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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5화 (245/254)

245화

"그럼 의견은 다 모인 건가."

빌헬름이 진 빠진 얼굴로 지도 를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지 친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앞머리 를 쓸어 넘겼다.

장장 5시간 동안 이어진 회의에 모두 지쳐 있었다.

"결정된 것 같군."

마른세수를 한 레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집어 든 그가 검집 끝으로 탁자에 넓게 펼쳐진 지도의 한 부 분을 짚었다.

"지원군은 파블로프 지방 국경 으로 간다."

기나긴 회의 끝에 결정한 것은 지원군의 행방이었다.

직전의 회의에선 유터스와 타티

노 중 하나로 결정되는 것 같았으 나, 당시에 내가 낸 의견으로 인 해 오늘은 파블로프로 북부군이 올 가능성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지그문트가 준 정보를 믿을 수 있을까.'

난 회의가 시작되기 전까지도 확신이 없었으나, 결국 결정을 내 렸다.

나는 전적으로 파블로프 지역을 밀기 시작했다.

지그문트가 알려준 정보라는 걸 제쳐 두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파 블로프 지역으로 온다는 건 일리 가 있는 의견이었다. 그러니 유터 스와 티타노를 두고 싸우던 이들 도 모두 파블로프에 대해 생각하 기 시작한 것 아닌가.

'명심해라. 너조차 확신할 수 없 는 의견엔 아무도 감화되지 않는 다. 수많은 불확실 중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하나를 선택해 현실 로 만드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 다. 지도자가 대우를 받는 이유는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

임을 기억해라.'

아타라에 오기 전, 카이사르는 내게 짧고 굵은 몇 마디 말들을 던져 주었다. 지도자로 사는 방법 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확신 을 가졌다.

'북부군은 파블로프로 올 겁니 다.'

나는 체스 말을 움직였다. 나이 트의 체크메이트였다.

나는 상념을 마치고 회의장을

둘러보았다. 슬슬 마무리되는 분 위기였다.

"지원군은 사흘 뒤에 파블로프 지방으로 떠나는 것으로 한다."

레오가 내린 결론을 끝으로 회 의가 막을 내렸다.

국왕인 그가 가장 먼저 자리에 서 일어나 회의장을 떠났다. 나 또한 다른 이들을 따라 그에게 목 례하고, 레오 바로 다음으로 부관 조나단과 함께 자리를 나섰다.

"바로 숙소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잠시 산책 좀 하다 들어 가도록 하지. 경은 먼저 가 보도 록."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 까?"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 다. 나는 제국 수도에서 영애로 살 때도 개인 호위를 데리고 다니 지 않았다.

내 허리춤의 검을 한 번 본 조 나단이 완벽히 이해했다는 표정으

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깔끔히 허리를 숙인 그가 자신 의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정처 없이 왕궁 주위 를 돌기 시작했다.

회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푸르 던 하늘은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 고 있었다. 누가 색칠하는 건지 환상적인 색깔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하지그래. 커다란 덩치에 안 어울리게 뭐 하는 건 가."

뒤쪽에 느껴지던 인기척이 움찔 했다. 곰 같은 덩치가 움츠러들었 을 것을 상상하면 피식 웃음이 새 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빌헬름 오스테온 변경백. 회의 에서 충분히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아는데 더 할 말이 있나?"

악성곱슬로 구불거리는 짙은 오 렌지색 머리칼이 지는 햇빛을 받 아 붉게 빛났다. 고목을 닮은 진 갈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 었다.

"젊은 놈이 버릇없기는."

"그러지 말지. 내가 늙은이가 꼬 장꼬장하다고 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리라 믿어."

짜증스럽다는 투로 꼬집어 뱉는 빌헬름에게 태평스레 응수했다.

시니컬하게 헛웃음을 뱉은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야성 스러운 인상인데 눈까지 부라리니 정말 야생 불곰 같았다.

"파블로프 지방은 어떻게 생각 해 낸 거지?"

조금 난감해진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쪽 지도자가 직접 말해 줬다 고 할 수도 없고.'

나는 도르륵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오기 전에 아타라 지역에 대해 연구했다."

