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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2화 (242/254)

242화

눈꺼풀을 두드리는 오렌지빛 햇살 에 부스스 눈을 떴다. 용병 일을 그 만두었어도 꼭두새벽에 눈을 뜨는 습 관은 여전했다. 보들보들한 모피에 잠시 뺨을 비비던 나는,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잘 자네......•'

그곳엔 나를 인형처럼 끌어안은 레 오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천사처럼

잠든 모습이 어렸을 적의 그를 떠올 리게 만들었다. 나는 추억에 잠긴 채 미소 지었다.

"으음••...

짧게 앓는 소리를 낸 레오가 부스 럭거리며 몸을 뒤척이더니 스르륵 눈 을 떴다. 싱그러운 연둣빛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청명하게 반짝였다.

멍하니 눈을 굴리던 그는, 이내 나 와 눈이 마주쳤다.

"극락인가•...

잠에서 덜 깬 것이 분명한 멍한 얼 굴을 한 레오가 아침답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어나, 이 자식아."

어제 고생했던 게 생각나 울컥한 나는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레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동굴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나와 자신과 우리가 누워 있는 침대를 번갈아 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얼떨떨한 질문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자식, 필름 끊겼네.'

애정 표현에, 기억 상실에. 참 가지 가지 하는 술버릇이었다.

"알아서 좋을 거 없다."

"아니, 다른 침대도 있는데 왜 여기 서......

"조용히 하고 그냥 일어나."

"아, 아아."

레오의 귀를 잡아당기며 몸을 일으 키자 그가 무감각한 신음을 뱉으며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프게 당기지 도 않았으니 괜한 엄살임이 분명했

"속은 괜찮냐후"

"응? 멀쩡해. 그런데 어제 술 마신 뒤로 기억이 안 나."

내 질문에 레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한 숙취도 없는지, 새하얀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제를 떠올리면 저절로 낯이 뜨거 워졌다.

"돌아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난 다 녀올 곳이 있어."

"어디 가?"

대강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나갈 준 비를 할 때, 다급하게 일어난 레오가 물었다. 나는 엷게 미소 지었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리러

간다."

나는 각오가 되었다.

"잠자리는 괜찮았나?"

"네. 나쁘지 않았습니다."

숙소 앞에 기다리고 있던 페이샤가 벽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레오에게 휘말려 얼떨결에 침대에 누웠다가 그 김에 잠들어 버렸으니 잠자리가 괜찮 았다고 할 순 없었으나 예의상 고개 를 끄덕였다.

"바로 가지."

짧게 정돈된 은빛 쇼트커트를 가볍 게 턴 페이샤가 내게 따라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 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소개시켜 주는 주술사는 어 떤 사람입니까?"

"알리샤 말인가."

아침을 맞은 숲은 밤의 숲과는 다 른 매력이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나뭇잎을 빛내는 가운데, 늑대는 야 행성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마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수인 대학살 사건 때 가장 큰 공 을 세운 늑대 중 하나지. 그녀의 마 법 한 번에 해일이 일고 지진이 일어 났으니 인간들의 공격에 맞설 때 무 척 중요한 전력이었다."

"그 정도면 대마법사 아닙니까?"

나는 놀라서 페이샤를 돌아보았다. 페이샤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인간 대마법사와는 다르다. 그들은 그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많은 힘을 필요로 하지만 마나만 조절하면 무한

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지 않나. 하 지만 우리의 주술은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대신 리스크가' 크다. 쓰면 쓸수 록 영혼이 먹혀 들어가지."

페이샤의 표정은 무거웠다. 동굴이 밀집된 거리를 지나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 았다.

"젊은 나이에 일족을 위해 영혼을 바쳐 주술을 발동해 온 여자다. 우리 의 영웅이었지만, 오래 살진 못하겠 지. 주술을 사용해 온 부작용 때문에 자꾸 자는 시간이 늘어나거든. 그러

다 언젠간 영원히 잠들어 버릴 거

인간의 편협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수인들이 희생당했을까. 난 그 수를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우리는 얼마 나 많은 영웅들을 잃어버린 걸까.

"오늘은 일어나 있는 날이니 무리 없이 대화할 수 있을 거다."

표정을 정리한 페이샤가 발걸음을 멈췄다.

