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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246화 (246/254)

246화

칠흑 같던 어둠이 걷히고 서서 히 동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레오의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 레오의 등을 두드려 주는 손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전투시를 제외한 평상시엔 소드 마스터라 해 봐야 쓸데없이 예민 하기만 해서 별로라고 생각했는

데, 이럴 때는 확실히 편했다. 하 룻밤을 꼴딱 새워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슬슬 일어나야지.'

레오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들어올 때가 되었다. 그때까지 레 오 옆에 있었다간 단순히 소문으 로 그치지 않고 내 이름이 아타라 왕국 신문에 대서특필로 기재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게 뻔했다.

나는 레오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어디 가."

그리고 곧바로 붙잡혔다.

나는 레오의 예민한 감각에 감 탄하며 부스스 뜨려 하는 그의 눈 꺼풀을 손수 감겨 주었다.

"내 방으로 돌아가야지. 스포트 라이트는 이미 충분하지 않아? 내일 신문 1면을 나와 장식하고 싶은 야망이 있을 줄은 몰랐는 데."

"......5분만 더."

얕게 뒤척인 레오가 날 꽉 끌어 안으며 그답지 않게 투정을 부렸 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표정 을 굳혔다.

"레오. 아타라에 첩자가 있다며. 누군지 알아냈어?"

르웰린은 아타라로 떠나는 내게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 었다. 그녀가 준 정보이니 확실할 터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내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 지, 눈을 번쩍 뜬 레오가 낮게 앓 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연둣빛 눈동자가 신중하게 빛났다.

"동기와 정황을 살펴 후보를 추 리긴 했지. 하지만 확정은 아직이 야."

아타라에서도 나름대로 힘을 쓰 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짧게 탄식하며 턱을 매만졌다.

"지원군이 파블로프 지역으로 진군한다는 사실도 전해졌을까?"

"......높은 확률로 전해졌겠지."

전쟁은 숨 막히는 머리싸움이었 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오늘 출발하는데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고.'

결정을 번복한다 해도 바뀐 사 항이 전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만약 전해졌다면 파블로 프에 오려던 북부군이 다른 곳으

로 경로를 틀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떡해, 가야지.'

어디를 선택한다 해도 완벽할 순 없으니, 내 선택을 믿어야 했 다. 나는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고 레오에게 물었다.

"첩자 후보엔 누가 있어?"

"길버트 페리 남작, 쉐리 아이나 르 백작,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을 꼽던 레오가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빌헬름 오스테온 변경백."

마지막은 익히 잘 아는 이름이 었다.

"......오스테온 변경백이?"

"응. 행보가 심상치 않았지."

나는 사람 탐지기가 그의 앞에 서 울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는 칼과 아리아가 공인한 마도구가 알려 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 다.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 십시오.'

'그럼 그 모습들도 다 연기였을 까.'

마지막으로 본 빌헬름의 누그러 진 태도를 떠올린 나는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나는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이 너무 힘에 부쳤다. 그렇기에 내 개인적인 손해로 끝난다면 그냥 믿어 버리고 말 테지만, 지금 내 가 서 있는 자리는 그렇게 넘길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돌아오기 전 엔 완전히 색출을 끝내 놓을 테니 까. 슬슬 꼬리를 보이고 있거든."

레오의 두 눈이 세차게 타올랐 다. 그의 표정에서 이 일을 빨리 끝내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나는 피식 웃곤 그의 어깨를 토 닥여 주었다.

"무리하지 말고 잘 있어야 해. 이기고 돌아올 테니까."

무사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거 라고 확신하기에, 유달리 애절하 지 않게, 아침 안부를 묻듯 가벼 운 말투로 작별을 고했다.

왕성에서 파블로프 지방까진 하 루면 충분했다. 한 번의 순간이동 만으로 패튜넘 지역으로 이동해 온 지원군은 눈이 내린 숲을 가로 질러 행군했다.

'황폐하네.'

나는 눈 때문에 움직이기 버거 워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몰며 주 위를 둘러보았다.

겨울을 맞은 숲의 나무들은 모 두 죽어 있었다. 창백한 색채들이 저절로 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그래도 습격 위험은 낮은 것 같 네.'

아타라를 오는 길에 거쳤던 좁 은 협곡이 습격에 최적화되어 있 던 것과는 다르게, 이 숲은 나무

가 촘촘하지 않고 전경이 탁 트여 있었다.

나무들이 하나같이 키가 커 하 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나중 에 휴양을 오고 싶을 정도로 전경 이 좋았다.

"흐아악!"

그때였다. 성인 남성의 가느다란 비명 소리가 내 감상을 방해했다.

