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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3화 (243/254)

243화

"......시간을 조금 주실 수 있습 니까?"

긴 간극 끝에, 나는 조심스레 내 뱉었다.

잊어버린 기억, 당연히 궁금했 다.

어째서 8살도 안 된 어린아이의 기억을 봉인해야 했는지 의아했

다. 이 기회에 내 어머니의 정체 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하지만 불쑥 솟아난 이성이 본 능적인 호기심을 눌렀다.

만약 레이샤가 지웠다는 기억이 내 정신에 큰 영향을 주는 기억이 라면? 봉인을 풀다가 예기치 못 한 부작용이라도 발생하면?

지금의 나는 나 혼자만 생각할 수는 없는 위치였다. 지원군의 지 휘관이었다. 사사로운 일 때문에 상황을 망쳐선 안 됐다.

'그리고, 볼 준비도 안 된 것 같 고.'

나는 기어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인간이다. 이번에도 그럴 것 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곳에 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알게 된 것들을 정 리하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이 이상 정보를 입력했다간 과부 하가 올 것 같았다.

"그래. 시간이 필요하겠지."

알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가 안경을 치켜올려 썼다.

"어차피 기억을 되돌려 주는 약 을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해. 그 전까지 충분히 생각해 보렴."

"감사합니다."

알리샤는 상냥했다. 호의적인 태 도에 조금 어색해하며 고개를 숙 이자, 그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테이아의 딸에게 이 정도는 당연하지. 그 아이는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어떻게 결혼해서 잘 살고 있나 보구나. 나쁜 것, 어떻게 연락 한 번도 안 한다니? 걔 잘 살아?"

" 아."

포근하게 반짝이는 알리샤의 잿 빛 눈을 보며 탄식했다. 아무래도 알리샤는 상황에 완전히 무지한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어머니는 결혼하지 않고 저를

낳으셨고...... 12년 전에 돌아가 셨습니다."

알리샤의 눈이 커졌다. 두 눈이 크게 흔들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 아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예 상했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온기가 깃든 잿빛 눈동자가 나 를 응시했다.

"넌 괜찮니?"

"아, 네. 괜찮습니다."

12년이나 지난 일이다. 게다가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다시피 한 상태이니 슬픔을 느 낄 턱이 없었다.

'냉혈한 같아 보일까.'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의 죽음에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것이 이상해 보일까 싶어 얼굴을 만지작거렸을 까, 알리샤가 웃었다.

"네게 상처가 아닌 것 같아 다 행이구나."

그녀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세월 이 녹아든 목소리는 오랫동안 파 도에 닳아 매끄러워진 바위처럼 부드러웠다.

"약은 완성하는 대로 네게 전달 해 줄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원하는 보답이 있으신가요?"

"참, 애한테 무슨 보답을 받니? 그것도 안테이아 딸한테. 마침 요

새 할 게 없어 적적했는데 잘됐 지."

알리샤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더 니 탑 안을 열정적으로 쏘다니기 시작했다. 분명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매끄러운 움직임 이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거다."

벽에 기댄 채 나와 알리샤를 지 켜보던 페이샤가 종용했다.

나는 바빠 보이는 알리샤를 지 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 모

를 액체들을 운반해 오던 알리샤 가 멈칫하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 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 네. 이름이 뭐니, 아가?"

"카슈미르 크리시스입니다."

"그래, 카슈미르."

알리샤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 다.

"잘 자랐구나. 안테이아도 분명 너를 사랑했을 거야."

그녀의 한마디는 내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곧바로 연구에 빠져 버린 알리 샤를 뒤로하고 탑에서 나왔다. 페 이샤가 나와 발걸음을 맞추며 나 를 안내했다.

"노인네가 많이 괴짜 같지?"

"좋은 분 같았습니다. 실력도 상 당해 보이시고요."

맹인 수준의 시력이라면서 보지

도 않고 가지각색의 재료들을 꺼 내 능숙하게 배합하는 모습은 거 의 마술에 가까워 보였다.

"그 노인네 못 미더워 보여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믿어도 될 거다. 안테이아와 관련된 일은 허 투루 하지 않기도 하고."

이곳에서 안테이아는 절대적인 존재 같았다. 안테이아의 이름 하 나로 모든 것이 가능케 됐다. 수 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갈 때, 페 이샤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안테이아를 원망하느냐?"

멈칫.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시원한 바람이 키 큰 나무를 흔들어 나뭇 잎이 사방에서 흩날리듯 추락했 다.

"그 아이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좋은 부모가 될 만한 성격은 아니 었다. 넌 안테이아에 대한 이야기 를 들을 때마다 혼란스러워 보이 더구나."

평생 증오해 왔던 사람을 한순 간에 사랑하게 될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반박하지 않은 채로 느리게 고 개를 끄덕이자, 페이샤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때로 사랑보단 원망과 증오 가 더 큰 원동력이 되어 주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들은 끈질기 고 질척하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 은 마음을 병들게 해. 우스운 사 랑과 어쭙잖은 정의, 미련한 신념 같은 것들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낫지."

어머니를 향한 원망으로 삶을 버티던 어린 날의 내게 해 주는 말 같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증오로 살아가는 것은 괴롭다.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것도 좋은 방 법이다. 너를 위해서."

늦가을 낙엽을 모아 불붙인 모 닥불처럼 따뜻한 조언이었다.

'내게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 다. 늑대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바로 연락하도록.'