지그문트의 공을 가로채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마음에 찔리는 것은 없었다. 그 자식은 공을 빼앗겨도 쌌다.

날 미심쩍은 눈으로 곁눈질하던 빌헬름은 이내 짧게 숨을 뱉었다. 노을을 등져서 그런가, 그의 얼굴 이 왠지 따사로워 보였다.

"애송이가 노력은 한 모양이지."

"변경백은...... 지원군이 유터스 로 가길 바라지 않았나?"

생각보다 유순한 반응에 의아하 져서 고개를 기울였다.

빌헬름은 자신의 영지인 유터스 지방의 안전을 위해 지원군이 유 터스로 향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 다. 그의 의견이 나 때문에 꺾인 지금, 성정이 불 같아 보이기에 괜히 내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의외였다.

"흥. 다수가 회의를 통해 도출해 낸 합당한 처사를 인정하지 못할 만큼 쓰레기는 아니다. 날 뭘로 보는 거냐."

"그런 것치곤 솔라티네 제국의 지도자들이 고민 끝에 결정한 지 도자인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윽, 그건......!"

빌헬름이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뜻을 담아 물끄러미 올 려다보니, 그가 살짝 시선을 피했 다.

"자네가 미르임이 밝혀진 지 얼 마 되지 않은 시점 아닌가. 업적 이랄 것도 없고. 그 이름의 후광 에 기대어 뭣도 없으면서 중책을 맡은 애송이인 줄 알았지. 그땐 제국이 우리를 무시하는 줄 알고 감정적이었다."

솔직하고 원색적인 실토였다.

하기야, 나는 기사 경력도 없는, 말 그대로 지원군 지휘관이 첫 경 력인 사람이었다. 낙하산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미르라는 이름만 빼면 내가 얼마 나 못 미더워 보일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런데...... 사고 치지 않는 걸 보니 무난하게는 하는 모양이군."

빌헬름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 시비를 거는 건지 의문이 들 만큼 오해할 소지가 다분한 투였으나, 나는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 선의 칭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실소를 내뱉었을까, 그가 말을 이었다.

"유터스를 고집했던 건 반성하 고 있다. 지도자로서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내 영지에 대한 걱 정이 앞섰지. 어리석었다."

자신보다 넉넉잡아 3배는 어린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며 사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빌헬름의 표정은 부끄 러움 없이 결연했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난 여전히 널 인정하지 않는 다."

"변경백의 인정이 없다고 달라 지는 건 없는데."

"따박따박 말대꾸하기는. 그래. 달라지는 건 없지만 계속 인정하 지 않을 거다."

이 부분에선 또 고집스러웠다. 적의엔 익숙했으니 그저 어깨를 으쓱였을까, 그가 진갈색 눈동자 를 선연하게 빛냈다.

"나이가 모든 것을 좌우하지 않 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좌우하 기도 한다. 나이가 차 성인이 되 는 것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은

달라. 넌 어른이 되기엔 아직 일 러. 그 나이에도 현명하고 강할 순 있겠으나 생명의 무게를 책임 지는 건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후에야 가능하다. 이 생각은 바꾸 지 않을 거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줄 알았건만, 그의 생각은 내 예 상보다 깊었다.

날 힐끗 본 빌헬름이 휙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 예는 갖춰 드리겠

습니다, 지휘관. 제 생각이 틀렸 다는 걸 보여 주십시오."

기대하지 않았던 인정은 내 중 심을 꿰뚫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심장에 묘한 느낌이 일었다.

빌헬름이 커다란 보폭으로 사라 지려 할 때였다.

"잠깐. 멈춰."

우뚝 멈춰 선 빌헬름이 날 돌아 보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누가 지휘관에게 제대로 인사 도 안 하고 가지?"

"......꼭 그러셔야겠습니까?"

나는 나를 노려보는 빌헬름에게 악동처럼 웃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내일 이 파블로프 지방으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밤이 늦어도 잠이 오지 않아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아타라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마 도공학 강국답게 마석을 사용해 빛을 내는 가로등이 거리마다 들 어서서 별처럼 영롱하게 반짝였 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나 는, 문득 미간을 좁혔다.