마을과는 꽤 동떨어진 곳. 그녀의

앞엔 이리저리 삐뚤빼뚤하게 기울어 진, 지그재그 모양의 탑이 있었다.

'뭔...... 이런 건물이 다 있어?'

나는 질린 눈으로 탑을 바라보았다. 숲 깊은 곳에 있는 탑은 안전성이 심 히 의심되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 괴짜임은 분명해 보였다.

'알리人}라는 수인, 단단히 괴짜인 모양이지.'

내가 혀를 내둘렀을까.

쾅 쾅!

페이샤가 안 그래도 아슬아슬해 보 이는 탑이 흔들리도록 크게 문을 두 드렸다.

"알리샤! 당장 나와라!"

알리시와 친분이 두터운 모양인지, 그녀의 쩌렁쩌렁한 고함엔 친근한 말 투가 배어 있었다.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혼들리는 탑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또 잠들었나 보군. 깨어 있으라니 까."

페이샤가 쯧 혀를 차며 다리를 들 어 올렸다. 나는 놀라 그녀를 돌아보 았다.

"자, 잠깐. 뭐 하려는 겁니까?"

"뭘 하긴."

그녀의 발길질과 함께 나무 문이 개박살 났다. 얼마나 강하게 찬 건지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산산조각이

났다. 나무 파편이 허공을 나는 가운 데, 페이샤가 덤덤하게 발걸음을 옮 겼다.

"안 나오면 부수고 들어가야지."

그 성격으로 수인대학살 때 인간 말살을 결심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채 나무 파편을 피해 탑 안으로 들어갔다.

"와, 이건......

"그래."

그리고 내부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정말 엉망이네요"

탑 안은 사람이 살 수는 있는 게 맞나 싶을 만큼 제멋대로 어질러져 있었다.

마법진들과 마도구들, 마법 공식이 적힌 종이들, 그리고 생필품들까지 모두 사방에 흩뿌려진 탑 안은 괴짜 마법사의 연구실과 광인의 집 사이에 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 다. 나는 얼굴을 구기며 신발 바닥에 붙은 정체불명의 액체를 털어 냈다.

"치우고 살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더 군. 아, 그건 피부가 녹는 독약기니 조심해라."

피부가 녹는 독약이 대체 왜 집에 있는지 의문이었으나 우선 넘기기로 했다.

장애물들이 즐비해 위험한 정글을 방불케 하는 탑을 파헤치고 들어갔을 까.

탁.

발걸음을 멈춘 곳엔, 방 하나만 한

거대한 침대가 있었다.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조차 들리 지 않는 탑 안, 고르고 일정한 숨소 리가 퍼져 나갔다. 침대 위엔 새하얀 은발을 가진 중년의 여성이 눈을 감 고 죽은 듯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온통 흉터로 엉망인 얼굴에, 죽었나 싶을 만큼 평온한 얼굴. 명화에서 등 장할 것 같은 고아한 인상의 여인이 었다. 어쩐지 신비로워 계속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을까, 거침없이 침대 위로 올라간 페이샤가 여인을 거세게 걷어찼다.

"그만 자고 일어나라, 할망구. 그렇 게 자 봤자 키스로 깨워 줄 왕자도 없다."

여자의 몸이 데구르르 굴러가고, 이 내 굳게 닫혔던 두 눈이 천천히 뜨였 다

여자의 눈은 여느 늑대들처럼 보랏 빛이 아니라 희뿌옇게 먼지가 낀 듯 한 잿빛이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영웅 대 우를 이렇게 해?"

"네가 우리 종족에게나 영웅이지 내게도 영웅일 것 같나? 내겐 잠만 늘어져라 자는 노친네지."

허울 없는 사이가 아니고서야 오갈 수 없는 말들이 오고 갔다. 욕설임이 분명한 말들을 짓씹듯 중얼거리던 여 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다, 꼴통아. 무슨 일이냐. 또 마법진이 망가졌어?"

"아니. 널 만나야 하는 손님이 있 다."

알리샤의 뒷덜미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린 페이샤가 그녀를 내 앞으로 던 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알리 샤가 사뿐하게 내 앞에 착지했다.