지원 요청할 수단을 받은 뒤 레 오와 나는 성대한 배웅과 함께 은 빛 늑대 수인족의 거처를 벗어났 다.

오늘로 자리를 비운 지 3일차였 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날듯이 움직였고, 겨우 해 가 지기 전에 궁에 도착할 수 있

었다.

'별일은 없겠지만 되게 미안하 네.'

큰일이 터지는 즉시 내게 연락 을 넣으라고 했으나 수정구에 도 착한 연락은 없으니 별 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부관인 조나단 에이 머리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떠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했 다.

레오가 시원스럽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당당하게 돌아가. 은빛 늑대 수 인족의 지원을 약속받았는데 꿀릴 게 뭐가 있어? 여차하면 날 팔아. 내가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해."

"참. 내가 널 팔아서까지•• ...

[......거기 멈춰 봐.]

그에게 웃으면서 반박하려 할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 려왔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목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빛의 속 도로 고개를 돌렸다.

"헐! 공녀님! 대박! 돌아오셨군 요! 전 그 국왕하고 야반도주하신 줄...... 어 그 국왕도 있네!"

한없이 자유분방하고 촐싹거리 는 목소리의 주인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나는 은빛 늑대 수인족을 연상 케 하는 은발에 연보랏빛 눈동자 를 바라보다 그의 손에 들린 것으 로 시선을 내렸다.

한 손을 방방 혼드는 율리안의

다른 손엔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아주...... 흥미롭군요.]

그 수정구 안엔 스산하게 웃고 있는 엘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대신관 율리안 공녀님과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이 자식 또 지 랄병이 도져서 그런데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율리안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 왔다. 그의 수정구는 나를 비추는 채였다.

수정구 속 엘이 눈꼬리를 휘었 다. 수정구를 통해서인데도 독보 적인 위압감은 여전했다.

[안녕, 슈슈. 잘 지내고 있어 요?]

"교왕 성하를 뵙니다. 걱정해 주 신 덕분에 무탈히 있었습니다. 성 하께서는 평안하셨습니까?"

나는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율 리안도 레오도 보고 있는 상황에 서 허울 없는 태도를 보일 순 없 었다.

엘은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조금 불편한 미소 지었다.

[그럼요. 나는......•]

"이게 누구야. 타국에 계신 교황 성하 아니야?"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엘의 말허 리를 뚝 끊었다. 엘의 표정이 삽 시간에 싸늘해졌다. 나는 엘이 이 렇게까지 무표정을 지은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아타라의 국왕. 예절은 인생 말 아먹으면서 함께 곁들여 먹었나 보지.]

"예, 예. 별말씀을. 그 더러운 인성만 하겠습니까?"

교황과 국왕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거친 말들이 오갔다. 나와 율리안은 그 사이에 멀뚱히 끼어 있다가 서로 를 곁눈질했다.

[개수작 좀 받아 준다고 자만하 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라고? 너무 멀리 있는 사람

말은 안 들리는데."

못 듣는 척 귀를 긁적거리는 레 오에게서 짙은 마나의 기운이 퍼 져 나왔다. 보이진 않았지만 엘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살벌한 분위 기를 자아냈을 것이 분명했다.

둘의 기 싸움은 공간을 넘어서 계속되었다.

[......정말 깜찍하기 짝이 없군. 오늘 밤에 손님이 찾아가면 내가 보낸 것으로 알도록. 이번엔 처단 에 성공했으면 좋겠군.]

"밤손님 레퍼토리는 이제 지겹 네. 한번 해 보든가. 나는 그때 슈슈 방에서 잘 테니까."

" 와우."

레오가 으르렁거릴 때, 율리안이 작게 호들갑을 떨었다. 자기 입으 론 죽기 싫다고 했지만 시종일관 가볍고 당당한 율리안은 목숨이 아홉 개도 더 있을 것 같았다.

"야, 이번엔 네가 졌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들어가라."

율리안이 수정구를 두드리며 신

난 표정을 지었다. 재밌는 소설을 보는 사람의 태도와 진배없었다.

엘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율리안 대신관.]

"뭐. 맞는 말이잖아? 여기에도 없는 놈이. 어쩔 수......

[아리아 크리시스.]

"없을 수가 없지. 어쩔 수 없는 게 어딨어. 공녀님, 이 자식이랑 대화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잠깐이라도 괜찮아요."

재빠르게 태세를 전환한 율리안

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럴까요."

나야 별 상관 없었다. 어차피 엘 에겐 한 번쯤 연락해 볼 생각이었 다. 율리안이 건네주는 수정구를 받으려 할 때였다.

휙.

큰 손이 수정구를 가볍게 낚아 챘다. 레오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 가 피어났다.

"신타령 샌님. 욕심도 많아. 제 국에 있을 땐 너도 네 세상인 것 처럼 날뛰었을 거 아니야. 나도 좀 즐겨 보자고."

[닥치고 슈슈한테 넘겨.]

" 싫은데."

수정구를 손가락 위에서 빙글 돌린 레오는 이내 시구 자세를 잡 았다.

"꺼져 있어. 지금은 내 시간이니 까!"

쉬이이익!

레오가 있는 힘껏 수정구를 내 던졌다.

무서운 속도를 내며 허공을 가 른 수정구가 바닥에 혜성처럼 처 박혔다. 수정구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바닥이 움푹 파였다.

"꺄악! 내 수정구!"

율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든 말든, 레오는 내 어깨에 팔을 얹

고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여기 있는 동안은 내게만 집중 해. 알겠지?"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후련하고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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