나는 벌써 21번째 비명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어엉, 지휘관님......! 이 망아 지 같은 놈 좀 진정시켜 주세요! 아니, 진짜 망아지!"

율리안이 흥분한 말 위에서 힘 없는 종이인형처럼 휘적거리며 간 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 친구 갈기부터 놔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갈기를 쥐어 뜯고 있으니 당연히 흥분하죠. 제

가 율리안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율리안도 날뛸 거 아닙니까."

"사, 살살 잡았어요! 그리고 지 휘관님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 면 저는 아예 머리가 뽑혀 버릴 거라고요! 당근 뽑히듯, 꺄아악!"

말이 성나서 발을 구르자 안장 위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말에게 매달린 율리안이 비명을 질렀다. 제비꽃을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울망였다.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떨어 져도 제가 잡을 수 있습니다."

나는 충고하기를 그만두고 율리 안에게로 말을 몰아 율리안의 말 을 대신 진정시켜 주었다. 율리안 도 만만찮게 진정이 필요해 보이 길래 그의 머리칼도 쓰다듬어 주 었다.

"저, 저 토할 것 같아요......

새파랗게 질린 율리안이 내 손 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며 영혼이 빨려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멀미도 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쓸모없군. 말도 탈 줄 모 르면서 전장엔 대체 왜 나온 건 가?"

내 옆에서 말을 몰던 세레논이 율리안을 보며 혀를 찼다. 해롱해 롱 죽어 가던 율리안이 세레논에 게 눈을 흘겼다.

"아, 예! 참 죄송합니다! 저는 황자님같이 고귀한 분과 다르게 천한 평민 출신이라서 말과 친하 지 않거든요!"

"지금 그걸 지적하는 게 아니잖 나."

"그럼 뭐요! 지금 신분 천하다고 뭐라고 한 거 아니야!"

한동안 이어진 경험으로 나는 이제 세레논과 율리안의 싸움을 배경 음악쯤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율리안이 세레논의 말을 슬쩍 발로 차는 걸 못 본 척하며 고목 을 타고 올라가는 다람쥐나 보고 있었을까, 아래에서 돌부리 걷어 차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걸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꼴값들을 떨어요......

카시아가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지나가며 음산하게 중얼거 렸다.

그녀는 갑옷을 꾸역꾸역 껴입는 것보다 가벼운 차림으로 전투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 때문에 옷이 얇아 추워 보였다. 새하얀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습니까, 카시아 경? 원하 신다면 말에 태워 드릴 수 있는데 요."

나는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 았다. 카시아가 평민 기사라 걸어 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 쓰 였다. 내 말에 나를 올려다본 카 시아는 잠시 눈을 끔뻑이더니, 딸 기처럼 빨개진 코를 벅벅 비비고 고개를 저었다.

"특별 대우는 받기 싫습니다. 그 리고 군인이라면 이 정도 행진은 기본입니다."

자존심 강하고 기사로서의 의무 에 철저한 그녀다운 말이었다.

대답을 반쯤 예상한 나는 짧게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 를 존중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율리안과 치열한 말싸움을 마치 고 돌아온 세레논이 킁킁거렸다. 그 말에 카시아도 덩달아 미간을 좁힌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말이군요. 단내가 납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래전부터 뭔지 모를 달짝지근 한 냄새를 느끼고 있었으나, 이 지방에서 명물이라는 겨울에 피는 야생화 군락이 가까워지는 거라 짐작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건 만. 아무리 가도 야생화는 코빼기 도 보이지 않았다.

'냄새가 묘하게 익숙한데.'

미묘한 기분이 척추를 훑고 지 나갔다. 나는 표정을 찌푸린 채로 기시감의 정체를 떠올리려 노력했

다.

' 아.'

그리고 깨달았다.

우뚝.

"......지휘관 님. 무슨 일 있으십 니까."

내가 멈춰 서자 조금 떨어진 곳 에서 말을 몰던 조나단이 물었다. 나로 인해 지원군 전체가 정지했 다.

그 가운데, 나는 불구대천의 원 수를 보는 심정으로 하늘만 노려 보았다.

팔락.

아주 미세하던 날갯짓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냄새도 갈수록 짙어졌다. 나는 입 안에서 욕설을 짓씹었다.

'개자식들. 이번에도 이러기냐!'

人 己르 -- o •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 었다.

"다들 습격에 대비하라!"

"습격이요?"

말 위에서 죽어 가던 율리안이 내 외침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내 말을 따라 검을 뽑아 들던 카시아는 눈에 뭐가 들어간 듯 눈을 벅벅 비볐다.