"으, 윽••••••

소리가 너무 작아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건만, 이번엔 분명히 들렸다. 나는 수면을 위해 누그러 뜨려 놓았던 신경을 잔뜩 곤두세

웠다.

"레, 이샤......

고통이 어려 잔뜩 갈라진 목소 리의 주인은 레오가 확실했다.

'레오 방이 바로 위층이었지.'

나는 다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레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지 도 몰랐다.

창문을 타고 나가 성벽의 틈에 손을 끼워 넣은 나는 거미처럼 빠

른 속도로 벽을 기어 올라갔다.

'젠장, 결계인가.'

위층 창문에 도달한 나는 입술 을 꽉 깨물었다. 레오의 방 창문 엔 결계가 쳐져 있었다.

깨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무 척 단단한 결계라 해체하기 위해 선 오러를 꺼내야 했다. 그러면 대단한 소음이 일어날 게 분명한 데다 유심히 살펴보니 결계가 깨 지는 순간 경보가 울리는 구조로 보였다.

깨고 들어갔는데 별일이 아니라 면 미친놈으로 취급받을지도 몰랐 다.

'설마 그냥 자다 굴러 떨어진 건 가?'

부수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우 왕좌왕하며 창문 앞을 기웃거릴 때였다.

파삭.

무언가 부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결계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나는 놀라서 결계를 바라보았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아리아에게 조금 배워 두었던 마법 공식의 원 리를 힘겹게 되짚으며 마법진을 뜯어보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했 다.

'이거 사람 인식 기능이 있네.'

사람을 알아보고 열어 주는 형

식의 결계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결계가 나를 인식하고 열렸다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 같았다.

'이 자식, 내 정보는 언제 어떻 게 등록해 놓은 거지?'

찰칵.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무척 넓었으나, 왕의 방답 지 않게 화려함이 없고 필요한 것 만 깔끔히 갖춰져 있었다. 레오의

흔적이 가득 묻어나는 곳을 가볍 게 살펴본 나는, 우선 침대로 다 급히 다가갔다.

"윽...... 하......

쌀쌀한 겨울밤임에도 레오의 이 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 었다. 새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세 개쯤 푼 탓에 드러난 쇄골 아 래 흉곽이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굳게 닫힌 눈꺼풀이 파르 르 떨렸다.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레이, 샤, 제발......

레오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 았다.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 단 침입이 아니라는 것에는 안심 이었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좋지 도 않았다.

악몽을 꾼다는 소리를 듣긴 했 지만 직접 보니 훨씬 더 착잡했 다.

" 레오."

나는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속 삭이며 새하얀 머리칼이 젖을 정 도로 흐른 식은땀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악몽으로 고생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을 테지 만, 그럼에도 그리 속삭였다. 레 오가 그만 울길 바랐다.

스르륵.

내 속삭임을 듣기라도 한 듯, 그 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슈슈 •

연한 녹음을 담은 청명한 눈동 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 z*、A " I r I r-

"그래."

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머 리를 쓸어 넘기며 다독여 주었다.

몇 번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는, 내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안아 줘......

술 취했던 때를 마지막으로 더 는 듣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의 어리광이었다. 어리광이라기엔 너 무 간절했지만.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나는 기 꺼이 품을 열어 레오를 끌어안았 다. 날 마주 안은 그가 필사적으 로 내게 매달렸다. 날 감싼 두 팔 은 꼭 나를 속박하려는 쇠사슬처

럼 단단했다.

"죽지 마, 제발."

" 으 "

흐 '

"또 혼자 남게 하지 마......

간절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신 을 향해 기도하는 신도의 목소리 였다. 티 내지 않아 눈치채지 못 했건만, 그는 아무래도 전장으로 떠나는 나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죽지 않아. 네 친구가 얼마나 강한지 여태껏 보여 줬잖아."

나는 창백하게 질려 있는 그의 뺨을 쓸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 나겠지만, 몸의 거리가 멀어진다 고 하여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지 진 않았다.

"살아서 돌아오마. 기다리고 있 어."

아무래도, 그가 많이 그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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