 어하는 것으로 감정 소비하는 것 을 즐기지 않기도 하고, 내 사람

들을 사랑하며 세상까지 좋아하게 되어 버린 탓이었다.

때문에 좋다는 말은 언제나 쉽 게 내뱉을 수 있었건만, 이번은 어쩐지 망설여졌다. 꼭 특별한 의 미라도 될 것 같아서. 조금 뜸을 들인 나는 기대로 반짝이는 레논 의 두 눈을 모른 척하며 입술을 열었다.

"......좋아해. 내가 널 싫어할 리 없잖아."

머뭇거렸더라도 거짓은 없었다.

"우와."

"당신까지 그럴 겁니까?"

"내가 뭘?"

피식 웃는 페이샤를 흘겨보자, 그녀는 모르쇠를 하며 능청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조금 열이 오른 얼굴을 마른세수하며 레오를 재촉했다.

"이제 됐지? 가자."

이번에도 안 간다고 하면 감자 포대처럼 들쳐 업고 갈 생각이었

건만, 그는 내가 끌기도 전에 발 걸음을 옮겼다.

" 나도••••••

늘어진 필름처럼 죽죽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머리카락이 내 어깨에서 사부작거렸다. 내 어 깨에 머리를 기댄 레오가 발그레 한 얼굴로 방실 웃었다.

"나도, 네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어."

미사여구 한 조각 없는 직구. 담

백하고 해맑은 애정 표현.

아이일 때조차 아이답게 굴지 못하던 소년의 가장 천진무구한 순간이었다.

털썩.

큰 몸이 무슨 짐승의 것인지 모 를 부드러운 모피에 쌓인 짚단으 로 추락했다. 나는 누워서도 정신 을 차리지 못하는 레오의 몸을 정 자세로 수정해 주며 이마의 땀을

슬쩍 닦았다.

"다음에도 취하면 상자에 넣어 서 버릴 줄 알아."

내가 들어도 음산한 중얼거림이 어둑한 동굴 안을 메웠다.

나는 다른 짚단 위에 주저앉으 며 숨을 골랐다. 레오를 동굴까지 끌고 오는 일은 신체적으로 힘들 진 않았으나, 자꾸 미끄러지려는 그를 주의 깊게 붙잡아 이끌어야 했기에 상당한 정신력이 소모되었 다.

"X Z、"

TT TT-

"그래, 이 화상아."

"AZ、"

nrnnr-

연둣빛 눈동자가 나를 담아냈다. 애절함이 옅게 묻어나는 목소리는 꼭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받 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직 어렸지. 너도 나도.'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은 낯에 서 새삼스럽게 그가 아직 미성숙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안쓰

러워진 나는 몸을 일으켜 흐트러 진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었 다.

"그래. 여기 있다."

혼자 꽉 쥔 손이 외로워 보여 주먹을 풀고 내 손을 겹쳐 주었 다. 그는 잡을 곳이 필요해 보였 다.

"슈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읊조린 레오가 내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수면제를 목구멍에 들이부어도 잠이 오지 않을 때가 많았어. 그 때마다 나는 네 이름을 불렀지. 잡을 게 그것밖에 없었거든."

목소리엔 헤아릴 수 없는 고독 함이 묻어났다.

한 손으로 침대를 짚은 채 레오 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자니, 그 가 아스라이 웃었다.

"그래서 널 향한 마음이 위태로

운 상황으로 인한 한순간의 치기 가 아닐까 싶었어. 널 만나러 가 지 않은 건 왕좌를 탈환한 뒤 만 나고 싶었던 것도 있었지만, 생각 을 정리하기 위함도 있었지."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솔직해진 다는 게 진실인지, 레오는 그 어 느 때보다 진중해 보였다. 압생트 색의 눈동자는 사람을 홀릴 듯 반 짝였다. 그를 보고 있자면 나까지 도 취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다시 만나는 게 두 려웠어. 널 내 멋대로 왜곡해서

완벽한 구원자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봐. 그런데 아니더라. 다시 본 순간 깨달았어."

레오는 내 생각보다 더 세심한 사람이었다. 창문 새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신비롭 게 빛났다.

"너는 숨 막히도록 빛나는 사람 이라, 나는 지금과 아주 다른 길 을 걸어왔어도 속수무책으로 네게 빠져 버렸을 거라고."

휘황하게 피어나는 웃음에 심장

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숨을 멈 췄다.

달빛이 무색하게 반짝이면서 내 게 빛난다니, 빛나고 있는 건 본 인이면서. 정말 웃기는 소리였다.

"네가 좋아, 슈슈."

술김에 가볍게 내뱉는 것이 아 니다. 술을 빌려서야만 뱉을 수 있는 절절하고 직선적인 고백이었 다.

그가 내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주었고, 나는 저항 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풀썩, 침대를 짚던 손에 힘이 빠 지고 그의 몸에 내 몸이 겹쳐졌 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 언가 때문인지, 그의 체온은 평소 보다 훨씬 더 달아올라 있었다.

그 체온은 바람에 불씨가 번지 듯 내게까지 번져 왔다.

"싫으면 지금 밀어내."

낮은 속삭임을 끝으로, 그는 천

천히 나와 호흡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감촉이 온몸을 간지럽 혔다. 생존엔 한 사람의 호흡으로 충분하건만, 그의 호흡까지 입술 틈새를 타고 들어오니 과호흡이 올 것만 같았다. 그의 체향과 섞 인 꿀술 내음이 지독히 달콤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백발이 내 이마를 간지럽혔다. 그가 미세하 게 고개의 각도를 트는 것과 동시 에 젤리가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나는 조금 급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질 끈 눈을 감았다.

입 안에 단내가 진동했다. 단 것 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거부 감이 들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 다.

" A X "

TTTT-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입술 의 움직임이 그대로 내게 느껴졌 다. 이전부터 내게 어울리지 않다 고 생각했던 지나치게 폭신한 느

낌의 애칭은 오늘따라 더더욱 기 묘하게만 들렸다.

흐릿하게 눈꺼풀을 들면, 맹목적 으로 빛나는 압생트 빛깔의 눈동 자와 눈이 마주쳤다.

"••••••슈슈."

털썩.

부드러운 힘과 함께 빠르게 자 세가 역전되었다. 내가 침대 위에 눕게 되고,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단단한 팔이 내 얼

굴 옆을 짚고 있었다.

"하......

술 때문에 열이 오른 듯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젖혀 식히던 레 오가 자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 나 풀었다. 핏줄 선, 곧고 긴 목 선을 타고 땀이 흐르는 걸 보니 정말 더운 모양이었다.

"나......

길게 늘어지는 목소리. 몽롱하게 풀리는 눈.

그의 몸이 내 몸 위로 겹쳐졌다.

새액새액.

목덜미로 고른 숨이 느껴졌다. 레오의 단단한 몸 아래 깔린 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얹은 인영을 끔 뻑이며 바라보다 헛웃음을 내뱉었 다.

"잠들었네, 미친놈......

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던 이상한 생각들을 깨끗이 지웠 다. 안도와 허탈함과 아쉬움과 평 화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 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졌네.'

괜찮은 척하더니 여행 동안 피 로가 쌓이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처럼 웃고, 내 품에 안겨 새 근새근 잠든 레오의 하얀 머리칼 을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잘 자, 레오. 나도 널 좋아해."

한 줄기 달빛만이 비추는 고즈 넉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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