"잠깐, 무슨 가루가......

콜록, 기침을 한 세레논이 다급 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선 아주 미세한 입자의 붉은 가루들이 나풀거리며 떨어지 고 있었다.

야행성 마수라 지금 등장할 거 라 상상을 못 해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나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를 악물었다.

꿀처럼 달콤한 냄새. 반짝이는 붉은 가루들. 우아한 날갯짓.

어느새 하늘이 나비 모양 그림 자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키피라의 습격이다!"

환각을 일으키는 붉은 가루를 날갯짓할 때마다 흩뿌리는 나비 형태의 마수, '붉은 악몽' 키피라 였다.

"모두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아라! 가루를 일정 이상 들이켜면 환각 이 일어난다!"

나는 다급하게 파란 망토를 쭉 찢어 코와 입을 가렸다. 키피라를 지긋지긋하도록 상대하며 환각 가 루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었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들이켜는 건 위 험했다.

나는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을 향 해 소리쳤다.

"흩어지지 마라! 하늘에서 올 거 다! 기사들은 가루를 마시지 않는 걸 최우선 목표로 하고 가까이 오 면 베어라!"

나는 이를 뿌득 갈았다.

지원군엔 마법사보다 검사가 몇 배는 더 많았다. 오러를 사용할 수 없는 일반 검사들은 원거리 공 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날아다 니는 키피라와의 상성이 극악이었 다. 키피라가 달려들 때까지 멍청 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쉬이익!

하늘에서 날카로운 독침이 빠른 속도로 쏟아졌다.

"마비독이 묻은 독침이다! 방어 하라!"

촤악!

말 등을 박차고 오른 나는 검을 휘둘러 검은 오러를 날렸다.

범위를 크게 잡은 검은 오러에 독침들 대부분이 휘말려 잘려 나 갔지만 미처 베지 못한 독침에 맞 고 쓰러지는 병사들이 몇몇 보였 다. 나는 거세게 둥둥 울려오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젠장,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 지? 키피라의 약점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던 찰나, 한 가지 정보가 섬 광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 다.

"물! 빨리, 물!"

"콜록! 네?"

얼굴을 천으로 두르고 있음에도 가루가 들어가는지 몇 번이고 잔 기침을 뱉던 세레논이 반문했다. 나는 다급하게 마법사들을 돌아보

았다.

"마법사들은 하늘을 향해 물 마 법을 사용해라! 키피라는 날개가 젖으면 날지 못한다!"

평범한 나비와는 다르게, 붉은 가루는 키피라의 날개를 보호하지 못했다. 물은 키피라의 가장 큰 적이었다.

촤아악!

내 명령을 들은 마법사들이 하 나같이 물 마법을 발동했다. 물줄

기들이 하늘을 향해 솟는 것과 동 시에 하늘이 깜깜해지도록 덮고 있던 키피라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나비들이 물에 젖어 팔 딱대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끔찍 했기에 여기저기서 헛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걸로는 약해. 수가 너 무 많아!'

"젠장, 눈이라도 내리면......!"

요 근래 시도 때도 없이 함박눈 을 쏟아붓던 하늘이 오늘만은 야 속할 만큼 화창했다.

내가 미칠 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물이라면, 혹시 성수도 괜찮아 요?"

내 옆에서 새하얀 옷자락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조용히 있던 율 리안이 물었다.

' 성수?'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려 그를 바 라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최고입니다. 신 성력은 마수를 상대하기에 가장 좋지 않습니까. 물은 키피라의 움 직임을 막는 정도지만 성수는 키 피라의 날개를 태울 수 있습니다. 성수가 떨어지면 붉은 가루도 정 화될 거고, 환각에 걸린 병사들도 회복될 테니 일석삼조입니다."

내 대답에 연보랏빛 눈동자를 굴린 율리안이 크게 심호흡을 했

다.

"저, 지휘관님 손난로로 오긴 했 지만 대신관은 대신관입니다. 성 수의 비를 내릴 수 있어요."

"정말입니까?"

나는 반색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당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줄 알았더니......!"

"다시 봤습니다......I"

혼비백산한 분위기에 휘말려 마 찬가지로 정신이 없어 보이던 세 레논과 카시아가 율리안을 향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허공에 뛰어올라 그의 어깨를 붙 잡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빨 리

"그, 그런데 큰 문제가 있어요!"

율리안이 내 말허리를 끊으며 소리쳤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홀리 레인을 부르는 주문 이...... 기억이 안 나요......!"

솟아날 구멍은 구멍인데, 문제가 많은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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