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4화 (244/254)

244확

"율리안 대신관이 촐랑거리다 넘어 져 머리가 깨져서 사흘 동안 기절했 다, 이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레 논 저하가 과도한 검술 훈련으로 사 흘 동안 몸살을 앓았다, 이래야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 미 르가 감기로 사흘 동안 병석에 머무 른다? 뭐, 폐렴도 아니고 감기? 이건 나랑 장난하나 싶은 거죠. 병문안도 못 가게 하길래 저는 지휘관님께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촐랑거리다 넘어져요? 이거 신성 모독으로 고발 가능한 거 알죠?"

"몸살이라니...... 비유를 그렇게 해 야 합니까."

카시아의 불만 가득한 말에 율리안 과 세레논이 착실하게 반박했다.

보지 못한 사흘간 세 사람은 부쩍 친해져 있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조금의 소외감 과 위축감을 느끼며 몸을 쭈그러트렸 다

레오는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어디 서 알고 온 건지 모를 신료들에게 붙 잡혀 밀린 일을 처리하러 갔다.

그리고 나는 카시아와 율리안, 세레 논에게 붙잡혀 사흘간 말도 없이 자 리를 비운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말 안 하고 가서 미안합니다••...

"은밀하게 가셔야 했다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 군요."

얼굴에 '섭섭함'이라고 써 놓은 세

레논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지휘관으로 온다는 걸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시작으로" 스승으로서 무 심한 행동들의 연속이었으니 토라지 는 것도 이해가 갰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고 들 었습니다. 그럼 됐죠, 뭐."

카시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시원스 러운 결론이 그녀다웠다. 율리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좋은 소식은 뭔데요?"

"아, 그게...... 우선 기밀로 지켜 주 시길 바랍니다만, 은빛 늑대 수인족 의 전쟁 출전 여부를 확인받고 왔습 니다."

나는 은빛 늑대 수인족과 있었던 일들을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은빛 늑대 수인족과 관련한 상소 문을 쓴 사람이 스승님의 어머니였다 니......

세레논이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으 로 중얼거렸다. 나를 부담스러울 만 큼 빤히 바라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

다.

"역시...... 피는 속일 수 없습니다. 위인에게서 위인이 나오는 거죠"

그가 감명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카시아가 감탄했다.

"대단한 일을 하셨군요 은빛 늑대 수인족은 최강의 종족이라고 배웠습 니다."

"틈만 나면 은빛 늑대 수인족의 혈 통 아니냐고 의심받았는데 이제야 만 나보겠네요."

율리안이 자신의 은빛 머리칼을 배 배 꼬았다.

동공만 세로였다면 그가 모를 뿐이 지 은빛 늑대 수인족의 혈통이 섞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을 만큼 율리 안은 은빛 늑대 수인족과 닮아 있었 다

"지휘관의 공백이 소문 나게 된다 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라고 판단했 습니다. 말 못 하고 간 건 용서해 주 세요."

설명을 들은 카시아와 세레논, 율리

안은 완벽히 이해했는지 더는 이 부 분에 대해 말을 얹지 않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에이머리 경이 그렇게 필 사적으로 지휘관님과의 알현을 금했 던 거군요."

"••...조나단 에이머리 경이요?"

이제야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는 카 시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기에 걸려서 못 일어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매일 병문안을 신청했거든 요 그런데 부관님이 하나같이 퇴짜 를 놔서 사실 부관님이 지휘관님을 암살한 거 아닐까 싶었습니다. 정말 철저히 막으셨거든요."

극단적인 경향이 있는 카시아의 말 을 적당히 거르고 들으니 급하게 쪽 지 하나만 남기고 떠난 내 뒤를 열심 히 수습해 준 조나단이 남았다.

'대충 발표하고 말 줄 알았는데, 변 명은 형편없어도 꽤 열심히 지켰나 보네.'

감기에 걸렸다는 변명은 내가 들어 도 어이가 없지만, 역시 임무엔 철저 한 사람이었다.

내가 조금 묘한 기분을 느낄 때였

"지휘관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먹물에 한 번 담갔다 나온 듯 빛 한 점 없는 칠흑 빛으로 덮인 남자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카시아와 세레논, 율리안에게 가볍 게 인사한 그가 내 앞에 섰다. 여전 히 속을 내비치지 않는 검은 눈동자 는 잔잔했다.

"보고해 드릴 것이 많습니다. 가시 죠."

조나단은 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있어 참는 것 같았다. 공식적으로 난 감기 에 걸려 나오지 못했던 거니까.

대체 지휘관이 무슨 짓이냐고 곧바 로 소리를 지를 수도 있을 텐데, 그 는 이성적이었다.

'조금...... 정들었나.'

저 무뚝뚝한 얼굴이 묘하게 반가워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애 써 상념을 떨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시아와 세 레논, 율리안을 뒤로했다. 사흘간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얼른 가서 수습해야

할 것같았다.

짧게 인사를 남기고 가려던 찰나, 율리안이 나를 붙잡았다.

"지휘관님."

" 네?"

"시간 나실 때 그 녀석한테 연락 한번 해 주세요."

늘 자유분방에 천방지축이던 율리 안이 그답지 않게 진지했다. 연보랏 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많이 그리워해요, 지휘관님을."

그가 말하는 게 누구인지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명했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

나는 인정했다. 내가 나를 아껴 주 는 이들에게 그들이 하는 것만큼 사 려 깊게 굴지 못한다는 것을.

아타라에 온 뒤로 가족들에게 한 번 연락한 것이 내가 소통한 전부였 다. 여의치 않은 형편에서 최선을 다 했다고는 해도, 상대 입장에선 무심

하게만 느껴질 터였다.