"안테이아, 기억하지. 그녀의 딸이 다. 그리고.••... 우리의 주술이 걸 려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탁한 잿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호오. 안테이아의 딸이라. 이쪽으 로 와 보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제 턱을 매만

진 여자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조심 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라.

"더 가까이. 내가 눈이 잘 안 보여 서 말이야."

"그 노친네, 주술 부작용 때문에 맹 인이나 다름없다."

"넌 좀 가만히 있어, 쓸모없는 주책 아."

은발에 보랏빛 눈은 늑대족의 상징 과도 같건만-물론 절대적이진 않다. 늑대족과는 연관이 없는데도 은발에 연보랏빛 눈을 가진 율리안도 있으니 말이다三 잿빛 눈이기에 무언가 이상

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멀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한 걸음 떨어져 있 던 거리를 마저 좁혔다.

"어디 보자."

그 순간 알리샤가 내 양 뺨을 잡고 훅 끌어당겼다. 코앞의 거리에서 나 를 핥듯 훑어본 그녀는 헛웃음을 내 뱉었다.

"너...... 기억이 잡아먹혔구나?"

그녀가 중얼거린 말은 반쯤 예상하 면서도 설마 싶었던 상황이었다.

"아, 그래. 아주 잘 알지. 내 마지 막 제자의 기운을 잊을 리가 없잖 아."

알리샤가 산만하게 돌아다니며 무 언가를 꺼내고, 적고,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어려운 문제를 당면한 수 학자 같은 태도였다.

"레이샤, 그 아이가 건 게 분명해. 아주 강력한 기억 봉인 마법이야. 너 소드 마스터지? 지금의 네게는 걸 수 없으니 어렸을 때 걸었을 거야 흥미 롭군. 아주 흥미로워......

어디선가 안경을 주워 낀 그녀가 부담스럽도록 얼굴을 들이밀며 나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도수가 얼마나 높은 건지 제법 크고 선명하던 알리 샤의 눈이 안경알에 비췄을 땐 콩알 만했다.

그녀를 따라가지 못한 채 우뚝 서 있기만 했을까. 그녀가 탁한 눈을 반 짝였다.

"분명 끊겨 버린 기억이 있다는 걸 느낀 적이 있었을 거야. 떠오르는 거 없어?"

"어...... 특별히 이상한 건지는 모 르겠습니다만, 8살 이전의 기억이 아 예 없습니다."

"헤에. 단편적인 장면 같은 것도?"

"네. 누군가 도려낸 것처럼 텅 비어 있습니다."

내가 몇 번이고 이상함을 느끼던 부분. 그 부분을 조심스레 말하자 알 리샤가 너저분한 양피지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가 우 뚝 펜을 멈췄다.

"레이샤, 괴짜긴 하지만 어린애 기 억을 무턱대고 지울 만큼 나쁜 애는 아닌데 말이야. 그것도 거대했을 리 스크를 떠안으면서."

그녀는 의문스럽다는 목소리로 중 얼거리다 다시금 펜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괴짜는 그녀가 더 괴짜인 것 같았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지?"

팔짱을 낀 채 알리샤를 지켜보던 페이샤가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를 마저 쓴 알리샤가 펜을 내려놓았다.

"레이시익 주술이 확실해. 제법 정 교하게 숨겼지만 스승에게까지 숨길 수는 없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황 상으로는 이 아이의 8살 이전의 기억 을 완전히 날려 버린 것 같고"

초점 없이 창백한 알리샤의 눈이 나를 담아 냈다. 그녀도 안테이아와 친분이 있는지 나를 보는 눈빛엔 미 미한 온기가 담겨 있었기에, 그녀의 시선이 싫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풀어 줄 수 있어. 네 기억을 묶어 둔 봉인."

그 한마디에서 알리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자신이 풀지 못할 리 없다 는 듯 당당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레이샤가 묶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의문이 솟아난다.

레이샤는 내 기억을 왜 묶었을까. 어머니는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 까. 풀리지 않는 실마리를 풀 열쇠가 코앞에 있었다.

"어쩌면 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 라. 어린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픈 기억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 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만약 정말 내게 약을 처방하듯 기억을 묶어 준 거라면, 풀지 않는 것이 훨씬 현명했 다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가운데, 알리 샤가 물었다.

"어때, 풀고 싶니?"

답해야 할 문제는 끊기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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