아무래도 분발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중요한 보고입니 다. 나머지는 추후 서류로 확인하셔 도 될것 같습니다."

"확인했다. 수고했군."

조나단은 숙소로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일목요연하게 보고를 마쳤 다.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 론감탄했다.

내 최종 승인이 필요한 사항을 제 외하곤 전부 깔끔하게 처리를 마친 상태였다. 그의 유능함 하나는 인정 해 줘야 했다.

"그럼 이제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 까?"

" 뭘?"

"어딜 다녀오셨는지 말입니다."

나는 멈칫할 뻔한 발걸음을 겨우 떼며 조나단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서류에 시선 을 박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검은 눈에선 여전히 감정 을 읽을수 없었다.

카시아와 세레논, 율리안에겐 이미 말했다. 계획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기밀은 약속받았지만.

카시아는 기밀이라고만 해 두면 고 문을 받아도 털어놓지 않을 성격이었 고, 율리안은 조금 촐싹거리지만 기 밀을 함부로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 니었다. 세레논은 평생 궁중에서 살

아온 황자로서 비밀 유지에 철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셋이라면 특별히 다른 무언가로 입을 막지 않아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나단은?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속내 는 읽을 수 없었다. 나를 껄끄러워하 던 기색도 이제 숨긴 건지, 아니면 사라진 건지 드러나게 보이지는 않았 다.

다만 여전히 나를 믿지도 않는 것 은 분명했다.

정이 들었음은 사실이다. 그림자처 럼 따라다니는 검은 인영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아마 나는 그가 사라지 면 꽤 빈자리를 느낄 터였다.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올 거다. 그 때 확인하도록."

하지만 정과 신뢰는 다른 차원이었 다. 정은 개인적인 마음으로 건넬 수 있었지만, 신뢰는 공적인 문제와 관 련이 있었다.

선을 쭉 긋는 내 대답에 조나단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저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그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엔 답하지 않았다. 내 착각임이 분명하지만, 그 렇게 말하는 조나단은 조금 우울해 보여서 나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믿지 않으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불길하게 생겼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 고 사람은 쉬이 믿지 않는 편이 현명 하니까요"

담담하게 말하던 조나단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내가 묵는 숙소는 다른 곳에 위치했고, 여기가 갈림길이었다.

가벼운 목례 후 조나단이 멀어졌다.

"하지만 저는 지휘관님을 믿습니 다."

감정은 없으나 거짓도 없는 목소리 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내게 미세한 죄책감과 혼란을 함께 안겨 주고 떠나갔다.

나는 사흘 만에 제대로 몸을 닦고 넓은 침대에 누웠다.

은빛 늑대 수인족이 제공해 준 숙 소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왕 궁의 숙소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평화를 만끽 하다가, 통신 마도구를 잡았다.

'늦은 시간에 연락하는 건 실례일 텐데.'

시간을 확인했다. 사흘간 밀린 일 처리를 끝내고 목욕까지 마치니 시간 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동그란 수정구처럼 생긴 마도 구를 검지 위에 올리고 무의미하게 빙글빙글 돌렸다.

'엘에게 연락을 해 볼까, 말까.'

율리안이 연락해 보라고 했지만 만 약 자고 있다면 괜히 연락을 넣었다 가 잠을 깨우는 민폐를 끼칠 수 있었 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우선 연락을 해보고...... 3초 안에 안 받으면 끊자.'

이렇게 결심한 김에 해야지, 미루다 간 또 다른 바쁜 일들에 휘말려 아예 못 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시도했다 가 실패하는 게 나았다.

꾹.

나는 엘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1 초

[슈슈.]

그리고 놀랍게도 엘은 1초가 지나 기 직전에 연락을 받았다. 마도구를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수정구 위로 신성한 기운을 띤 엘 의 얼굴이 불쑥 튀어 올랐다.

걸어 놓고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 지 못했던 나는 조금 흠칫했다.

"엘, 안 자고 있었습니까?"

[네.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

네요.]

엘이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 의 기다란 하늘빛 머리카락은 조금 전 씻은 것처럼 청초하게 물에 젖어 있었다.

[같잖은 걸 봐서 그런가. 속이 뒤틀 려서 못 자겠더라고요.]

화사한 웃음을 지은 것에 비해 그 의 목소리는 묘하게 들끓고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없는 레오 대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음, 그 친구가 나쁜 친구는 아닙니 다. 입이 많이 자유분방하긴 하지 만••...

[내 앞에서 계속 그 새끼 얘기할 거 예요?]

" 네?"

[나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엘이 고개를 기울이며 흐드러지게 눈꼬리를 휘었다. 어쩐지 눈빛을 감 추고자 하는 모양새다. 부드러운 표 정에 비해 당장이라도 메테오를 떨굴 듯 흉흉한 기색이라 나는 얌전히 있 기로 했다.

[마음 같아선 하루 종일 대화하자고 하고 싶지만, 오래 붙잡아 둘 생각은 없어요 슈슈 피곤하잖아요 얼굴 봤 으니 됐어요. 핸마디만 하고 갈게요]

엘은 미련이 뚝뚝 남는 얼굴을 하 고서도 참으로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의 손이 수정구를 소중하게 쓸었

[당신이 없을 때는 기억도 나지 않 았는데, 이제야 내가 얼마나 무의미 하게 살았는지 다시금 실감하고 있어 요 보고 싶어요, 슈슈.]

입 안이 아릴 만큼 달콤한 한마디 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